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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전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는 재정위원회 헌신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렀다는 말은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가 살고 있는 각자의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작은 예수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요한복음 10 4장 12절과 1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오,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서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생활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고 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기 쉽습니다.
우리가 헌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헌신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작은 이웃으로 살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예배는 재정위원회 헌신 예배니까 재정위원회에 속한 분들만 헌신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녀로서의 사명은 재정위원회 분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에 헌신하는 마음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민수기 32장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머나세 지파의 일부가 어떻게 요단강 동쪽 땅에 정착해서 살게 되었는지 그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단 동쪽의 땅이 원래는 약속의 땅 바깥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 34장은 약속의 땅의 경계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남쪽 경계선은 사해에서 이집트 국경까지이고, 서쪽 경계선은 지중해 바다입니다. 그리고 북쪽 경계선은 지중해에서 호르산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동쪽 경계선은 어디일까요?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까지 이르는 요단강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요단강 동쪽에 있는 땅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전쟁하는 가운데 요단강 동쪽 땅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지해 놓은 이 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그런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발생한 것입니다. 그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고 요단강 동쪽에서 머물며 계속 살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요구를 했을까요?
32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루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가축대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 사람들은 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쪽 땅은 목축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그대로 머물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모세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화를 낸 이유는 이 두 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유익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단강 동쪽을 차지할 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만 그 전쟁에 동원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민수기 21장에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12지파 모두가 그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로 적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루벤과 갓 지파 이 두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은 자기들만 차지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이들은 이미 정착할 땅을 얻었으니 요단강 서쪽 약속의 땅을 정복할 때는 그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동쪽 땅을 얻을 때는 12지파가 함께 싸웠는데 서쪽 땅을 얻을 때는 자기들은 빠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이야기를 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에게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그 중재안이 오늘 읽은 본문인데요.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요단 동쪽 땅에 가축을 기를 우리를 만들고 가축들이 살 성을 가족들이 살 성을 쌓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요단 동쪽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다시 공격해 오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먼저 성을 쌓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째 이후에는 자신들이 가나안 정복의 선봉대가 되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면은 제1진은 유다 지파가 소속된 그 지파들입니다. 이들은 이진이에요. 그런데 자신들이 선발대로 다른 지파 앞에 나가서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하면 자기들은 그 약속의 땅에서는 자기 몫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미 요단 동쪽에서 땅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은 나머지 열 지파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16절에서 19절까지 내용입니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약속한 대로만 한다면 요단 동쪽 땅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이것이 20절에서 24절의 내용인데요. 20절에서 24절을 읽어보면 주님 앞에서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동하라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자 25절에서 27절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좋습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3절을 보면은 이 두 지파 외에 므낫세 지파 일부가 이 무리에 합세하는 것을 봅니다.
또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요단강 동쪽 땅에 이 지파들이 건너와 살게 되었다. 성경은 그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지금 뭘 말하는 것 같습니까?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이들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면서 제사장의 사명을 맡겼습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사명을 맡긴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열방 가운데 구원의 빛을 비춰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타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사위께서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시고 그리고 한 분으로 존재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책을 읽다 보면은 그 책에서 작가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듣다 보면은 그 사람의 가치관은 이것이구나,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을 좋아하구나 그것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추리가 가능합니다.
그림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미술에 대해서 조예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막눈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그림들을 비교해 보면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작가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미에 대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작품에는 작가의 삶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삼위일체이십니다. 고독하게 홀로 계시면서 자기 영광에 심취해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함께 교제하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공동체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도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공동, 사랑의 교재가 있는 공동체,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그런 질서 있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공동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해요. 공동체를 통해 보여줘야 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12 지파 공동체가 하나 되어야 된다는 것, 분열이 아니라 하나 되어야 된다는 것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공동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유가 뭐였습니까?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은 한 사람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전체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7장을 보면 아간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에서 얻은 모든 것을 불러 태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번제로 올려드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아가는 눈앞에 있는 검덩어리와 명품 외투를 보고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몰래 숨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그 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절대 패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성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이 이기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기심이 공동체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 것입니다.
캐나다에 뉴펀들랜드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대서양 연안 도시인데 수백 년 동안 대구 잡이로 많은 번영을 누린 도시였습니다. 물고기 대구 말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어업 기술이 발달을 하면서 대형 크롤선을 가지고 와가지고 물고기를 긁었습니다. 엄청나게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았으니까 부자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1992년에 이 지역에 큰 변화가 생깁니다. 대구가 고갈돼 버린 거예요. 더 이상 어업을 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캐나다 정부는 대구잡이 모라토리움을 선언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제 더 이상 물고기가 없다. 우리는 어업을 해서는 안 된다. 어업 금지 명령을 내린 겁니다. 이렇게 되자 그 지역 주민 3만 명이 실직을 했다고 합니다. 어부들도 실직을 했고요. 물고기 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눈앞의 욕심에 이기적으로 반응하면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지역 전체가 황폐화된다는 말입니다. 이기심의 무서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그것이 점점점점 이기주의로 변해갑니다. 공동체 마인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자기 이익에 집착합니다. 우리 시대를 비판하는 분들은 미래 세대가 사용해야 할 자원들을 지금 세대가 미리 당겨서 쓰고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왜 미래 세대의 것을 미리 당겼습니까?
나는 풍족하게 살다 죽을 것이니 미래의 문제는 니네가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내 문제 아니라는 거예요.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르우벤과 가지파도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선봉대로 가겠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헌신을 다짐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헌신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교회에 한번 적용해 봅시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은 한국 교회의 전성기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한국교회가 고도 성장을 할 때 그때 그 덕분에 신앙생활을 했고 그래서 지금도 그 향수를 가지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한다면 우리의 미래 세대는 어떻게 될까요?
원래 우리 교회 표어가 믿음의 세대를 이어가는 교회입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희생하자 그런 신앙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오늘 재정위원회 헌신 예배로 드리고 있는데요. 만약 재정적인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헌신하지 않는다면 이 일도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많은 헌신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공동체에서 헌신은 중요합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빠져버리면 나머지 열 지파가 힘들어집니다. 이 공동체에서 내 부분을 내가 빠뜨려버리면 다른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헌신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펼쳐갑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부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요단강을 건너려 하지 않았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목축을 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좋은 목초지를 포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그곳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 아니라 할지라도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왜 그렇죠?
역설적으로 뒤집어서 보면 이 사람들은 그 땅, 요단강을 건너가서 들어갈 약속의 땅, 그 땅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었던 겁니다. 그 땅에 대한 큰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면 이것을 버리고 갔을 겁니다. 창세기 23장에 아브라함 가족 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롯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과 헤어지고 소돔 땅으로 갑니다. 소돔 땅은 세상이 주는 번영이 있었고 화려한 곳이었습니다. 당장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때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의 아내는 소돔의 번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딸들은 소돔의 문화에 길들여져서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부정한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롯의 가정이 영적으로 완전히 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것만 집착하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눈앞에 있는 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두 차원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는 영혼의 차원입니다.
우리 시대는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고 궁극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비, 긍휼,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인권 운동, 소수자에 대한 존중, 복지 환경 문제 이런 것에 힘을 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전에는 너무 영원한 것만 강조하고 이 땅인 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질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땅의 것만 강조하고 영원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땅의 삶이 죽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 점점점점 이 땅의 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물질의 성공, 세상적인 안락함, 그걸 많이 말합니다. 그걸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요단강, 크지도 않은 요단강 그 좁은 강 바로 건너편에 약속의 땅이 보이는데도 우리는 건너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비전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이런 시대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즉 육신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자신의 육신이 늙어가는 것, 자신의 육신이 약해지는 것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디모데후서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나는 얼마 남지 않아서 의의 면류관을 쓸 것이다. 그 기대를 가지고 그 시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이 땅의 삶이 어려워져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향해 달려가려고 애를 씁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선봉장이 돼서 요단강을 건넜던 이유는 모세 앞에서 이 소망을 회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소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었던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돌이켜 헌신을 결단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사명들을 주십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될지 그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이 공동체가 바로 서는 것,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헌신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소망의 중요성입니다. 헌신과 소망으로 신앙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사명자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작고 약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사명,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그 사명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잘 감당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공동체를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헌신하고 소망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몸 교회를 함께 세워 갑시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십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