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랑당도(豺狼當道)
[요약] (豺: 승냥이 시. 狼: 이리 랑. 當: 지킬 당. 道: 길 도)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승냥이와 이리에 비길 만한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요로(要路)를 점거하여 권세를 떨치는 비유하는 말.
[출전] 《후한서(後漢書) 장강전(張綱傳)》. 《자치통감(自治通鑑)卷052》.
[내용] 이 성어는 후한(後漢) 순제(順帝)때 장강(張綱)이 한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東漢) 순제(順帝)의 외삼촌 양기(梁冀)이 태후(太后)의 비호(庇護) 하에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을 하나 둘 조정의 요직에 기용하였다. 얼마 후, 조정에는 양씨(梁氏) 집안사람으로 넘쳐났다. 이들은 뇌물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자신들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법을 어기는 것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에 순제(順帝) 한안(漢安) 원년(142), 조정에서 시중인 하내(侍中河內)의 두교(杜喬), 주거(周舉), 수광록대부 주허(守光祿大夫周栩), 풍이(馮羨), 위군 난파(魏郡欒巴), 장강(張綱), 곽준(郭遵), 유반(劉班) 등을 나누어 주군(州郡)으로 보내, 현능한 사람을 표창하고 충실하고 근직한 사람을 드러내도록 했다. 횡령을 하거나 죄가 있는 자는 자사(刺史)와 2천 석 이상의 관리는 역마로 보고하고, 현령 이하는 왕명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처리하도록 했다.
장강(張綱)은 홀로 마차를 몰아 낙양성 밖 역참 부근에서 수레바퀴를 묻어 버리고는 말했다.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는데 어찌 여우와 살쾡이에게 묻겠는가(張綱獨埋其車輪於雒陽都亭,曰:豺狼當路,安問狐狸!).”
그러고는 탄핵 주소문을 올렸다.
“대장군 양기와 하남윤 양불의는 외척의 지원에 힘입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보잘것없는 자질을 가지고 아형(阿衡, 황제를 보필하는 임무나 재상)의 임무를 맡아 오상의 교화(五敎)를 선양하여 황제를 보좌하지 못하고, 봉시장사(封豕長蛇, 탐욕스런 돼지와 음험한 뱀)가 되어 탐내는 바를 거리낌 없이 삼켜 버리고, 마음대로 좋은 물건을 빼앗고, 방자하기 끝이 없어 곳곳에 아첨하는 무리를 심어 충성되고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니, 이야말로 하늘도 용서할 수 없으므로 대벽(大辟, 참수)의 형벌을 가해야 마땅합니다. 그가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 15가지를 적어 올립니다(大將軍冀、河南尹不疑,以外戚蒙恩,居阿衡之任,而專肆貪叨,縱恣無極,多樹諂諛以害忠良,誠天威所不赦,大辟所宜加也。謹條其無君之心十五事,斯皆臣子所切齒者也).”
주서가 황제께 올라가자 수도가 온통 놀라 떨었다. 하지만 당시 양기의 여동생이 황후여서 황제의 총애가 깊었고 조정에 인척인 양씨들이 가득했으므로, 황제는 비록 장강의 말이 바른말인 줄 알았지만 끝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時, 冀妹爲皇后, 內寵方盛, 諸梁姻族滿朝, 帝雖知綱言直, 終不忍用也).
장강이 자기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양기는 언젠가는 기회를 보아 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광릉군(廣陵郡)에서 장영(張嬰)이라는 도적이 탐관오리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수만의 민중을 모아 태수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1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 도적 떼를 평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지역에 군대를 보내 진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양기는 황제에게 장강을 광릉태수로 임명하여 장영을 토벌하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폭도들의 손을 빌려 장강을 죽일 생각을 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광릉태수로 부임한 장강은 도착하자마자 곧 직접 장영을 찾아가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위무하였다. 장영은 장강이 전임 태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무리들을 데리고 와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다시 선량한 백성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광릉 지방의 백성들은 장강의 선정에 크게 기뻐하며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부중지어(釜中之魚) 참조) 장강은 부임한 지 1년이 되던 해에 급작스레 병을 얻어 죽었다.
장강이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고 있다고 한 말에서 ‘시랑당도’가 유래했다. 원문의 오교(五敎)는 아버지의 엄함, 어머니의 자애로움, 형의 아우에 대한 우의, 아우의 형에 대한 공경,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도(父義, 母慈, 兄友, 弟恭, 子孝)에 대한 교육을 말한다.
양기는 순제 때 여동생이 황후가 되자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충제(沖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등 4대 황제에 걸쳐 무려 20년 동안이나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발호(跋扈) 참조)
오히려 이 일이 있은 뒤, 梁冀과 그의 무리들은 정권을 농단하고, 더 심하게 착취를 일삼았다.
한 집단, 정권이 몇 몇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면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감취기 위해 또 다른 비리를 저지르게 되고, 이 일이 반복되면 결국 그 집단,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나중에 이를 바로잡으려 해도 실효를 거두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이를 시정하려는 정의로운 인물은 있게 마련이다. 張綱같은 젊은 관료가 황제에게 정권의 대신을 '승냥이'와 '이리'에 비유하면서 과감하게 황제에게 직언(直言)한 것은 목숨을 건 진정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이런 젊은 관료의 직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東漢은 順帝 이후 얼마 안 되어 멸망했으니 말이다.
자료; 고사성어대사전 | 저자김성일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