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2
신경림의 `농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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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
고 난 텅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
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
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
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나
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
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 전문).
신경림(61)씨의 시집 <농무>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 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출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집을 자비출판하는 것이야 관례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문제
는 `월간문학사'. 정식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 무허가 유령 출판사의 정체인즉, 한국문인
협회의 기관지인 <월간 문학>과 관련돼 있다.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한 시인은 절친한
지기인 소설가 이문구씨가 편집을 맡고 있던 이 잡지의 명의를 잠시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 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
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창비시선'의 무녀리로서 <농무>는 좁게는 이 기획의 성격을, 넓게는 민족문학 진영의 시
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정도 규정해 주었다. <농무>가 지니는 그같은 규정력은 평론가 유종
호씨에 의해 `선행 시편의 추문화'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바 있다. 이 시집의 어떤 점이 앞선
시들을 한갓 추문(醜聞)으로 만든 것일까?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풍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
고, 시와 현실,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농무>의 새로움은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
으로 크게 구별된다.
“어떡헐거나./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우
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하얗구나.” (`겨울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
나.” (`파장')
신경림씨는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시단에 나왔다.“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로 끝나는 `갈대'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은 앞에서 든 시집 <농
무>의 전반적인 기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시인이 등단 이듬해 초까
지 시를 발표하다가는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65년 말까지 10년 가까이 침묵
을 지켰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썼던 시들에 대해 회의도 생겼고, `불온한' 독서회에 가담해 있던
차에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농
사도 지어 보고 광산이나 공사장 일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
더라.”
<농무>에 그려진 농민적 삶의 세목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시인이 고향인 충
북 충주를 비롯해 문경·평창·영월·춘천 등지를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사는 안 되고 세상은 갈수록 힘겨운 씨름 상대로 변해가는데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
은 술에나 취하고 광태(狂態)를 연출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한다. 울분과 절망에 휘둘리
던 농민들은 문득 짐을 꾸려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 버리자고 복어알
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산 일번지')
시집 <농무>의 또다른 축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는“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
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주정을 하는 또다
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시집 <농무>의 무대는 시인의 고향인 충주시 노은면 연화리 장터와 보련골, 그리고 충주
시 일대다. 13대 선조 때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보련골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보련산
(764m) 아래의 아주 신씨 집성촌이다. 산과 계곡, 적당한 크기의 들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은 구한 말부터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촌이 됐다. 시인의 탄생지인 입장(立場)은 광산
개발에 따라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큰길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크지 않은 면소재지
에도 처음으로 4층짜리 연립주택이 세워져 `노은 빌라 분양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
에 나부낀다. 보련산의 그 많던 탄광은 오래 전에 폐광돼 보련골은 전형적인 농촌의 면모를
되찾았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 정경의 어디에서도 30년 전의 울부짖음은 들을 수 없다.
보련산 너머 남한강변의 목계나루는 <농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의 또다른 대표시
인 `목계장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
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앉아 쉬곤 했던 주막은 속절없는 세월에 쫓겨 간 곳이 없다. “민
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를 대신해서는 매점의 산뜻한 파라솔이 성하(盛夏)의 햇볕
을 피해 그늘을 찾아든 길손들을 맞이한다. 폐쇄된 나루 아래쪽에는 지난 73년에 세운 목계
교가 시의 이야기를 과거로, 과거로 밀어내고만 있다.
글:최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