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숙 시집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의 보도자료
한인숙 시인은 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으로는 {푸른 상처들의 시간}과 {자작나무에게 묻는다}가 있다. ‘안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고, 현재 한국문인협회회원, 평택문인협회회원, 시원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인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음악적 지식의 시적 활용’의 가장 탁월한 예이며, ‘콩나물 악단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
물을 준다
몇 그릇의 소리를 흠뻑흠뻑, 진화되지 못한 악보의 정수리에 부어내린다
졸음을 떼고서 거푸 붓는 음계의 간격 속
양은 다라이로 쏟아지는 잡음을 걸러 몇 번이고 재생시킨다
격한 반주엔 머리가 갈라지고 잔뿌리가 생긴다고
감미로운 사랑을 주라고 어머니는 당부하신다
아직은 불협의 뭇매를 버텨 낼 수 없는 콩나물
때론 아삭한 탱고를
때론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된 보사노바의 거나한 취기를 쏟아낸다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 성장의 뿌리는 가난이고 그 시절의 콩나물은 귀머거리였다
가난의 화음에도 비릿한 날개만 달려고 할 뿐
도돌이표처럼 대물림 되는 빈곤의 음표들을 걸러내지 못했다
한낮이 되어서야 졸아들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숙취 속에서
우리의 오후는 이빨 빠진 하모니카처럼 빈 소리만 내곤 했다
콩나물을 키우는 것
말갛게 고인 가난을 비워내는 일
우리는 우리의 귀가 더 먼 공복에 가라앉을 때까지
콩나물의 순진한 화음에 길들여졌고
콩나물은 예나 지금이나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음이라도 솎아내듯 웃자란 몇 줌의 화음을 뽑아내자
등 뒤 락은 지난밤의 불면을 털어내며 한껏 진화되고 있었다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문
“물을 준다/몇 그릇의 소리를 흠뻑흠뻑, 진화되지 못한 악보의 정수리에 부어내린다”라고 말할 때, 콩나물은 음표가 되고, 콩나물 시루는 악보가 된다. “격한 반주엔 머리가 갈라지고 잔뿌리가 생긴다고/ 감미로운 사랑을 주라”는 “어머니는” 음악 감독이 되고, “아직은 불협화음의 뭇매를 버텨 낼 수 없는 콩나물”은 “때론 아삭한 탱고를/ 때론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된 보사노바의 거나한 취기를 쏟아낸다.” 이때에 콩나물은 음표이면서도 콩나물 악단의 단원이 되고, 이 콩나물 악단은 때로는 아르헨티나의 아삭한 탱고를, 때로는 브라질의 대중음악인 보사노바의 거나한 취기를 쏟아낸다. 요컨대 콩나물 악단은 더 강하고 정형화된 음악, 즉, 금속성이나 고음을 선호하는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내 성장의 뿌리는 가난이고 그 시절의 콩나물은 귀머거리였다”는 것, “가난의 화음에도 비릿한 날개만 달려고 할 뿐/ 도돌이표처럼 대물림 되는 빈곤의 음표들을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 “한낮이 되어서야 졸아들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숙취 속에서/ 우리의 오후는 이빨 빠진 하모니카처럼 빈 소리만” 냈다는 것----. 콩나물은 아버지가 되고, 콩나물은 어머니가 된다. 콩나물은 오빠가 되고, 콩나물은 동생이 된다. 가난처럼 늘 푸르고, 가난처럼 무성한 것도 없다. 가난처럼 독하고, 가난처럼 잔인한 것도 없다. 콩나물은 가난했고, 콩나물은 귀머거리였다. 콩 나물은 도돌이표처럼 대물림되는 음표들이며, 콩나물은 이빨 빠진 하모니카처럼 빈 소리만 내는 악기였다.
한인숙 시인은 그의 가난을 말갛게 비워내는 가수였고, 그가 그의 가난을 말갛게 비워내는 동안 그의 콩나물들(가족들)은 더욱더 순진한 화음에 길들여졌고, 따라서 콩나물은 예나 지금이나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소음이라도 솎아내듯 웃자란 몇 줌의 화음을 뽑아내자/ 등 뒤의 락은 지난밤의 불면을 털어내며 한껏 진화되고 있었다.”
콩나물 악단은 보컬, 리드 전기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등으로 구성된 ‘록 그룹’이었던 것이다.
가난으로 콩나물을 가꾸고, 콩나물로 가난을 말갛게 비워낸다.
짚동가리가 타들어 간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뛴다
외양간,
소의 눈에서 불이 이글거린다
고삐를 움켜쥔 아버지는 워워,, 잔등을 쓰다듬으며 소를 끌어내려 했지만
화염 속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제 새끼를 다리 사이로 품고서야 주춤, 일어섰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소의 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괜찮다며 젖은 수건으로 소를 닦아주던 아버지
아버지와 소는 한통속 이었다
쇠전에서 가장 비루먹은 소를 사온 아버지는
쑥 뿌리며 돼지감자 등 보신이 될 만한 것을 먹였다
엉덩이에 엉겨 붙은 똥을 갈퀴손으로 벅벅 긁어주면
소는 답례하듯 꼬리를 툭툭 쳤다
털에 윤기가 나고 잔등에 살이 올랐다
워낭소리만 들어도 발정기를 알아챈 아버지는 씨 좋은 황소를 끌어다 대곤했다
나대는 송아지를 몰아들이느라 학교에 지각하는 날도 숱했고
노느니 소 등에 파리를 잡아주라는 아버지의 주문은 우리를 질리게 했다
어찌 보면 우리 집의 가장 상전은 소였다
소 서너 마리 장에 나가는 날은 소 대신 땅문서가 들어왔다
소 보다 먼저 늙어간 아버지
묵정의 기억이 되새김질처럼 고이고 아버지의 땅에 잡초만 무성하다
- 「소」 전문
그의 시는 특정한 배경 없이 존재론적 슬픔이나 존재론적 기쁨이 채색되어 있지 않다. 어떤 구체적 풍경 속에서 반드시 현실과 내면이 동반된다. 이는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자의 건강한 의식의 발로이며 더불어 자연에 대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위의 작품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키우던 소를 하나로 엮어 삶의 현장을 펼쳐내고 있다. 시인의 유년 시절이 섬세한 행간에 투영되어 있는 작품에서 시인은 “소 보다 먼저 늙어간 아버지”의 퇴락을 가슴 아파한다. 어린 시절 지켜보았던 아버지의 삶을 모습을 불난 외양간 안의 소를 통해 비유적으로 그려내는 시법은 대단히 감각적이다. 불이 난 외양간 안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소가 “제 새끼를 다리 사이로 품고서야 주춤, 일어”서는 모습과 “이제는 괜찮다며 젖은 수건으로 소를 닦아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동일시되면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자식 사랑이 온전히 전해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들이 바뀌고 변하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자식에 대한 사랑은 미물이나 사람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시인의 이러한 공감대는 이것이 아버지와 자식 간의 혈육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소와 송아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울림의 파장이 크다. 시인은 인간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마치는 풍경이 아니라 동물이나 자연 등 그가 머물고 보았던 세계의 다양한 대상들을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고 시적 사유를 심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화자가 보기에 “아버지와 소는 한통속 이었”고, “우리 집의 가장 상전은 소였다.” 아버지는 왜 소를 상전처럼 모셨을까? “소 대신 땅문서가 들어왔다”는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소가 가계으 재산 증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소는, 단순히 하나의 수단과 대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자기 자신이었다. 아버지의 진심을 화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는 안계시고 “묵정의 기억이 되새김질처럼 고이고 아버지의 땅에 잡초만 무성”한 현실이 시인은 안타깝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라 부정(父情)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유의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그리움에 대한 감정들은 시인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펼쳐내는 무의식적 욕망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인숙 시인이 자연이나 어떤 전통적 세계의 풍경을 그려낼 때 그 억양과 뉘앙스가 복고풍의 진부함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신선함과 일종의 패기를 전해준다.
한인숙의 시가 지닌 탁월함의 배경은,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을 시로 만들어내는 그만의 시 정신에 있다. 그 강인함 속에는 인간을 향한 사랑과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 더불어 섬약한 감수성과 언어를 탁마하는 집요한 손길, 격정과 절제의 긴장 등이 전제되어 있다. 이때 시적 자아는 스스로에 탐욕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강렬한 주관에 의해 묶여 있지도 않다. 오히려 스스로 대범하게 놓아버림으로써 강한 욕망의 주관에 포박되지 않는 시적 자아를 갖게 된다. 이때 한인숙 시인이 갖는 시세계는 초월의 세계가 된다. 어찌 보면 그의 시세계는 이 초월이 빚어내는 공간이며, 초월을 향한 극복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해마다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고 많은 시집들이 출간되지만, 정작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이거나 재미 있는 시, 훌륭한 시를 찾아보기는 더욱 힘들어진 느낌이다. 즉 세상이 변화하고 현실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시대적 감수성을 갖추고 그 시대에 감응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 시대에 감응하는 감성과 시 정신은, 감상과 인식의 주체인 독자에 전이되는데, 이때 감동의 질을 전통적인 감수성과 파장 안에서만 포착하려는 시도는 시대에 뒤쳐진 게으름으로 읽힌다. 한인숙 시인의 작품들은 이런 한계를 과감하게 뛰어넘으면서 자기 세대론적 입장의 정서적 당위성을 유지하는 한편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능동적인 감정을 포착해낸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철저한 내성적 자세나 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 앞에서 자아를 스스로 해부하는 모습이 자아와 세계, 자아와 사물과의 관계로 확대되면서 한인숙의 시는 뜨겁게 대비된다. 우리가 오늘 한인숙의 시를 밑줄 그으며 읽고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선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병호 시인, 시인수첩 주간 및 협성대학교 교수
----한인숙 시집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서출판 지혜, 양장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