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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9일 수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 1사무 7,4-5ㄴ.12-14ㄱ.16
제2독서 : 로마 4,13.16-18.22
복 음 : 마태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히브리인들의 문화에서 약혼은 혼인에 포함된 중요한 과정입니다.
일단, 일단 약혼하면 남편과 아내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혼인할 때까지,
적어도 일 년은 남녀가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와 함께 살지 않았던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것은,
요셉의 처지에서는 마리아가 율법에서 금하는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히브리인에게 ‘의롭다’는 말은
곧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에
실제로 마리아에게 죄가 있는지 따져 보았어야 합니다.(신명 22,23-27 참조)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율법에 따라 마리아의 죄를 따져 묻는 대신,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로 합니다.
어쩌면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과정에
율법에서 금하는 죄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이러한 요셉이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꿈에서 마주하고,
이미 자신이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 있다고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자신의 상황을 마주하지 못하고
요셉처럼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차마 용기가 없어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외적인 상황과
내적인 상태를 바라볼 기회가 온다면,
요셉 성인처럼 그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겸손하게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을 읽고 있으면 크게 와 닿는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을 통해 쓰고 싶은 것도 떠올려집니다.
예전에는 책에 밑줄을 그어서 기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책에 표시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는 사람(다시 읽는 본인도 마찬가지)에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표시에 매여서 자기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표시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다 읽은 책을 본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어서 더 깨끗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밑줄보다 클립을 꽂아두었습니다.
이 클립으로 표시한 곳을 나중에 쓰면서 정리할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읽으면 왜 클립을 꽂아두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분명 크게 와 닿는 구절이었는데, 다시 보면 별 내용이 아닙니다.
이제는 곧바로 적습니다. 지금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미루면 잊어버립니다.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뒤로 미루곤 합니다.
그 순간에 해야 할 것인데도 나중에 해도 충분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명을 유한하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너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사랑의 실천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실천하는 결정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 간직하셨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강림’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지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의로운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성인이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기까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우거나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해서 돌로 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파혼으로 인해서 그 사랑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계시에 곧바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버리지 않고, 또 사랑을 즉시 실천하는 그 모습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뒤로 미뤄서도 또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계속해야 하는 사랑이고, 즉시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비오 9세께서는 요셉 성인을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1870년),
비오 12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신자들은 요셉 성인께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로서 간구합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요셉성인의 ‘보편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하신 교황교서 <아버지 마음으로>(2020.12.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주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열심을 다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조욱현 토마 신부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였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 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1)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
요셉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 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이 된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되어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티브로 한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통을 지키려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변화를 꿈꾸는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료 추기경)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히 두 교황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두 사람의 깊은 고민과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를 지키려 했지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반면,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회가 좀 더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시절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하느님 앞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통을, 베르골료 추기경은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교회는 변해야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드러나는 예표라면,
신약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오늘 저는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두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구약의 요셉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믿었지만,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 큰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과 배신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다소 조용한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헤로데 왕이 아기 예수님을 해치려 하자,
또다시 꿈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나자렛으로 가서 예수님을 양육합니다.
신약의 요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께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저는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요셉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자"였다면, 신약의 요셉은 "꿈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행동하는 신앙과 침묵 속의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약의 요셉을 통해 "가장 큰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나온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요셉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둘 다 꿈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둘 다 고난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셋째, 둘 다 중요한 순간에 용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요셉은 그 계획을 믿고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두 요셉과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의 요셉처럼 고난을 겪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신약의 요셉처럼 조용히 순종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의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닉네임이 붙습니다.
마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양부,
나자렛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자들의 수호자, 성교회의 보호자...
구세사 안에서 요셉 성인의 공로와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지
미사 경문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찬 예식 내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리아 못지않게
요셉 성인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습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평범하고도 단란한 결혼 생활은
하느님의 초대로 인해 일찌감치 물 건너갔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닭 쫓던 개처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희망이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성가정을 위한 봉사와 헌신, 침묵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요셉 처지였다면, 입만 열면 불평불만에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묵했습니다.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흔쾌히 순응하며,
그렇게 순탄치 않은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덕행은 순례자로서의 충실함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성조 아브라함의 신앙을 느낍니다.
일어나라니 즉시 일어났습니다. 떠나라니 군말 없이 떠났습니다.
요셉 성인은 부단히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언제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 속같은 여정이었지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그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의리와 믿음의 요셉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주님 이전에 의로움의 기준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마리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율법에 따라 파혼하고 그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파혼했는데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면,
마리아는 불륜을 저지른 여인이 되잖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요셉의 다른 의로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의로움에는 율법의 의로움도 있지만
마리아에 대한 의리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의리는 율법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로움입니다.
의리 있는 사람은 덕이 있어 어려움 중의 사람을 쉽게 저버리거나,
잘못을 저질렀어도 크게 분노하거나 쉽게 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약혼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애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요셉은 분노가 의리를 덮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칭송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신앙이고 그의 순종이지요.
오늘의 전례는 요셉을 아브라함과 비교합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었고,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를 천사로 믿었고,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도 믿었으며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은 것은 마리아나 요셉이 같았고,
이런 믿음의 바탕 위에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이집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이런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이집트로 떠나라는 명령에 순명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 명령에 대한 순명보다 앞서는 순명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이건 꿈일 뿐이야!’ 하며 명령을 걷어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고 그 명령에 순명했습니다.
이런 요셉을 보면서
현몽을 한낱 개꿈으로 바꾸는 나는 아닌지
계시의 은총을 인간적으로 날려버리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18-23)
1)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는
요셉이 ‘율법의 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을 먼저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는 말씀을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여기서 ‘남 모르게’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남모르게, 즉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을 했다면,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파혼한 사실을 모르니까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도 아기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믿었기 때문에,
아기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파혼을 생각한 것인데,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지키려면
그 모든 일을 사람들 모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3)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 잉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가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을 알렸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4)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과연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가운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는 말은,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려던 대로 결혼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말은,
‘성령 잉태’에 관해서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아의 부모로 선택되었음을,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말입니다.
5) 겉으로 보이는 표현들만 보고서,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율법을 방패로 삼아서,
율법 뒤로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지켰고,
온갖 어려움들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원래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요셉 성인에게 만들어 준 명함
박상대 마르코 신부
한참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가
오늘 하루만큼은 사순시기를 중단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요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크게 경축한다.
요셉 성인에 관한 성서상의 기록은 복음서의 前史에 속하는
마태오복음 1-2장, 루카복음 1-2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보도된 내용이 전부이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마태 1,16)이었으나,
다윗의 고을인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루카 2,4)으로 추정된다.
이곳 나자렛에서 목수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으로 이미 世間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그녀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 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 대왕의 무죄한 영아 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야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나자렛으로 와서 살았다.
요셉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잃어버렸다가
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여기까지가 前史가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후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이고 목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고향 방문 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다.(마태 13,55; 마르 6,3; 루카 4,22)
기원후 2세기경에 예수의 형제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편집한,
그러나 僞經에 해당하는 《야고보 복음서》에는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요아킴,
그리고 예수의 소위 ‘잃어버린 시절’(12-13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야고보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할 때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어 슬하에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
자식들을 둔 것으로(마태 13,55) 전해진다.
야고보 복음서의 이러한 내용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일련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당시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천주의 모친성,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잉태, 예수의 神性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야고보복음은 어디까지나 僞經에 속하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正經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원래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고,
그림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내리는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으며,
보여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것이 요셉의 법칙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 예고부터 12살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그 어는 부분에도 요셉 스스로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요셉은 그저 침묵으로 등장하며, 그저 마음먹는 것뿐이다.
성서 저자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카의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상 말하지 못하는 요셉의 답답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자의 마음은 크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은 때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없는 요셉에게 사람들은 名銜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명함을 나는 보았다. 명함에 나타난 직함은 이렇다.
임종자의 수호자‘, ’노동자의 수호자‘, ’가정의 수호자‘,
게다가 비오 9세는 1870년 ’교회의 수호자‘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분의 배필 성 요셉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정했다.
말로써 주장을 펴지도 못하는 요셉이 왜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직이 신앙의 유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줄곧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수많은 사상적 침입으로부터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교권은 신앙을 수호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논쟁을 벌이고 이단자를 파문하고, 심지어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람까지 죽였다.
요셉이 바로 이런 교회의 수호자라 말인가?
아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저 ’수호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마리아는 요셉이 모르는 사이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요셉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마음을 고쳐먹는다.
결국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잣대로 파혼을 결심하지만,
금방 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의 결론은 받아들임이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요셉을 교회, 노동자, 임종자, 가정의 수호자로
칭송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수호할 수 있는 은총을
요셉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