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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장 7월 22일
낭산(朗山), 몽고우위(蒙古右衛).
새벽.
섬서성(陝西省) 영하(寧夏)의 서북쪽을 감싸고 달리는 낭산
(朗山)의 한 기슭에 고개를 드러낸 웅장한 성벽 위로 태양이 떠
오르고 있었다.
뒤로는 칼날 갈은 능선과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릴 것 같
은 험준한 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한 줄기 긴 협로
가 눈아래 펼쳐져 있다. 그 협로가 끝나는 곳에서 광활한 몽고
의 대초원이 시작되는 것을 굽어보는 지점, 이른바 일인(一人)
으로 만인(萬人)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은 국경의 관
문이었다.
바로 이곳 섬서성에 자리잡은 여섯 개의 군영(軍營) 중 하나
로 명나라 몽고 경계의 최선봉인 몽고우위(蒙古右衛)의 雄자(雄
姿)였다.
새벽이 밝아 오는 중원의 북쪽 끝, 낭산 기슭 외로운 군영(軍
營)을 내려다보며 백리극은 서 있었다.
태양이 중천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질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
지 않았다.
군영의 새벽은 소란스러웠다.
긴 밤을 지새웠던 경계병이 교대되고, 여기저기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각부대별로 인원과 건강을 점검하는 등, 분
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몽고우위는 평소의 몇 십 배는 북적거리고 있었
다. 군영에 주둔하는 병력이 평소의 몇 십 배로 늘어 있었기 때
문이었다.
작년에 벤야시리가 타타르를 통일한 후, 최근까지 국경의 사
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몽고군의 동향은 명나라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였
다. 그런 차에 한 사람의 지배 아래로 몽고군이 모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명의 조정은 사자를 보내었다. 지금까지처럼 허용된 범
위 안에서 조공무역을 유지하면 벤야시리를 인정해 주겠다는 뜻
을 전한 것이다.
벤야시리의 대답은 사자 일행의 목으로 돌아왔다. 몇 십 년
만에 이룬 타타르 통일의 위업으로 인해 벤야시리의 간은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가 정벌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혹은 정벌한
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사
실은 명나라가 가만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먼저 침공할 뜻
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른 때의, 다른 황제였다면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상 몽고 지역으로 정벌군을 보낸 것은 한무제(漢武
帝)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의 전성기였고, 황제는 야심만만한 영락제였
다. 게다가 영락제는 궁궐에서 태어나 보호 속에서 자갈 연약한
왕족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인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까지 싸움터에서 태어나
자랐고, 그 자신 황제가 되기 전에는 몽고쪽의 변경 방위를 맡
고 있었던 군사 지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반응은 성급해 보일 정도로 신속하고, 과감한 것이었다.
사자의 최후를 전해 듣자마자 후군도독 구복을 대장군(大將軍)
으로 삼아 십만병력(十萬兵力)을 지휘해 타타르를 정벌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조카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그로서는 백성들에게 위엄을 떨쳐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는 이것이었다.
영락제는 주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최단시간 내에 타타르로
줄병해서 벤야시리의 목을 들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후군도독부 관할하의 송번위, 부군위,
강음위(江陰衛), 몽고좌우위(蒙古左右衛), 부군후위(府軍後衛),
응양위(鷹揚衛), 흥무위(興武衛), 횡해위(橫海衛)에서 차출된
정예병 십만이 지금 몽고우위와 그 주변에 북적거리고 있는 것
이었다.
새벽, 새날을 시작하는 준비로 소란스러운 몽고우위의 바깥
픗경과는 반대로 지금 내성(內城) 깊은 곳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복도 과거에는 전장을 질타하며 천군을 호령하던 호탕스럽
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요즈음이야말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야 했다.
평생의 꿈이었던 대장군이 되어 휘하에 십만 군을 이끌고 호
호탕탕(浩浩蕩蕩) 원정길을 떠날 신분이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그의 동공은 공포로 인해 확대되어 있었고, 벌거
벗은 몸은 사시나무 떨 둣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자객을 보내었으니 직
접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살아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가 들고 온 것이……!
확대된 동공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잘려진 목에서 흘렸을
피도 이제는 시커멓게 굳어 버린 채 지저분하게 달고 있는 두
개의 머리가 지금 구복의 앞에 뒹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신 사람, 백리극이 애첩과 자고 있는 그를 침상
에서 끌어내어 보억 준 물건이었다.
백리극이 나직하게 묻고 있었다.
"누군 줄 알겠지?"
그의 음성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다. 경
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심지어 직급상으로도 위였던 구복을
위축시킬 정도의 힘이…….
지금도 그랬다. 구복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후군참모(後軍參謀)와 연락관(連絡官)……!"
백리극이 들고 온 두 개의 목은 구복의 심복이라고 할 후군도
독부의 후군참모와 연락관의 것이었다.
"왜 죽은 줄 아나?"
구복은 고개를 저었다.
백리극은 구복을 가리켰다.
"당신 때문이다."
"왜 나 때문이라고……?"
"수하의 잘못은 지휘관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몽고족
과 내통했다는 걸 알고 있나?"
"그런……!"
구복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말할 수도 없었을 것
이다."
백리극은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신과 도
귀가 두루마리 두 개를 그 손에 얹었다.
백리극은 그 두루마리를 구복의 앞에 던졌다.
"자술서(自述書)다. 그 안에 몽고족과 내통한 전말이 기록되
어 있다. 이걸 안찰사(按察使)에게 넘기면 어떻게 될까?"
구복의 안색이 다시 질렸다,
후군참모와 연락관은 높은 직위는 아니지만 후군도독부로 볼
때 그리 낮은 직위도 아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군무가 그들의
손을 통해 움직여졌던 것이다.
그들와 반역 사실을 구복이 모르고 있었다고 한들 변명이 될
리가 없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구복의 인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이 중도에 정지되고 그는 끝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백리 장군, 나는……."
"장군이라 부르지 마라. 나는 장군이 아니다. 네가 더 잘 알
고 있지 않은가?"
백리극의 눈가에 노기가 스치는 것을 구복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백리형, 나는 정말 몰랐소. 그들이 내 눈을 속이고 그런 대
역무도한 짓을 할 줄이야……."
백리극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복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이 순간을 모면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백리극의 손 아래에서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때는 어떤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증거는 없애면 되고 백리극은 죽여 버
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한번 대역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하
는 것이 이 시대의 법인 것이다.
'그 일만 들키지 않으면…….'
그 일만 들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능했다.
백리극을 몰락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그였
고, 백리극의 가문을 적몰시키고 재산을 갈취한 것이 또한 그였
고, 결정적으로 백리극의 아내와 딸을 강제로 첩으로 취해 아내
는 자결하게 만들고 딸은 아직도 애첩으로 희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일을 모르게만 한다면 말이다."
"다른 일이지만……."
백리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복은 불길한 예감이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왜 나를 죽이려 했나?"
구복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듯 엎드렸다. 최악의 순간이었
다. 그것만은 모르기를 빌었는데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극은 다시 물었다.
"나와 내 가문을 그렇게 몰락시켜야 할 그런 이유가 어디 있
었나?"
"죽여 주시오!"
구복은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백리극 같은 사내에게는 변명이라는 것은 구차할 뿐이며
오히려 더욱 자극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쿵!
구복의 머리 옆에 유성검의 검극이 꽂혔다. 구복은 두려운 눈
으로 그 거무튀튀한 검신을 바라보았다.
백리극이 말했다.
"그럴 생각으로 왔지. 그러나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말하라 왜
나를 죽이려 했나?"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구복도 두고두고 생각해 본 문제였다. 왜 백리극을 그
토록 미워했을까?
이유를 대자면 무수히 많은 이유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이유가 되
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는 왜 백리극을 미워했던 것일까?
구복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미웠소."
"……?"
"당신의 재능과 당신의 출세와 당신의 배경……, 그 모든 것
이 미웠소. 그뿐이오."
구복은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리극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구복은 가장 적절한 대답을 한 것인지도 몰랐다. 도대체 사람
을 미워하는 데에는, 그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데에는 별다
른 이유란 없는 것이다. 그저 미울 뿐.
백리극은 눈을 감고 있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가 그런
꼴을 당해야만 했던가! 단지 밉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문득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고 재주가 뛰어나면 미
움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이었던가?'
아마도 그의 스승들 중에 누군가가 그의 재능을 염려해서 한
말이었던 것 갈았다.
결국 그 말대로 되지 않았는가.
백리극은 다시 물었다.
"내 딸은?"
그의 처 운지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나
마 여기 와서 들은 이야기였다. 후군참모와 연락관이 실토한 것
은 몽고족과의 내통 관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딸 설아는?
"내 딸 설아는 어디 있지?"
구복이 두려운 라으로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침상이 있고 침상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다. 그 비단 이불
로 몸을 가리고 웅크리고 앉은 여인.
밤새 시달린 탓인지 눈자위에는 검은 그늘이 져 있고 머리는
잔뜩 엉클어져 열여섯 살 소녀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여인.
백리극의 눈이 치켜 뜨여졌다.
"설…… 아……?"
구복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백리극이 여인에게 물었타.
"이름은?"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앞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 내용
도 또한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말을 않고 있었다.
단지 큰 눈에 원망의 빛을 가득 담고서 백리극을 노려보고 있
을 뿐이었다.
백리극이 다시 물었다.
"설아냐?"
"알아서 뭐 하실 건가요."
여인은 처음으로 대답했다.
"제가 누구든 알아서 뭘 하실 거냐구요."
백리극은 말문이 막혔다.
"어머니와 내가 어떻게 되든 궁금해 하지도 않던 분이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오신 거죠?"
여인의 목소리는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그 말속에 담은 내용
과 정반대로 잔잔한 목소리. 그 목소리 뒤에 깔려 있는 진한 원
망이 백리극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백리극은 유성검을 들어올렸다. 다른 모든 것은 용서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구복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반항할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반항
할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대명 군부 최고
의 고수인 백리극에게 반항할 수 있단 말인가?
백리극의 검이 구복의 목 위로 들려졌다. 내려치기만 하면,
단칼에 저 목을 베어 버리기만 하면…… 모든 원한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이때 여인, 설아가 말했다.
"그만두세요."
백리극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그만두라구요."
"이자는 네 아버지인 나를 모해하고 네 어머니를 유린해 죽게
했으며 너 또한 유린한 자다. 그런데 뭐라고?"
설아는 웃었다. 백리극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 모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가족
을 버려 두고 잘난 나라에 충성한다고 했던 당신. 그러다가 버
려지고 나니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건가
요? 그냥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내버려두고 가세요. 전 이
생활에 만족해요."
백리극의 눈이 찢어질 둣 커졌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
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신 도귀가 앞으로 나섰다.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입술의 모양으로 의미를 짐작하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도신이 칼을 들어 설아를 가리켰다. 자신이 대신 죽여 주겠다
고 나선 것이다. 도귀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원수요, 가문의 원수인 구복을 감싸고 도는 듯한 설
아의 말이 그들을 격동시킨 것이다.
백리극은 그들과 설아 를 보고 유성검 아래 목을 늘어뜨린 구
복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격동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유성검이 같이 떨렸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그리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이 뒤죽박죽
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흘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유성검을 치켜들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구복을 죽이면 일은 해결된다.
그때 그의 눈 속으로 벽에 걸린 부월(斧鉞)이 들어왔다. 붉은
수실을 단 금도끼 한 쌍.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또 어디
서 생긴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그것을 갖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던 때가 있었으니까.
황제의 명을 받아 원정을 떠나는 장수에게 내려지는 신물인 것
이다. 그것을 보면 곧 황제가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신물.
백리극의 손을 떨렸다. 그리고 유성검이 바닥에 꽂혔다. 그는
구복을 죽일 수 없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모르지만, 지금 구복을 죽일 수
는 없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구복을 죽이면 그는 정말 반역자
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여태 최고의 가치로 여겨 오던 것
을 스스로 허무는 행위요, 그것은 또한 여태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 전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할 수는 있어도, 알면서 불충을 저지를 수
는 없었다.
백리극은 검을 다시 꽂으며 말했다.
"네 잘잘못은 하늘이 대신 판결해 주리라."
그는 돌아섰다. 도신 도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해결하지 않은 일이 많지 않은가?
백리극은 문을 나서고 있었다. 도신 도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칼을 거두고 그 뒤를 따랐다.
새벽이 밝아 오는 중원의 북쪽 끝, 낭산 기슭 외로운 군영(軍
營)을 내려다보며 그는 서 있었다.
태양이 중천으로 떠을랐다가 다시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그리고 영원처럼 느껴질 긴 시간 동안…… 그는 그대로 서서 움
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아침이 밝아 오자 그는 돌아섰다.
"양주로 돌아가자.
도신 도귀가 그의 뒤를 따랐다.
* * *
장강.
사공은 웃었다.
'이게 어떤 배라고 감히……!'
설마 장강수로십팔타의 배를 털려고 하는 도적이 있을 줄은 몰
랐다. 그야말로 강물이 용왕묘(龍王廟)를 침범한 격이 아닌가!
처음 그 배가 앞을 가로막았을 때는 총타에서 급히 보낸 연락
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저놈 배 모는 것 좀 보게! 건방지게 누구 배를 가로
막아? 손 좀 봐 줘야겠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강수로십팔타의 사공 중에 감히 그의 배를 가로막아 세울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흑의에 복면을 뒤집어쓴 놈들이 줄줄이 건
너오더니 사람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는 화가 치밀었다.
손님이 탄 배가 이런 꼴을 당하면 장강수로십팔타는 장강의 기
강을 이렇게밖에 못 잡았는가, 라고 비웃을 것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그는 백미어옹 하호가 아니라 손님, 그것도 갸날픈 데
다가 키까지 커서 금방이라도 꺾어질 것 같은 여인이 나서는 것
을 보고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일은 당연히 장강수로십팔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일
이지, 손님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사공은 복면인들이 보통 도적들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
었다.
월몽영은 채찍을 반으로 꺾어 들고 적의 복면 여인, 팔한지옥
의 제사옥주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서 많이 본 복장인데, 내가 아는 곳에서 온 사람이라고
보아도 될까?"
사옥주도 놀란 모양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월몽영을 만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놀라는 낌새를 월몽영은 재빠르게 간취했다.
"날 아는 모양이군! 그것으로 알았다. 지옥성!"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는 대선룡과 함께 나갔다. 지옥성에서
나온 자들임을 아는 순간, 그녀는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취리릭!
검은 채찍, 대선룡이 허공을 가르며 사옥주의 목으로 날아들
었다.
사옥주는 뱀처럼 꾸불거리며 날아드는 대선룡의 기세에 놀라
급히 철퇴를 들어 막아 갔다.
촨!
채찍은 철퇴의 목에 감겼다. 두 여인은 서로 자신을 향해 무
기를 끌어당겼다.
채쩍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옥주의 머릿속으포 주변 상황이 번개처럽 흘러갔다.
그들이 주격하던 소년의 흔적이 이 배를 향해 이어지고 있다
는 것만으로 습격을 결정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것
같았다.
배에 오르자마자 그들에게 보여진 반응이 비웃음이었다는 것
이 그 예감의 원인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사공에게서마저도 일
반적인 수적을 만났을 때의 공포라든가 하는 감정들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힘겨루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이 배에 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은 속전속결로 끝을 맺어야 했다.
사옥주는 순간, 월몽영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 잔뜩 팽팽하게
당겨진 채찍이 힘을 잃고 구부러지고, 월몽영의 모습이 극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찰나였다.
하앗!
한소리 폭갈과 함께 사옥주의 발이 월몽영의 목덜미를 찍어
갔다.
월몽영은 사옥주의 발이 채찍을 따라 쏘아져 오자 입가에 냉
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의 월몽영은 지옥성을 나오던 그날의 그녀와는 달랐
다……. 고통과 시련이 그녀 또한 강해지게 했던 것이다.
강하기만 했던 그때의 월몽영은 더 이상 없었다.
사옥주와 월몽영의 사이에서 채찍은 원을 그렸다. 풀어진 그
만큼의 여유가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원 사이로 사옥주의 발이 송곳처럼 꽂혀 들어왔다.
사실은 사옥주의 발을 채찍의 방향을 틀어 감아 버리고 있다
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산지 못하던 현녀십구대의 포쇄결이
발휘된 것이다.
촨!
채찍이 올가미처럼 사옥주의 발을 얽어 매어 버렸다.
월몽영은 사옥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왼손에는 용의
이빨, 채찍 손잡이에서 뽑혀져 나온 비수인 소용아가 새하얀 광
망을 뿌리고 있었다.
사옥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지나치게 가볍게 생각한
탓일까?
이렇게 간단하게 얽어 매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발이 얽어 매어져 동작의
자유를 잃은 그녀의 앞으로 월몽영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새하얀 이빨과도 갈은 비수의 광망도 그렇
게 바짝 다가왔다.
목표는 저기 있었다.
그가 뒤에서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뒤돌아 서 있었다.
배의 이물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고, 목표가 된 소년을
포함한 모두들 그 싸움에 참가하거나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
었다.
그는 싸움 구경을 않는 자는 이 배 위에 단 하나도 없을 것이
라고 확신했다. 장강수로십팔타에 속한 배로, 위로 선장부터 아
래로는 사공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무공을 할 줄 아는 자들이
니 싸움 구경을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아니, 사태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
싸움은 강호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여인 둘의 혈투였고, 의외
로 긴박하고 화끈해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만 해도 다른 것, 사정 천인혈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
잡고 있지 않았다면 구경을 하고 싶었을 정도였다.
며칠 전부터 소년과 함께 행동하던 청년도 분명 그럴 것이었다.
이제 거리는 일 장 안쪽으로 좁혀져 있었다.
스윽!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피는 충분히 튀었다.
사옥주는 분수처럼 피를 흘리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채찍
에는 그녀의 다리 한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월몽영이 의외라는 빛으로 사옥주를 응시했다.
애초에 그녀가 노렸던 것은 다리 한쪽 같은 시시한 물건이 아
니라 생명이었다.
그러나 소용아의 새하얀 이빨이 사옥주의 목을 그으려 할 찰
나에 상대는 몸을 급속도로 돌려 다리 하나를 희생시키고 채찍
으로부터 풀려났던 것이다. 대단히 신속한 반응이 아니면, 그보
다 어지간히 잔혹한 심성이 아니면 그런 행동은 할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그래서 월몽영은 적이지만 그녀를 칭찬해 주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쳐라!"
사옥주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른 복면인 중 하나가 손을 젓자 삼
사십 명쯤 되어 보이는 적들이 한꺼번에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의 뒤에서도 그들을 맞아 나아가는 몇 개의 그림자가 있
었다. 제일 앞의 검은 그림자는 혈문룡일 것이다. 이런 자리에
는 가장 나서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쳐! 역시 그놈들이란 말이지?"
혈문룡은 씹고 있던 입 속의 물건, 육포를 뱉어 버렸다.
그의 앞으로 몇십 명의 복면인들이 달려들고, 그의 칼에 베어
져 쓰러지고 있었다. 이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지
옥성의 지하로 침입해 들어갈 때도 그들은 그렇게 달려들었었
다. 또 그렇게 쓰러져 갔었다.
"좋아!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어야지!"
그는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가장 통쾌한 싸움을 하는 것 같다
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반룡도를 휘둘렀다. 자욱한 피바람이
그를 중심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무언가 가슴 한가운데에 막혀 있던 체증이 뚫리는 듯한 기분
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들의 진정한 적은 중원의 소소한 무리들이 아니었다. 바로
이들, 지옥성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세력을 확대하고, 더 넓은 지역을
집어삼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따위의 일, 더 많은 이득
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
장강병탄 따위는 심심풀이 장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이다.
그들이 진정 하고 싶어했던 일은 바로 지금처럼 지옥성의 무
리들과 싸우는 것,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하나까지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혈문룡은 피바람 속에서 비로소 웃고 있었다.
이제 거리는 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싸움은 예정된 수순(手順)처럼 확대되었고, 이런 북새통에 그
가 무엇을 하든 주목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싸움은 항상 피를 끓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 피가 끓으면 주
위 상황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돌아서서 싸움 구경에 넋을 잃은 소년에게는 이제 손만 내밀
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구자는 한 순간 심장이 격렬히 뛰며 귀에서 큰 소리가 울리
는 것 같았다.
전신경이 그의 귓가로 집중되었다.
스윽--자박!
발자국 소리!
그는 화영을 향해 소리쳤다.
"그예요!"
화영이 검의 손잡이에 손을 대며 뒤돌아서고 있었다.
운학은 청허진인 멓 사형들과 함께 싸움터로 변해 버린 이물
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강호에 나와
서 보는 두번째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백리극과 장강수로십팔타의 싸움에는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
었다. 그것은 한 영웅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도외시하
고 싸우는 비장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구경하는 싸움에는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잔인하고, 흉흉한 살기만이 횡행할 따름이었다. 특히 저
두 사람, 용이 조각된 칼을 쓰는 청년과 짧고 뭉툭한 칼을 쓰는
노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살기의 집약체 정도로 보였다.
혈문룡과 원도살을 그는 몰랐지만 그 솜씨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무공에는 살기만 있지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때, 그는 그것을 보았다.
엉뚱하게도 싸움터가 아니라 구경꾼들 틈에서였다.
한 사공이 그쪽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가 거기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전혀
주의를 끌 만한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구경꾼들
틈에 또 하나가 끼여드는 것이 무슨 주목을 받을 일이던가!
그때 소년이 외쳤고, 그 옆에 서 있던 화의청년이 돌아섰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었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갈라진 것 같은 한 순간이었다.
사공으로 변장한 금관의 복면인은 소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
지만 끝끝내 닿지 않았다.
사정 천인혈은 그렇게 그의 손에는 닿지 않는 요물이었는지도
몰랐다.
내밀어진 손이 팔목으로부터 잘려져 나갔다. 손목이 그의 눈앞
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그가 선뚱 이해하기에는 힘든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그의 머리도 손목과 같이 허공으로 떠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무림사사 중의 또 다른 일 인인 환마 서문정은 그렇게 죽
었다.
화영은 검을 뽑은 흔적도 남기지 띤았다.
단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뒤로 돌아섰고, 마술처럼 서문정
의 팔목과 목이 끊어져 나가는 순간에는 이미 검에서 손을 떼고
소구자의 어깨를 만졌다.
"이 사람이었나? 그가 적의가 있다는 것은 아까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소구자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
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운학의 눈도 소구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저게 뭔가……?"
그것은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경지였다. 당연히 본 적도
없었다.
검기? 검강? 어검술?
그 어떤 용어로도 방금 본 그것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것
들과는 유(類)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초식의 화려한 변화? 정교한 움직임?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
도로 빠른 칼놀림?
비슷해 보였지만 이것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더 있었다.
초식이 없는 변화와 빠르기에 연연하지 않는 빠름이라고나
할까?
운학은 옆에 선 사숙과 사형들을 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피가
튀는 싸움터에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분명 그들의 눈에
도 그 모습은 비주어졌을 것인데 그것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단
말인가?
그 검의 새로운 경지에 충격을 받지 않았단 말인가?
문득 그는 또 하나의 모습을 보았다.
반바지와 허름한 상의만 걸친 사내의 모습이었다.
츈! 츈!
그에게는 이 검(二劍)은 필요없었다.
좌검자에게는 정말 그런 것은 필요없었다. 단 일 점에 적이
죽지 않으면 그가 죽는 것이다.
그가 배운 것은, 그리고 극에 달하도록 연마해 가고 있는 것
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번째 검이 필요없는 필살검(必殺劍)!
바로 그것이었다.
츈! 츈!
그의 앞에 쓰러지는 복면인들은 모두 정확하게 요혈이 베어져
있었다. 또 다른 한 칼이 더해질 필요가 없이 단 일 검에 절명
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좌검자는 그렇게 적들의 틈으로 걸어 들어가며 짧게 짧게 일
검씩을 안겨 살아 있는 적들의 수를 줄이고 있었다.
묘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싸움의 흥분이나 사람을 죽이며 자연
스럽게 떠올리는 살기와 갈은 것이 전혀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우울한 얼굴로 산책하둣 걷고 있는 것
이다. 그의 주변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게 쌓이는데……!
"너……, 넌 누구냐?"
건장한 복면인 하나가 그의 앞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
다. 다른 복면인들과는 복장이 약간 달랐고, 가슴에는 삼(三)
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래의 획이 짧고, 가장 위의 획은 가장 길어서 삼 자는 삼
자인데 거꾸로 선 삼 자였다.
좌검자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싸움터에 마주 선 이상, 죽거나 죽이면 되는 것이지 무슨 말
들이 그렇게 많을까?'
건장한 복면인, 사옥주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지옥성 팔한지
옥의 제삼옥주는 좌검자가 대답도 없이 다가오기만 하자 주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언뜻 보기에는 좌검자에게 두려움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그러
모습을 보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치밀한 계산을 한 동작이었다.
뒤로 물러서던 삼옥주가 그보다 몇 배나 빠르게 앞으로 되튀
어나왔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한광(寒光)이 격사되었다. 소맷자
락 속에 넣어 두었다가 발출하는 비수였다.
뒤로 물러서는 것은 단지 상대의 신경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이가 승패
를 결정하기도 한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좌검자에게는
그의 모든 속임수와 심계(心界)들이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삼옥주가 그렇게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나서며 비
수를 날리지 않고 그냥 비수를 꺼내 던졌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이다. 그의 발걸음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는 그였으니
말이다.
그는 단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수의 날카로운 끝만을 주
시하고 있었다. 한 순간, 그의 몸이 낮아졌다가 삼옥주의 옆으
로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삼옥주는 그대로 목과 몸이 분리되어 쓰러졌다.
팡!
공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실제로 공 같은 물체가 배로
날아들어왔다.
검게 뭉쳐진 공 같은 물체, 맹룡이었다.
한 복면인익 목을 채찍으로 감아 당기고 있던 월몽영이 간발
의 차로 그 공의 진로에서 비켜났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허
공으로 쏠려 날릴 정도로 세찬 기세였는데 다행히 피한 것이다.
원도살의 짧은 도가 내밀어졌다.
그러나 혈문룡이 먼저였다. 그는 반룡도를 옆으로 비껴 세우
고 날아드는 맹룡의 기세를 맞아 갔다.
패앵--! 카카칵!
혈문룡의 발이 바닥에 대어진 채 뒤로 주루룩 밀렸다. 손아귀
에서 끝가 흘렀다. 어느새 호구가 찢겨진 것이다.
공중에 뜬 채로 혈문룡을 밀어붙이던 맹룡이 뒤로 되튕겨 나
갔다.
약간의 손해는 보았지만 과거 황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지
옥삼룡 중 일 인을 튕겨 보낸 혈문룡이었다.
그러나 두번째는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뒤로 튕겨
갔던 맹룡이 허공에서 자세를 가다듬는 둣하더니 다시 공처럼
뭉쳐지며 방금의 두 배는 세찬 기세로 회전하며 날아든 것이다
혈문룡이 반룡도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죽든 살든 정면으로 맞서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준비는 필요가 없었다. 맹렬한 회전을 하며
날아드는 맹룡의 앞에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처럼 야광충이 나타
나 한 손으로 간단하게 쳐내어 버렸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야광충이 태양 아래 나타난 것이다.
맹룡은 이번에는 피와 살점들이 가득한 갑판을 굴러 뱃전을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뱃전을 한 손으로 잡고 회전
하며 다시 나타났다.
"너, 야광충!"
그의 입에서 한소리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피가 튀
었다. 야광충의 일격에 내장이 진탕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그젓만으로는 포기하지 않았다.
패앵--!
한 줄기 검은 선이 야광충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었다.
그러나 야광충에게는 그것보다는 햇살이 더 위협적이고 신경
이 쓰이는 대상인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렸
다. 동시에 다른 한 손이 맹룡을 향해 뻗었다.
취리리릿!
오색의 보광이 번뜩였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인명권이 귀가 아플 정도로 예리한
음향을 내며 맹룡의 몸을 휘감았다.
야광충은 전륜나의 원리에 따라 몸을 회전시키며 인명권을 떨
쳤다.
위이이이잉--!
맹룡은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자신이 원해서 하는 회전이 아니었다. 야
광충의 인명권이 마치 팽이에 가해지는 채찍처럼 그를 돌려 버
린 것이다. 그것도 금강석으로 몸을 긁어 찢어발기면서 한 행위
였다.
쿵!
맹룡이 갑판에 떨어져 뒹굴었다. 인명권이 야광충의 손 안으
로 다시 돌아왔다.
"이, 익……!"
맹룡이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헛된 시도였다, 그
의 하나밖에 안 남은 팔은 인명권에 반이나 뜯겨져 아무런 힘도
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야광충이 그를 살려 두고 무언가 물어 보려 하지 않았
다면 뜯겨져 나가는 것은 팔이 아니라 목이었을 것이다.
"커억!"
맹룡의 입으로 검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자신이 쏟은 피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둣 고개를 들고 야광충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네가 의기양양하지만…… 양양에 돌아가도 그럴지 두
고 볼까?"
그 말에 숨은 조소가 야광충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는 차갑게
물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맹룡은 묘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그렇게 믿고 있던 황룡도 지금은……!"
그는 말을 멈추고 빙글빙글 웃었다. 온통 피로 범벅이 된 그
의 얼굴은 흉신악살(兇神惡煞)과 홉사했다.
"직접 가서 보려무나!"
야광충은 그를 향해 한걸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숨막힐 둣
한 살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고통을 자초하는군!"
맹룡의 얼굴은 점점 검게 죽어 가고 있엇다. 피로 물든 검은
얼굴에 묘한 빛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야광충은 주시하고 있었다.
맹룡이 말했다.
"내게 고통을 준다고? 네겐 그럴 시간도 없을 것……!"
야광충의 눈에 이색이 스쳤다. 순간적으로 맹룡이 위험한 일
을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위험해, 모두 숙여!"
취리리릿!
폭갈과 함께 그의 손에서 인명권이 다시 날았다. 인명권은 맹
룡의 목을 휘감고 허공으로 날았다. 맹룡의 몸이 그 움직임을
따라 배 밖으로 날려갔다.
순간, 그의 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그의 피와 살점이 파편으로 화해 사방으로 쏘아져 갔다. 강물
에 높은 파도가 일고, 배가 기우뚱거렸다.
한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맹룡이
었다고 생각할 만한 흔적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취리릿!
그제서야 인명권이 야광충의 손으로 돌아왔다.
싸움은 이제 끝났다.
그들의 배로 건너왔던 복면인들 중 살아 남은 자들은 몇몇 되
지 않았고, 그나마 모두 죽어 가고 있었다.
원도살이 겸연쩍게 중얼거렸다.
"손속이 매웠나 보군!"
살려 두고 정보를 캐내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물어 봤자 캐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지옥성에서도
그가 하는 일을 알고 있은 자는 거의 없었어. 아니, 아무도 없
었을 것이다. 옥주 정도가 아니면……!"
"그 여자!"
월몽영이 그때 경호성을 질렀다.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다리가 잘려 뒹굴던 사옥주였다…….
그녀는 이미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이 손을 저었다.
"됐다. 일부러 보내 주었으니까!"
"일부러?"
"등평!"
월몽영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다물어 버렸다.
등평이라면 눈치채지 않게 그녀를 추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야광충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선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태양은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은
그였다.
그때, 무당파의 도사들이 다가왔다.
* * *
강서성, 남창부(南昌府).
가괴자는 여전히 콧수염을 꼬면서 묻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배를 타면 양주는 나흘이면 갑니다. 강안(江岸)의 풍
광이나 구경하시면서 가시면 위풍도 날리면서, 여정도 단축되는
이중의 이득이 있으실 것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배는 싫다!"
허탁은 이젠 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례하게
들리는 것도 상관 않고 되물었다.
"왜요?"
"뱃멀미 나거든!"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허탁은 머리를 움켜허고 쥐어뜯었다.
굼벵이도 이런 굼벵이가 있을 수 없었다. 총타를 떠난 것이
언젠데 아직도 강서싱에서 헤매고 있단 말인가!
남창이야 강서 분방이 있는 곳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파양호변(播陽湖邊)을 돌아서 예주부(銳州府)에는 왜 가겠다는
것인가!
예주부 다음에는 휘주(徽州), 정국(亭國), 그 다음에는 남경
(南京)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양주에 도착이다.
'아니 중간에 진강(鎭江)이 또 있지!'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강남에서는 배를 타고 강북에서
말을 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육로로 기어갈 이유가 뭐란 말이냐!
허탁은 머랏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해봤지만 결국은 가괴자가
미쳤다고밖에는 달리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팔월 보름 전에는 도착하겠군!'
허탁은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장강.
장강의 배에서는 새로운 대치 상태가 만들어져 있었다. 운학
과 화영이었다.
화영은 검을 뽑지 않고 단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만 있었
다. 언제나 취하는 그 자세였다.
운학은 이미 검을 뽑아 화영을 겨누고 있었다.
묘한 것은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감돈다는 것이었다. 분명
무당파의 제자면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송문검(松紋劍)에 불과
한데 보검에서나 뿜어지는 그런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청허진인은 놀라움에 가득 차서 운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확하게 말해서 운학의 검과, 그 자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운학의 검에 감도는 그 기운이 무형의 검기가 유형으로
화해 보여지는 것이라는 것과, 그것이 검강을 발출하기 바로 직
전의 상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운학의 자세가 그는 말로만 들어 알
고 있은 자세로 짐작이 된다는 것이었다.
바로 오대검법 중의 하나인 양의문검의 기수식으로 보였던 것
이다.
청허진인 그 자신도 아직 장로가 되지 못해 삼절황과 양의문
에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 꾸고 있는데 나이 어린 운학
이 연성했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운학의 성취보다도 그 연원에 의심을 품고 있은 청허진인이
었다.
운학이 그의 사부인 청운진인에게서 그것을 배웠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자소옥허궁의 궁주로 무당 전체서열상 이십위권에 간신히 드는
그가 어떻게 제자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었을 것인가!
무언가 그가 모르는 내력이 그 안에는 있는 것이다.
운학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비무할 때에도, 아니 전날 백
리극의 위험을 해소시킬 때 잠깐 손을 쓴 것까지 포함해도 이렇
게 긴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소철검과 태청검을 제외한 어떤 검법도 사용하지 말라
는 사부의 엄명까지 거역하고 자기도 모르게 양의문 검법의 기
수식을 취한 그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아는 최고 경지의 검법을 동원해도 긴장
은 감소되지 않고 오히려 가중되고 있었다
물론 적당한 긴장은 그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검을 쥔 손에 가해지는 아픈 듯한 촉감, 귓가를 스치는 바람
의 숨결이 하나하나 느껴지고,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일 듯 다가오는……!
그런 긴장감은 비무에서는 항상 느끼던 것이고, 그것을 기분
좋게 느낄 정도의 경지는 되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분명 그와는 달랐다.
지금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 선 화영은 아무런 기세도 발하고 있지 않은데 마치 태산
처럼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가 두려웠다.
'차라리 아는 척하지 말았어야 옳았을까?'
저런 검공을 가진 자가 아마도 그들이 찾아가는 양주의 그 검
사일 것이라는 예감 같은 추측을 사숙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옳
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운산, 운해, 운영 세 사형들이 삼재검진을 펼쳐 화영을 공
격하다가 간단히 팔에 일 검씩 맞고 쓰러지고, 사숙인 청허진인
이 직졉 나서려 할 때, 그 앞을 막고 자신이 해보겠다고 나서지
않았어야 옳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운학은 전신의 공식을 검에 모았다.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앞으로 세 자나 뻗어 나갔다.
그의 검은 한 순간에 여섯 자가 넘는 장검이 된 듯했다.
"검강!"
청허진인이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발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는 장강수로십팔타의 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안 언덕에 가까운 얕은 곳에 떠 있는 작은 배도 오늘 장강
을 오가는 배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거기 탄 노도사.
남루한 옷차림에 백발은 성성하지만 얼굴은 묘하게도 불그스름
하너 홍안이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노도사가 중얼거렸다.
"멀었구나, 멀었어!"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검광은 번뜩였지만 휘둘러지지 않았고, 세자를 넘게 치솟은
검강도 피를 보지 않았다.
운학의 검은 점점 아래로 숙여지더니 급기야 검을 거두고 말
았다.
그는 화영에게 깊이 포런했다.
"졌습니다."
노도사는 이제 배에서 시선을 거두고 누워 버렸다.
"자신을 알고 남을 알아 물러설 줄 아니 된 녀석이군! 이제아
후계자 하나를 찾은 셈인가?"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미소였다.
작은 배는 강물을 따라 흐르고, 어디선지 시구를 홍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봄빛의 영화로움을 알지 못하고
화의(華衣)의 부드러움을 애써 잊었노라.
검을 새겨 뜻을 짓고
얼음을 마셔 영(靈)을 기르니
아서라, 청준이여.
내 삶은 청천장공(靑天長空)에 걸었노라!
* * *
어둠 속의 대화.
"가괴자가 길을 돌아오는 것 같다고?"
"예!"
"이유는?"
"허탁의 보고로는 그저 변덕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고……!"
"변덕이라고? 너는 그 말을 믿느냐?"
"별로 믿지 않을 이유도 없고 해서……!"
"바보 같은 놈!"
"예?"
"어떤 변덕이든 변덕을 부릴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그 이유
를 찾아봐!"
"……!"
가괴자는 몰라도 일방의 패주라면 난 알고 있지.
"무슨 뜻이신지……?"
"일방의 패주 자리가 무공만 높다고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ㅈㄷㄱ~~~~~~~~~~~~```````````````
즐감하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