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년 진서와 자치통감 등 여러 사료에서 고구려가 공격한 지역으로 서술된 연군 그런데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이 현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위치하냐 아니면 요서 대릉하에 위치했냐 이 두가지 주장으로 엇갈려서 그 위치가 논란중인 모양으로
요서 대릉하 위치론의 주장 근거가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 태조기 399년의 후연의 연군태수 고호가 3000호수를 이끌고
북위에 투항했다는 기록 내용을 인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연군의 요서 위치론의 근거 자료인 위서 태조기의 연군태수 고호의 투항기록은 위서라는 북위측의 주관적
자료에서 나온 성격의 기록이라 객관적인 신뢰성이 완벽하지 못할수도 있고요
북위가 자국 위신을 높이려고 위해 연군태수 고호의 투항을 왜곡 과장해서 서술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런 북위에 유리한 북위중심적 기록만으로 고구려에 공격당한 연군이 요서 대릉하에 위치했다는 근거로 인용하기에 빈약할수밖에 없고 게다가 연군은 모용씨 연나라의 수도로 군림했던 지역이라 후연 시절에 모용보가 화룡으로 도읍을 옮겨도 옛수도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기에 후연의 중요한 대도시가 되었던 지역이라 이 지역이 북위에게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후연에게 중대한 타격이겠지요 게다가 모용씨 왕조 국가의 초대 황제 모용황의 사당이 있던 지역이라 후연에게 비중이 높을수밖에 없는 지역이고
만야 북위측의 기록대로 연군이 북위 수중에 넘어갔다면 후연으로서는 중대한 타격이라 남소성 공격 같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일으키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북위가 동진으로 자국을 위협하는 상황이고 자국의 초대 황제의 무덤이 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지배층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전연시절에 자국이 고구려 미천왕의 유해를 탈취해서 고구려에게 협박 외교를 펼쳐서 저자세로 굴게 만들었듯이
북위가 이걸 가지고 협박하면 후연 지배층이 이를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런데도 후연은 고호의 투항 이후에 연군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보였다는 기록은 없고 진서의 기록에
고구려가 북위에게 넘어간 후연의 연군을 공격해서 100명이나 죽였다는
북위서의 기록 내용과 상반된 내용이 나온 것을 보면
연군태수 고호의 투항 기록이 북위측의 자국중심적 과장 왜곡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라는 것이지요
혹은 연군태수 고호가 사자만 보내는 씩의 형식적인 귀순쇼만 벌이고 실제로는 본국 후연과 북위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는 씩으로 고구려의 공격때까지 연군 지역을 그렇게 이어나갈수가 있는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고호가 투항한다 해도 연군내 대다수 세력들이 수장인 고호의 투항에 따르지 않고
자국 후연편에 서는 것을 고집해서 고호가 홀몸으로 북위에 망명하여 온것을 북위 사가들이
단순 과장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배제 못하지요
진서의 고구려의 후연 연군공격 기록과 비교해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