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내려놓게 하는 책이 어디에 있습니까?(제프리 힐)
세상의 위기와 자신의 위기의 시기에 점점 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탐색할지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제프리 힐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제프리 힐의 사후에 펴낸 시모음집인 길을 알려줄까 하는 생각으로 보려 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만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철학적, 종교적, 예술적 탐구가 이어지는 한 인간의 사랑도 이어지리라 믿고 싶은 마음입니다. 흙이 내뿜는 숨소리를 들으며 태양이 내게 빛을 주는 한 인간의 사랑은 이어진다는 확신이 뒤를 보고 앞을 동시에 보려는 길에 서 있습니다. 수없이 다가온 과거로 인하여 비관론에 빠지곤 하지만 가끔씩 다가온 빛살 덕분에 부드러워지면서 깊이 들어가게 되며 낙관론으로 숨을 들이마십니다. 그동안 자신을 지배했던 자본의 힘과 같이 감정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늘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것이어서 무력감에서 허우적대는 꼴입니다. 하지만 침묵하는 집안에서 자람은 혼돈스러운 사랑을 줄타기하는 모습만큼이나 흔들리지 않는 헌신만이 살길이라고 여기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급변시키는 재앙으로 다가오게 하는 과거의 균열이 지금까지 자신을 버팅기게 했던 충성심마저 무너지게 하진 않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 분노를 내려놓게 하는 책이 없습니까?”라는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게 됩니다.
오랜 전통을 완고하게 고집하려 할 때 그 오랜 전통이 주는 가치는 있는데 그 형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오랜 전통들이 쌓여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랜 전통을 완고하게 부여잡고 살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기에는 고집쟁이들이 모이는 곳으로 교회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싸움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한번 교회에 오면 교회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싸움으로 황폐해진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일 것입니다. 참으로 비현실적인 교회에서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탐욕을 채워 줄 물건들로 가득차 있지만 채워지질 않습니다. 하지만 탐욕을 채워주기에 줄 수 있는 물건이 보이질 않는 교회는 진정으로 살 힘인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그런 교회의 신념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위험에 빠뜨릴 준비가 된 사제가 있는 곳이 성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교회 사제를 “힘을 주어 오르게 하는 자”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탈출이 절망적일지라도 또 앞서서 절망을 하는 사제일지라도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은 희망입니다.
희망과 치유로 살게 하려면 희망이 없게 한 이유와 아프게 한 원인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교회가 치유와 희망을 찾게 해 주는 곳이라면 교회는 희망이 없는 곳에 있어야 하고 아픈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리듬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제프리 힐 시인입니다. “말은 말이 문제를 끌어당기듯이 말을 끌어당기지만 성공하려면 모든 안전장치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안전장치를 하고 말을 하면 설득도 안 되고 쓰레기 박스에 넣을 말 만하게 됩니다. 이를 이미 안 제프리 힐입니다. “위대함은 내가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죽은 자들이다.”고 확신한 제프리 힐 시인이 사랑하는 관계하는 사람만이 나를 살리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무의미하게 보이는 지시를 망설임없이 따름으로써 위기의 시기에 공동체의 명령을 망설임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훈련입니다. 모든 훈련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규율을 형성하고 복종을 하게 합니다. 거대한 제국의 탁월한 사람일수록 겸손한 이유를 이제야 알 듯 합니다. 사제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방식을 버리고 고거의 속물적인 방식을 버리고 천상방식으로 살 사람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힘이다. Our faith is our strength”는 신앙의 푯대가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지주의자 유스티누스의 바룩서”는 제프리 힐의 2016년 죽음 이후에 펴낸 271편의 시모음집으로 시의 본질에 대한 평생의 명상의 요약입니다. 명백한 무력감 속에서 시의 지속적인 기이함에 대한 열정적인 주장을 합니다. 고대에 유스티누스의 영지주의 적인 바룩의 책은 '최악의 이단'으로 확인되었으며, 힐의 시에서 그것을 사용한 것, 연금술에 대한 언급, 이단 신학적 사색, 수학, 음악, 철학의 형식 논리는 예술로서, 그리고 우리의 부적절하고 당혹스러운 시간 파악을 위한 상징으로 냉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운명과 영원이라는 마지막 주제는 힐의 어린 시절, 런던 폭격, 늦은 독일 여행, 브렉시트에 대한 경각심과 분노, 쇠퇴와 죽음이 임박한 감각을 포함하여 자전적인 것에 녹아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피조물이 악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매우 선동적인 특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제프리 힐은 “영지주의자 유스티누스의 바룩서. The book of Baruch by the Gnostic Justin”에서 말합니다. 우리의 세계가 거짓 예언자들의 세계이며, “거의 항상 잘못된 사람들이 존경받고 보상을 받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책은 “운동복을 입은 큰 브리태니아 big-bummed Britannia in her tracksuit”, “브랙시트 투표에 찬성하는 영국 an England of Brexit-voting ”, “썩은 자치구와 호빗의 무당 rotten boroughs and hobbits maudits”와 같은 엉뚱한 나라로 영국을 묘사합니다. 제프리 힐 시인은 영웅은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와 존 러스킨 John Ruskin이며, 둘 다 높은 보수당이지만 오늘날의 보수당은 “폭도이자 과두정치 both rabble and oligarchy”라고 말합니다.
영국 시의 현재 상태는 “반쯤 버려진 핏케언(태평양 의 섬으로 선상반란자 10명이 거주하면서 현재는 47명이 사는 영국령) 또는 버려진 남미 포경기지 semi-derelict Pitcairn or abandoned South American whaling station”의 상태입니다. 뮤직홀 관객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상서로운 장소는 아니지만, “여러 목소리의 푸가 fugue(짧은 선율을 반복적으로 택하는 둔주곡)가 자주 등장하는 독백”을 위한 리어 Lear(배우는)와 같은 장소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침대에 커튼을 칠지 말지 고민할 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하며 반대편 침대에서 죽어가는 남자가 “한 시간 또는 조금 더 지나면 사라질 것”과 같이 나이와 죽음에 정면으로 맞서는 책입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람들의 경건함에 끌린 감정적 사기로 지적할 정도로 거칠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함과 세속, 비젼과 불결의 극이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급진적인 소외상태에 있는 주권적 상상력의 작품이며, 타락하고 불완전한 세상의 손에 더렵혀진 것이 더 좋다고 힐리안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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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바룩서와 유스티아노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기술합니다.
바룩서 Baruch는 고대 그리스어로 되었고 콥트어와 시라아어의 역본이 있고 바벨론치하의 BC6-7세기경(BC597-539)에 활동한 예레미아의 제자이자 동료인 바룩이 바벨론에서 쓴 기록입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예언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하느님의 자비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BC 1세기경에 편집한 책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아의 제자로 예언자의 말씀을 기록하고 그것을 성전에서 읽은 사람입니다(예레 36:4,8). 바룩서는 총 6장으로 마지막 장은 예레미야의 편지로 마지막 절이 제게 다가옵니다. “의로운 사람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결코 수치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바룩 6:72).” 영어성경은 “The righteous person has an advantage over others; he does not own any idols, and they can never make a fool of him.”로 직역하면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합니다. 그는 어떤 우상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들은 결코 그를 바보로 만들 수 없습니다.”가 됩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바벨로의 포로가 되었다는 하느님의 뜻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글이었습니다. 바룩서의 5장에서 “슬픔과 재난의 옷을 버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그러면 너를 영원히 하느님과 같게 하시리라(1-4절).”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전례로 옷을 입고 성령의 관을 쓰면 영원히 하느님과 같이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이 삶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지내는 것인데 그렇게 사는 길은 하느님이 주신 옷을 입는 것이고 하느님이 주신 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방에서 큰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이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후손들이 모여드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기뻐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부모들은 보고자 원합니다. 부모로 살 동안 보호할 수는 있겠지만 죽은 이후로는 하느님이 보호해 줘야만 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보호로 사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주신 옷을 입고 관을 쓴 부모의 역할입니다. 기도에 젖은 신도들이 하느님이 주신 옷을 입고 하느님이 씌어주는 관을 쓰고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빛과 자비와 정의로 이스라엘을 집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바룩 5:9)”는 바벨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느님은 싫어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한 하느님을 멀리했던 자녀들을 흩으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쫒겨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이 계신 집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높은 산과 오랜 언덕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영광 가운데서 굳건하게 들어갈 것입니다(바룩 5:7).” 하느님의 영광을 몸소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집인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 때 바로 자연도 하느님을 화답하는 예로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과 향기로운 나무들도 우거져 이스라엘 온 땅을 뒤덮을 것입니다(바룩 5:8).” 하느님의 뜻을 받들지 못해서 쫒겨났다가 회개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자비를 입어 집으로 안전하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이 이끄는 사람에게 늘 영광스럽게 빛나게 됩니다.
유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시대는 알 수 없지만 5세기경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즐겁게 배울 수 없는 것과 본보기가 될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서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보기를 가르치고 즐겁게 배우게 하는 것이 사제의 역할입니다. 본보기도 없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설교로 신도들을 괴롭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이를 유스티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