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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1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37,3-4.12-13ㄷ.17ㄹ-28
복 음 : 마태 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까닭을 살펴보려면
오늘 복음의 앞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라고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란 성전 정화 사건(21,12-17 참조)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대답 가운데 일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지 묻지만,
그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정말 궁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속으로는 성전을 관리하는 권한은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의 소출은 주인의 것이 분명한데도
자신들이 포도밭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악한 소작인의 모습을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러한 상황이라면
포도밭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답해 보라고 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소작인들을
주저 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악한 소작인들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인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계속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22,1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실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1726년 18세기의 작품으로, 의사 걸리버가 선박 의사로 취직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
날아다니는 섬의 나라 등을 방문하게 되는 기행문 형식의 소실입니다.
저의 경우, 이 책을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걸리버 여행기는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일까요?
사실 원본은 신랄한 성인용 풍자였습니다.
당대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풍자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해 사라졌고,
대신 어린아이도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된 것입니다.
고전화가 이루어졌고, 세계적인 독자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단정 지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다.’, ‘이것밖에 안 된다.’ 식의 한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뜻에만 맞게 살아가려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그렇게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냉담 중인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단정 짓는 자기 생각이 맞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운 사람은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포도밭을 일구시고 이를 소작인들에게 맡기시지요.
이 소작인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들을 나타냅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입니다.
주인이 아들까지 보내지만, 포도밭을 차지할 생각으로 죽여 버립니다.
바로 예언자들을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과 예수님에 대한 배척을 보여줍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의 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못된 모습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보다는 영원한 만족을 추구해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상상도 못 할 그분의 힘 속에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 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울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 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 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 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과는 달리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그러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경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요셉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형제 중에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결국 요셉을 은 20닢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닢에 팔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했지만, 나중에 그 배신이 더 큰 구원의 길이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해 이집트로 팔려 가고,
예수님은 제자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배신의 원인을 보면 비슷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질투받았고,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들보다 더 뛰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실력 좋은 사람이 미움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조직에서 튀면, 그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석하면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결국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요셉과 예수님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요셉과 예수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는 작은 상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데,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용서란 뭘까요? 용서는 약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건 그가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그 아픔을 극복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에서 억울한 일,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요셉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용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더 위대한 길인지, 한번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때로 요셉의 형들처럼 질투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처럼 용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의 삶에서 배신과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공동선을 위해 협력선 하는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창세기 요셉의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이고,
서로 파괴하는 인간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자식들이 형제인 요셉을 버리는데
신약에선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마저 서슴없이 버립니다.
이는 인간이 악하게 되면 못 할 짓이 없고 버리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제 생각에 동물은 야수일지라도 잡아먹기는 해도 그냥 죽이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싫은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은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버리거나 죽여 버립니다.
앞에서 봤듯이 형제마저 하느님까지.
싫으면 버리고 미우면 죽여 버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좋고 싫음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이고,
미움은 싫어하는 것을 단지 버리는 것을 넘어 파괴하는 힘이며,
미움이 극에 달하게 되면은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또 볼 수 있는 것은
싫은 감정과 미움의 힘이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집단화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형제들이 싫어하는 감정을 공유하며
요셉을 버리자고 더 나아가 죽이자고 공모하고,
복음에서는 소작인들이 힘을 합쳐 주인에게 대듭니다.
공동선을 위해 합력 선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악한 짓을 힘을 합쳐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집단 폭력이 발생하는데
거의 모든 악이 이렇게 집단화하고
이런 집단화에는 반드시 주모자와 공모자가 있습니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이렇게 악을 집단화하였고,
전두환이라는 인간이 마찬가지로 악을 집단화하였으며
우리는 지금도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속 집단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단체에서도.
사랑을 배우는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이웃을 죽여버리고,
자기 소유를 나누지 않고 이웃의 소유를 공모하여 빼앗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이 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귀한 돌로 쓰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버린 돌을 귀하게 쓰실 뿐 아니라
귀한 돌을 버린 악한 자들을 주인이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복음은 얘기하는데 이것이 창세기와 복음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징벌이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손을 뻗어 징벌하시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의 손을 빌리시고 힘을 합치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악의 집단화도 하지만
공동선을 이루려고 합력선하기도 하고,
뜻을 모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도 하지요.
앞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한 돌들을 버리는 악한 개인과 집단을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하느님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려고 힘을 합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귀한 돌을 버리는 악한 짓을 하면서
자기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고
복음의 바리사이나 원로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저 자신도 돌아보고 세상 걱정도 하는 오늘 저입니다.
어쩌면 성체의 적을 만드는 교리교육?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포도밭 주인 외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그분이 우리에게 없애려고 하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 참새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새라는 것을 몰랐나요?
그리고 참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새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새는 다른 야생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의 집 근처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꺼리지만,
참새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참새의 자연적인 적들로부터 참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에게는 뱀, 족제비, 매와 같은 자연적인 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호막처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참새들이 지붕 밑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또한, 농지와 같은 환경은 참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인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적들을 차단하고 집짓기를 쉽게 만들어 주며,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참새가 우리와 함께 살며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본의 나가노현의 산악지대는 원래 참새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않게 되면서 참새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때때로 모여서 곡식을 쪼아먹기도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마치 쌀 도둑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면 농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참새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참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참새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죠.
참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이웃이지만,
매우 경계하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웃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이웃인 참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참새를 해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함께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와 함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존재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 알아봄, 스브스뉴스, 유튜브]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 참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싫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예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으로 알아보자면, 바로 이 세 가지 물음이었습니다.
1.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2.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3.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의심될 때 다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또한 사랑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이 어머니가 주는 ‘밥’입니다.
젖을 먹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밥을 통해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밥을 통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그러나 내가 진짜 누구인지, 내가 진짜 사랑받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짜 만들고 낳으신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당신 ‘밥’을 주시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저는 구역 판공을 하며 냉담자들을 만나 면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그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곧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체의 적이 되는 교리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왜 참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체가 주는 효과를 제대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냉담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교회에서 오늘과 같은 포도밭 소작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사랑받고 있는
송영진 모세 신부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4-40)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너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가 빼앗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경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표현으로는 유대교가 받은 은총이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경고인데,
뜻을 생각하면, 이 경고는 유대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도 해당 되고, 또 각 개인에게도 해당 됩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누리고 있던 은총을 잃었고,
그 은총이 예수님을 믿는 종교, 즉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의 은총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종교라면, 예수님을 믿는 종교답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되는 특권 같은 것은 원래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ㄷ)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소작인’으로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자녀답게 살지 않고 충실하지 않은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구약시대 때에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였다가
신약시대가 되어서야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뀐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약시대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았을 뿐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밭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소작료를 내는 사람이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밭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소작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거둔 소출과 그 밭을 상속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밭은 곧 자녀의 밭이고,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 자신의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3) 실제 상황에서는 비유의 표현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못 알아보고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죽였습니다.(요한 16,2)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 사도도 진심으로 하느님께 충성하려고 그랬고,
예수님을 죽인 박해자들도 대부분 그랬습니다.
실제 상황과 비유의 표현에 그런 차이가 있긴 한데,
결과만 놓고 보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안 믿고, 죽인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한 일입니다.
<모르고 그랬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