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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장 그날 이후 2 7월 23일 밤, 어둠 속의 대화. "뒤져봐라! 아니, 내가 뒤지지." "……!" "있다! 과연 있군! 비었지? 봐라, 비어 있지 않으냐. 마신 거 야. 마시고 만 거야. 이젠 됐어! 혈부용만 도착하면 대법을 시 행할 수 있다. 후후후하하하하!" "……!" "근 이십 년, 아니 삼십 년이 넘게 준비하고 계획하던 일이 이제 며칠 후면 완성되는 것이다. 그토록 오래 계획하던 대업 이……! 기쁘지 않으냐, 쌍고르마?" "기쁘군요." "후후, 너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다. 내가 불사옥령체가 된다 고 해서 네가 기쁠 일이란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러나 말이 다.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 몽고의 제국이 다시 선다 는 말과도 동일한 것이다. 지금의 힘에 그 힘까지 가세되면 무 서울 것이 무어란 말인가? 후후하하하하!" "저는 약간 걱정되는 것이……!" "뭐가 말이냐?" "혈부용이 없어지면 가괴자가 광분하지 않을까요?" "상관없다. 그가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니까. 그보다 그녀는 언제 도착하느냐" "오전에 연락을 보내었으니 모레면 연락을 받고 출발할 것입니 다. 그 후에는 쾌속선으로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도착하겠지요." "좋아, 그때까지 이 녀석에게 약부터 먹여라. 최상의 상태라 야 대법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걸레쪽에 가까운데 나흘 만에 괜찮아질까요?" "옥령체를 무시하지 마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괴력을 발휘 하던 그가 이제 완전한 옥령체가 되었는데 뭐가 걱정이냐? 그냥 둬도 낫겠지만 노파심에 약을 먹이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 "청옥관(靑玉棺)에 넣어 두면 대법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리고 영영이지. 그 안에서 완전히…… 생명이 끝나고 말 테니까." "……!" "……."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신 것 같군요. 그를 희생시킨다는 것 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대업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가 있 다. 그렇게 살아온 한평생이니까." "……!" "혈부용이 도착하면 바로 혈옥관(血玉棺)에 집어 넣어라. 결 국은…… 같은 운명이 되겠지." "예!" * * * 7월 25일, 장강. 허탁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아침부터 방주의 선실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오백 명은 족히 탈 만한 거대한 화물선의 갑판 아래 한 구역 을 통째로 방주의 선실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동정이 방주 의 귀에 들어갈 염려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탁은 그렇게 선실 문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가 밝은 사람이라면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듣고 웃었을 것이다. "부를 때가 됐는데? 분명히 부를 때가 됐는데……!" 가괴자는 혈부용이라는 애첩을 새로 맞아들이면서부터 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멍만 파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심 지어는 암살당했다는 헛소문까지 퍼질 정도로 그는 방 내외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거기에 유일한 예외가 허탁이었다. 가괴자는 말 그대로 밤낮없이 구멍만 파다가 문득 혈부용 이 외의 사람이 그리워지면 허탁을 부르는 듯했다. 그리곤 되는 소 리 안되는 소리 해가며 가지고 놀다가 다시 혈부용의 품으로 돌 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배를 타자 달라졌다. 배를 타며 잠깐 얼굴을 내비친 가괴자는 벌써 나홀이 지나도 록 한번도 허탁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허탁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허탁은 신세 한탄을 하듯 중얼거렸다. "평소에 불려서 갈 때면 끔찍하더니, 안 부르니까 이젠 부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조마조마하군! 이게 사람 사는 거라 고 할 수 있을 것이냐 허탁아, 허탁. 너는 왜 진작 도망가지 않았느냐?" 끼익! 그때 선실의 문이 열렸다. 허탁은 제풀에 놀라 흠칫하더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시녀가 나오고 있었다. 손에 든 항아리 하며 인상을 쓰는 모습으로 보아 요강이라도 비우러 나오는 호양이었다. 허탁이 다가갔다. "방주님은 뭐 하시냐?" 시녀가 손에 든 것도 무거운데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으로 틔 명스럽게 대답했다. "주무십니다." 허탁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열아흡째 부인과?" 열아흡째 부인, 혈부용을 말하는 것이다. "안 보이시던 걸요!" 허탁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했다. 죽은 사람처럼 푸르뎅뎅하게 죽어 가는 것이다. 방금까지의 처량하면서도 익살스럽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지 금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시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내가 뵙잔다고 전해라!" 시녀가 손에 든 항아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이것부터 우선……." 허탁은 그 항아리를 쳐서 날려 버렸다. 챙! "어머!" 항아리가 벽에 부딪쳐 박살났다. 구린내가 사방에 퍼졌다. 그러나 허탁은 얼굴도 찌푸리지 않고 시녀의 어깨를 선실로 밀어 넣었다. "어서 전해!" 시녀가 두려운 빛으로 얼른 뛰어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 타났다. 욕이라도 먹었는지 뾰로퉁한 모습이었다. "귀찮게 굴지 말라는데요?" 허탁은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 속하 허탁입니다. 급한 일이 있어 무례를 범합니다!" 허탁은 성큼성큼 내실로 들어가며 고함을 질렀다. 문을 세 개나 지나서야 내실 문이 보였다. 허탁은 그 문을 걷 어차 열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속하 허탁입니다." 말에는 불손함이 가득하고 행동은 무례의 차원을 넘어 있었 다. 그러나 허탁의 표정은 딱해 보일 정도로 초조해 보였다. 내실은 넓고, 화려했다. 한쪽 면에는 붉은 휘장이 쳐져 있고 그 너머로 은은히 사람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무슨 일이냐? 지금은 불편하니 나중에 오너라!" 허탁의 얼굴은 혈색을 잃고 창백해졌다. 그는 휘장 앞으로 나아가 소매를 휘둘렀다. 촤악! 소매만 닿았는데도 휘장이 반으로 찢겨져 나갔다. 가괴자는 침상에 앉아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반역 …… 이냐?" 떨리는 목소리와 뺨. 그것을 보는 허탁의 얼굴에는 당흑감이 가득했다. 결국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이 귀제갈 이 돼지새끼에게 짬쪽같이 속아 버렸구나!" "이제 알았나?" 허탁은 순간적으로 돌아서서 문가를 보았다. 거기 낯익은 모 습이 보였다. 통천방 팔대당주 중의 하나인 비각(飛脚) 이방화(李邦華)였 다. 원래 총단을 지키기로 되어 있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 나타 난 것이다. 큭! 허탁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팍 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물든 손 한쌍이 그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쾌수(快手) 양일청(楊一淸), 너였구나!" "나 외에 또 누구겠나?" 허탁의 가슴을 꿰뚫은 손의 임자, 가괴자로 변장한 자가 말 했다. 허탁은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신은 음모에 넘어가는 척하면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나머 지 사람들은 그 틈에 다른 일을 꾸민다. 정말 좋은 계획이군" 양일칭이 다시 이죽거렸다. "요녀(妖女)를 보내 방주의 시선을 가리고, 그 틈에 외각 분 방에서부터 잠식해 들어간다. 최후의 일격은 자기들의 본거지로 끌어들여서 단숨에! 네 반란 음모만큼이나 좋지." 허탁과 로부 옹고트가 꾸민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탁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분방의 동조자들은 처단한 뒤겠지? 이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지? 설마 너희들은 아니겠지?" 통천방 각분방과 지부에서부터 조금씩 협력자들을 모아 어느 순간, 일시에 판을 뒤집어 버린다는 계획이었는데 이미 틀렸다 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탁은 가괴자가 그렇게 굼벵이처럼 느리게 이리저리 다닌 이 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비웃고 있는 동안 가괴자는 몰래 빠져 나와 분방들을 청 소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방화가 말했다. "방주님말고 누가 이런 신묘한 계획을 꾸미시겠느냐?" 양일청이 말했다. "너 따위가 무슨 제갈이냐? 방주께서는 처음부터 네 머리 위 에 올라가 계셨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지?" "이번 기회에 쓰레기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지." 이방화가 거들었다. "물이 고이면 썩어서 너 같은 벌레들이 생기거든." 양일청이 말을 맺었다. "통천방이 제이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너 같은 것들부터 청 소해 버리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허탁의 입에서는 피가 덩어리져 나오고 있었다. 기도를 통해 가슴 속에 고인 피가 역류하는 것이다. "방주는?" "남경 분방을 청소하고 계실 것이다." 대답해 주는 것에도 지친 모양이었다. 이방화가 발을 들어 허 탁의 머리를 찼다. 팍! 귀제갈이라 불리며 강호에 악명을 날리던 허탁의 머리는 이제 더 이상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같은 날, 장강. 장강수로십팔타로 돌아가던 백미어옹 하호는 중도에서 배를 갈아타야 했다. 전서구로 소식을 전해 듣고 양주로 향하던 번강 룡의 배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이란 역시 알 수 없는 거야. 안 그러냐, 하늙은이?" 하호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일개 지방의 군소 조직이 우리 장강수로십팔타를 방수로 두 는 그런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한 바로 며칠 후에 그렇게 밑천 마저 거덜낼 줄이야 누가 짐작을 했. 안 그러냐, 하늙은이?" 방수로 두었다기보다는 사실은 꺾은 것이지만 하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번강룡의 자존심을 긁어서 좋을 일이 없는 것 이다. "그러게요." "그가 실종되었다는 건 알고 있나, 하늙은이?" 하호는 놀란 빛이었다. "금시초문입니다." "양주 가까운 강변에서 수하들은 거의 전멸되고 몇몇만 살아 도망갔다는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잘되지 않았나, 하하하하!" 통쾌한 둣 웃는 번강룡을 보면서도 하호는 같이 웃을 수 없 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번강룡이 말은 저렇게 하며 즐거운 듯 웃 지만 사실은 극도로 기분이 나쁜 상태라는 것을. 그가 하늙은이 라는 호칭을 쓸 때면 어김없이 그랬던 것이다. "지금 양주로 가시는 뜻은……?" "혹시 살아 있으면 죽여 주려고." 번강룡의 딱 부러지는 대답에 하호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본심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본심일 수도 있었고, 사실 아주 그런 마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번강룡이 지금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는 듯 중얼거렸다. "덤비면 죽어? 건방진 자식. 누가 먼저 죽나 두고 보자." 하호는 문득 방안 탁자에 놓인 보퉁이에 시선이 쏠렸다. 배를 타는 사람들은 뭔가가 바뀌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특히 기물 같은 것에 더욱 그래서 한 가지라도 달라지면 금방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저건 뭡니까?" 번강룡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고 하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색은 잠깐이었다. 번강룡은 그 보퉁이를 집어 방 한구석에 던졌다. "그냥……, 개인적인 물건이야. 하늙은이는 몰라도 돼!" 챙! 보퉁이가 떨어지며 들린 쇳소리에 하호는 관심을 두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역시 자존심은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 이다. 문이 열리고 수하가 들어왔다. "손님이 왔습니다." "여기로?" 하호가 놀라 중얼거렸다. 강물 위로 운항하는 배로 손님이 온 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번강룡이 물었다. "인근의 좀도적들이냐? 그러면 선물이나 놔두고 가라고 그래!" 수하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찾아온 손님은 세 사람, 백리극과 도신 도귀였다. * * * 같은 날, 남경 금의위(錦衣衛). 금의위는 원래 황제의 직속으로 남경을 방어하는 상십이위(上 十二衛) 중 하나였다. 상십이위는 오군도독부에 속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만을 듣는 심복부대로 그 중에서도 가장 심복하는 자들을 뽑아 근위부대를 구성한 것이 금의위였다. 그 지휘사(指揮士)인 영반(令班)은 장관(長官)급의 인물로 임 명했다. 명대 초기에는 군부의 장군을 영반으로 했고, 명나라 후기로 가면 동창의 영반인 사례태감(司禮太監)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승상격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영반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 중간중간 의외의 인물들이 영반의 직책을 맡기도 했는데 당금의 영반이 그랬다. 금의위의 교위(校尉;장교)급 이상이 아 니면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금의위는 남경성의 중화문(中華門) 안에 있다. 중화문을 통과한 성내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문 안에 있다 는 뜻이었다. 중화문은 보통의 성문이 아니라 방어용의 작은 성과 같은 구 조로 되어 그 안에 삼천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이다. 문은 사중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문에는 아래위로 열리는 보 조문이 딸려 있는데 이것을 천급갑(天急匣)이라 불렀다. 이래서 중화문은 총 열두 겹의 문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문들 사이에 금의위의 군영이 있었는데 원래는 수문군사들 을 숨기기 위한 곳으로 장병동(藏兵洞)이라 불렀다. 지금 등평은 감회 어린 얼굴로 그 장병동의 하나인 취응각(鷲 鷹閣)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취응각은 임무를 띠고 외부로 파견 나갔던 금의위의 위사가 돌아와 복명(復命)하는 곳, 오 년 만에 돌아온 등평도 부영반이 긴 하나 여기로 먼저 안내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서성거린 지 한 식경이나 되어서야 문 열리는 소 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문가에는 무관의 복장을 한 삼십대의 사내가 서 있었다. "본관은 현 금의위 부영반인 장화룡이라고 하오. 둥부영반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는 바요." 등평은 눈썹을 굼틀거렸다. 부영반의 직위는 오 년 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공석으로 남 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새 부영반을 본다 해서 기분 나 쁠 것은 없지만 어쩐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못 보던 얼굴이군!" 장화룡은 미소를 지었다. 용모로 보아서는 삼십대의 청년인데 묘하게도 얼굴이 깨끗하고 여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수려한 사내 였다. "등부영반이 떠난 후에 여기 부임했으니 알 리가 없지요. 당 시에는 내인청(內人廳)에 있었소." 내인청. 환관들의 일을 관장하는 곳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환 관들에 의해서 일이 처리되는 곳. 그곳에서 일을 했다면 그는 환관이라는 뜻이 된다. 등평은 새삼스럽게 장화룡을 바라보았다.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일을 떳떳이 얘기하는 그가 특이해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다면 얘기가 통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말을 꺼내었다. "중요한 보고사항이 있소. 영반대인을 뵐 수 있겠소?" "로부 옹고트에 관한 이야기요?" 등평은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일부의 이야기를 보고했으니 로부 옹고트라는 이름은 알 수도 있을 것 이다. "그가 중원에 깔아 놓은 세력에 관한 이야기요." "양가장 말이오?" 등평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사옥주를 따라가 간신히 찾아낸 본거지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어떻게……?" "몇몇 희생이 있었지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등평은 더 캐묻지 않았다. 금의위에는 모르는 것이 아 는 것보다 좋은 일들이 많았다. "대책은?" "서 있긴 하오만……." 장화룡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지 않소" 등평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요?" "백리극!" 등평의 안색이 변했다. 결국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정했 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설프게 변명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 적이고 간단한 법이다. "고의로 그 부분을 누락했음을 시인하오." 장화룡은 빙글빙글 웃었다. "고조(高祖;주원장)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을 싫어했다고 하는 데 혹시 아시오?" '이건 무슨 이야긴가?' 등평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먼저 말할 이야기였다. 과연 장화룡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말을 이었다. "의욕이 넘치는 자와 견식이 넓은 자요." "……?"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니 과연 탁월한 분이라고 할 만하지 요? 요컨대 그런 자들이야말로 황제의 입장에서는 위험한 자라 는 것이오." 반역을 경계한다는 뜻이었다. "백리극이 그런 자였지요. 그래서 숙청되었던 것이고." 등평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분……, 백리극에게 무슨 일이라도?" 구복을 처단하러 간 백리극이 혹시 잡히기라도 하지 않았나 두려워진 것이다. 장화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양주로 오고 있는 중이오. 다행히 구복을 죽이지 는 않았소." 등평은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모르는 게 없군!" 희생의 대가요. 등부영반이 없는 동안 금의위에도 많은 발전 이 있었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장화룡은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걸었다. "고조황제께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긴 했지만 그때의 상황, 즉 황권이 확립되지 않았던 상태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도 있는 일이오. 아까의 이야기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고." "지금은 다르단 말이오?" "물론 다르오. 황상께서는 의욕이 넘치는 자와 식견이 있는 자를 좋아하시오. 그 증거가 백리극이요. 죽은 것으로 되어 있 는 사람이 돌아다니는데도 그냥 두고 있지 않소?" "그 말은……?" "앞으로도 살 수 있다는 얘기요. 구복을 죽이려고만 않으면." "복수를 말라는 얘기요?" "구복은 불법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았소. 모든 원인을 찾아들 어가면 역시 당시의 상황 탓이긴 하지만 당금의 황상께 귀결되 지요. 자, 그럼 어쩌겠소? 황상께 복수하겠소?" "구복이 주모자이니……." "구복을 죽이는 것이 곧 황상께 칼을 돌리는 행위요." 장화룡은 결론적으로 말했고, 등평은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전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억울함은 누가 풀어 준단 말인가? 장화룡은 말했다. "잊고서 새출발을 해야지요. 언제까지나 옛 기억에 매여 살 수는 없지 않소? 다행히 그는 그렇게 결정한 모양이오만……. 본관은 그 얘기, 듣고 역시 백리 장군이라는 생각을 했소. 마 두들과 돌아다녀도 근본은 어쩔 수 없는 법인 모양이라고." 마두들이라는 얘기에 둥평은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 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있소?" "유감스럽게도 없소!" 등평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그도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들은 것이다. 혹수당의 괴멸과 수뇌들의 실종 및 죽음이라는 얘기였다. 둥평은 다시 안색을 가다듬었다. 이제 남은 것은 로부 옹고트 를 죽임으로써 그들의 혼령이라도 달래 주는 것뿐일 것이다. "영반대인을 뵙고 싶소." "양주에서 이미 뵙지 않았소?" "……?" "도연 대사가 바로 현임 영반이시오." 등평은 경악했다. 그 땡중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영반일 줄은 몰랐다. "죽었다고 하던데……?" "흑수당의 사람이 구해 줬소. 그래서 혹수당은 명맥을 보존하 게 되었는 줄 아시오." "누가?" "진운!" "그가?" 등평은 오늘 여기서 네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이번이 가장 크 게 놀란 것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가장 중요한 일 을 해낸 것이다. "그는 운 좋게도 용광사에 늦게 갔다더군요. 그리고 모든 광 경을 보았소. 로부 옹고트가 황룡과 혹웅을 쫓아갔을 때, 그는 도연 대사를 구해 내었소." 장화룡은 슬쩍 웃었다. "다른 저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가장 큰 공을 세웠소. 아마도 흑수당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럴 거요." 등평은 한동안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 었다. "금의위에 아무리 발전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금 의위가 해내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돕는 세력이 있었을 거요." 장화룡은 선선히 시인했다. "당연히 있지요. 처음 영반대인께서 양주로 갔을 때는 그저 의혹의 수준이었지만 그곳에서 몇 가지 단서를 잡았소. 거기에 는 흑수당의 덕도 없다 하지 못할 것이오만, 더 도움이 된 사림 도 있었지요." "그게 누구요?" "양주부 추관 모충국, 강남 총포두 유소백, 등부영반의 동생 분도 사소한 도움은 되었고……, 무엇보다도 도움이 된 곳은 통 천방이오." "통천방?" "그렇소, 통천방! 로부 옹고트는 통천방도 집어삼키려 했던 모양이오. 가괴자는 영리한 자라 그 음모를 늦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 그래서 이번 토벌전도 그들과 함께요." "토벌전?" 장화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용양위(龍揚衛), 용강위(龍江衛), 천책위(天策衛)가 양 주부 이동을 완료했소. 그들과 통천방이 함께 토벌전을 벌일 거 요. 등부영반도 함께 가지 않겠소? 빨리 가지 않으면 좋은 구경 을 못하는 수도 있으니 말이오." * * * 같은 날, 경양도상(京揚途上). 경양도상(京揚途上). 남경에서 양주로 가는 관도를 일컫는 말이다. 소구자는 그 경양도상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남경응천부의 여름 날씨는 지독하다. 특히 소나기가 내리기 저의 찌는 듯한 더위에는 나무 위에 앉은 새들조차도 구이가 되 어 떨어지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 날씨에는 그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이나 자는 게 최곤데……!" 소구자는 나직이 투덜거렸다. 정말 그랬다. 누가 이런 염천지하(炎天之夏)에 길을 간단 말인가? '길 옆에 이중삼중으로 심어진 백양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 이나 늘어지게 자고 갔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이루지 못할 소망이라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예 저의 그였으면 이런 경우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지만 처지가 달라 진 것이다. 그가 잡고 있는 막대의 다른 한 끝을 잡고 따라오는 사람 때 문에 그것은 이루지 못할 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맹인 아버지를 안내하는 효자 소년으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맹인 아버지는 화영이었다. 나흘 전, 강변의 싸움에서 도망친 이후 소구자는 내내 화영과 붙어다녀야 했다. '이 모든 게 다 그 백발귀신 때문이지 뭐야.' 야광충이 강변에서 화영에게 쓸데없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라 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야광충은 화영에게 '소구자를 부탁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덕분에 이 꼴이었다. 도망가려고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화영이라는 이름의 이 맹인은 눈 있는 사람보다 눈이 더 밝아서 도대체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날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을 이 나흘 동안 다 찾아내어 모 은 것도 그였던 것이다. '고생을 사서 하고 있지!' 소구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은 차라리 찾지 않는 편이 좋았다. 외팔이 병신 하나만 빼고는 다들 골골거리고 있지 않은가! 원도살이라는 인네는 저승 문턱에 반쯤 발을 걸쳐 놓았고, 월몽영이라는 계집애는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 리고 개중 제일 낫다고 하는 혈문룡이라는 사내녀석은 성질도 고약해서 제대로 낫지도 않은 주제에 로부 어쩌고를 찾겠다고. 툭하면 난동이었다. 한마디로 골치 아픈 짐덩이들을 자청해서 끌어안은 셈이었다. 지금도 그래서 남경까지 가서 약을 사 오는 형편이었다. '지난밤에 갈 때는 편했는데……!' 남경으로 갈 때는 화영이 그를 안고 달려서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대낮에 관도에서 그렇게 빨 리 달리다가는 곧바로 그들, 복면인들의 이목에 걸리고 말 것이 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올 때는 변장을 해서 이렇게 고생스럽게 올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덥고, 목도 말랐다. 길가의 나뭇가지들도 못 견디겠는지 축축 늘어져 버리고 새 들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지독한 낮이었다. 소구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볼멘 소리를 터뜨렸다. "쉬었다 가요!" 언제나 그렇둣이 평온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거의 다 왔는데 그냥 가자." 화영은 언성을 높이는 적도 화를 내는 적도 없었다. 그가 흙 을 끼얹고 욕설을 퍼부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소구자를 더 못 견디게 만들었다. '반응이 있어야 뭘 해도 해볼 것인데……!' 이런 식의 무반응은 어떨 땐 때리고 괴롭히는 것보다 더 괴롭 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소구자로서는 화영이 밉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날 강변에서 상처를 입어 가면서도 그를 완벽하게 보호하 것이 나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검술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귀찮았다. 그는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얼마를 더 갔을까? 길가에 십여 대의 수레가 세워져 있고, 나무 아래에는 몇 십 명의 장사치들이 제멋대로 드러누워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경으로부터 양주로 가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부러워! 일마나 시원할까?'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있는 나무 아래에는 녹색의 그늘이 드 리워져 있어서 보기에도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은신처에 다 와 간다. 여기서 쉬자고 할 화영이 아닐 것이다. "쉬었다 가자꾸나, 얘야!" 소구자는 귀를 의심했다. "웬일로 쉬자는 말씀을 다 하세요?" 화영이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신비스러운 미소였다. "쉬기 싫으면 그냥 갈까?" 그럴 리가 없었다. 소구자와 화영은 장사치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 아래에 앉았다. 소구자는 벌렁 드러누웠다. "아이고 좋네!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소구자는 아까 같아서는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 게도 누우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옆에 앉은 화영을 훔쳐 보았다. 화영은 눈을 감은 채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정말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장사치들이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아까 보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이 관도 저펀으로 사라지자 화영이 일어났다. "그만 가자!" 은신처는 양주성 인근의 야산에 세워진 작은 초막이었다. 이런 곳에 숨으면 곧 들키고 말 것이라고 소구자가 말했지만 화영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누가 적인지 구분이 안되는 상태에서는 되도록 사람의 접근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설사 적들의 수색이 온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없으면 미리 그 접근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 화영의 의견이었다.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몰래 오면 어쩨게 할 것이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소구자는 참아 버렸다. 화영 같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미리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초막에 들어섰을 때, 방안의 분위기는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좌검자는 구석에 앉아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는 그 멍한 눈을 뜨고 있었고, 월몽영은 누운 채 말이 없었다. 혈문룡만이 원도살의 옆에 앉아 무어라고 자꾸 말을 걸고 있 었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혈문룡이 말했다. 그들이 아니라 왼도살에게 하는 말이었다. "힘을 내세요. 이제 약도 왔습니다." 원도살이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 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혈문룡도 그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고집을 부려도, 애원을 해도 안되는 일이 세상에는 잇는 법이 다. 이제 곧 원도살이 맞을 죽음이 그런 것 중 하나였다. 혈문룡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포기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사실을 사 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원이 있습니까?" 왼도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문룡이 다그쳐 물었다. "뭡니까? 뭐든지 들어드리죠." 원도살이 힘겹게 입을 벌렸다. 혈문룡은 그 입에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언…… 젠가 갈 수 있게 되면, 북…… 해에 내 뼈를…… 묻 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원도살의 옷자락을 잡은 혈문룡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얼마 나 세게 쥐었는지 뼈마디가 튀어나오고 살갗이 하섀게 질려 버 릴 지경이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월몽영의 눈가로 투명한 이슬이 굴렀다. "내일 통천방과 관군들이 양가장을 친다." 화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더욱 놀라웠다. "양가장이 로부 옹고트의 소굴이기 때문이다." 혈문룡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화영에게 물었다. "확실한 이야긴가?" "통천방주가 지시하는 걸 들었네." "언제? 어디서?" "아까 여기로 오는 길가에서." 화영의 말에 의하면 아까 길가에서 쉬던 장사치들은 장사치가 아니라 통천방의 인물들이엇다. 특히 그 중 비대한 한 상인이 바로 통천방주 가괴자였다. 그들은 각자 변장하고 비밀리에 양가장 인근으로 모여드는 것 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의 일을 상의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구자는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까 그 장사치들이 있던 자리에서는 소리를 쳐도 우리에게 까지 들리지 않아요." 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들었다." 소구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혈문룡과 좌검자는 믿는 듯했다. 혈문룡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호홉을 고르고, 좌검자는 등 에 맨 검을 뽑아 옷자락으로 닦기 시작한 것이다. * * * 같은 날, 촉강. 혹웅은 풀과 덩굴을 가져다가 바익 틈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 처럼 적당히 주변 환경과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라조차 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빈틈없이 가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위장은 하는 듯 마는 듯, 무엇보다 주변 환경과의 자연 스러운 조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형 편이 아니었다, 빛 한 줄기라도 새어 나갈 빈틈이 생겼다간 바로 들켜 버리게 생긴 것이다. 틈이 완전히 가려졌다. 묘족은 밤에도 불빛이 안 보이게 불을 피우는 데에는 탁월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흑웅은 묘족이었고, 그 중에도 뛰어난 묘족이었으니 그런 것에도 남보다 뛰어났었다. 그는 그렇게 위장을 해놓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안에서 빛이 새어 나가지 않으려면 당연히 밖의 빛도 새어 들 커오지 않아야 한다. 그렇킥면 안은 어두워야 정상이었다. 그것 도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야 했다. 그러나 지금 흑웅은 자기의 코끝만이 야니라 읽을 수만 있다 면 글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황룡의 몸에서 뿜어지는 휘황한 금팡으로 바위 틈 안은 황금 궁전처럼 밝았던 것이다. 그는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황룡을 바라보았다. 여기 숨은 지 이제 보름째였다. 그 동안 황룡은 정신이 든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증거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흙빛으로 죽어 가던 황룡의 몸이 점점 정상을 되찾아 가더니 금빛이 돌아오고, 이제는 예전보다 더욱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황룡은 보리무상강기를 절정까지 연성하지 못했었다. 그 런 상황에서 로부 옹고트와 싸워 죽음 직전까지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억지로 폐관을 깨고 나오느라고 정상보다 오히 려 못한 상황이었었다. 내공수련 중에 외계의 방해를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 다. 밖에서 쳐죽이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괴멸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황룡이 거의 그런 상태였다. 아마도 대충 다쳤다면 그는 얼마 못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부 옹고트에게 당했다. 그것도 지독하게 당했 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보리무상강기는 후천지기(後天之氣)를 키워서 궁극적으로는 선천지기(先天之氣)를 끌어내는 내공심법이었다. 혹웅이 쉽게 그것을 연성했던 것은 영약을 먹어 선천지기가 이미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금빛으로 변하는 부작용도 없이 보리무상강 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후천지기를 극성으로 익혔다가 한번은 버 리고 선천지기를 새로 끌어올려야 했다. 혼탁하고 인위적인 힘을 버리고 천부의 기운으로 몸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황롱은 그 과정이 로부 옹고트에 의해서 이루어져 버렸다. 즉, 로부 옹고트에게 중상올 입고 내공을 잃음으로써 후천지기 가 버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바위 틈에서 가사 상태로 지 내는 동안 선천지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황룡의 보리무상강기는 극한(極限)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었다. * * * 같은 날 밤, 양가장. 양유락, 원래는 로부 옹고트라 불리는 그는 흘로 지하 석실에 와 있었다. 온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상태였다. 이곳은 그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곳, 그를 제외한 사 람은 어떤 일끼 있어도 들어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그의 앞에는 세 개의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왼쪽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짙푸른 청옥관, 오른쪽에는 타오 르는 둣 붉은 혈옥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양쪽의 관 과 아랫부분이 연결된 우읒라의 관이 있는 것이다. 그가 들어가야 하는 곳은 그 우읒라의 관, 바로 구합유정관 (九合乳精棺)이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 였던가! 찾아 헤매고 혜매었던 그것이 바로 귀영문의 장보고에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천지,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하나로 모아 혼돈의 상태로 섞었 다가 다시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내는 이 구합유정관은 비유하 자면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보물이 여태 약을 섞어 환약을 만들어 내는 약탕기의 역 할로나 여겨졌었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몰랐다. 오늘 이 구합유정관은 그 진정한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 다. 그는 오늘밤 이 관에 들어가 누웠다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 오는 신생아와 같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 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진정 그가 바라던 소망이 잠시 후면, 정확히 다섯 시진 후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관뚜껑을 열었다. 구합유정관의 안에는 양옆으로 각각 두 개의 구멍이 나 있고, 그 구멍은 바로 옆에 있는 두 개의 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옆에 있는 두 개의 관을 그는 마저 열었다, 붉은 관 속에는 혈부용이 태어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푸른 관 속에는 야광충이 역시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세 개의 관을 구하고, 약물을 구하는 것은 막대한 시간과 노 력을 들여야 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있는 것이니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정말 힘들어 한 것은 하늘이 내리지 않으면 나올 수 없 는 이 두 사람이었다. 사내이면서도 현음지맥을 지니고, 여인이면서도 태양지맥을 지닌, 자연에 역행하는 체질을 가진 두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 인가에 그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을 찾으면서 그의 고민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대도에 거주하던 전직 대관, 모원의의 아들이 그런 체질 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기뻐서 까무러칠 뻔했 던 것이다. 일단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그 다음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도적으로 변장시킨 수하들을 부려 고향으로 낙향하는 모원의 의 가족을 습격하고, 아이를 빼내어 대막으로 왔다. 그 와중에 아이의 숙부를 죽였지만, 전가족을 몰살시키지 않은 것만 해도 그의 자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약물을 먹이고, 현음진기를 가르쳐 완전한 현음옥 령지맥으로 바꾸었다. 일차 재료인 옥령체를 만들기 위한 전 단 계였다. 그런데 야광충이 커 가는 것을 보며 욕심이 생겼다. 불사옥령체의 질은 재료가 되는 두 사람의 질에 의해서 결정 된다. 불사체야 불사성(不死性)이라는 한 가지만 얻어 내면 되니 태 양지맥의 여아를 구해 천인혈로 불사체로 바꿔 버리면 더 신경 쓸 일이 없엇다. 그러나 옥령체는 달랐다. 불사체가 되면서 인성(人性)을 잃어버리는 약점을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옥령체는 그 옥령체가 뛰어나면 뛰어 날수록 그것을 재료로 한 불사옥령체의 질도 뛰어나게 되는 것 이다. 그는 이왕이면 청고익 수준을 성췬한 불사옥령체가 되기를 원 했고, 그것은 옥령체가 될 야광충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 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교육시켰다. 그 교육은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의 단련, 즉 신흔(練魂)의 단계까지 포함 해야 했다. 무수한 고통과 시련, 그리고 한계를 돌파하면서 하나의 인간 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야광충은 배반을 당해야 했고, 친인의 죽음을 보 아야 했고, 연인의 부정한 행위를 보아야 했던 것이다. 인간을 포기하고 흡혈귀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을 긍정하고 되 돌아오는 총체적인 과정이 그것을 위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 위대한 불사옥령체의 제왕이 될 그, 로부 옹고 트를 위해서 말이다. 로부 옹고트는 야광중의 품에서 찾아낸 옥병을 힐끔 보았다. 분명히 비어 있다. 어렇게든 그것을 구해서 야광충에게 먹이려 했었는데, 하늘이 도와 그에게 가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야광충은 이제 더 이상 야광충도 아니요, 홉혈귀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완벽한 옥령체인 것이다. 관 옆에는 두 개의 옥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구합유정관에 온갖 약초와 영물을 넣고 숙성시켜 만들어 낸 액체, 구합유정(九合乳情)이라고 부르는 액체였다. 로부 옹고트는 그 항아리들을 뜯어 혈옥관과 청옥관에 한 항 아리씩 부었다. 구합유정은 세 개의 관을 가득 채우기에는 모짜 라는 양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정량이었다. 이제 그가 구합유정관에 들어가 누우면 뚜껑까지 닿을 정도로 차오를 것이다. 그때, 야광충이 눈을 떴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로부 옹고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부님……!" 액체가 묻은 것인가? 아니면 길고 험했던 고통스런 기억이 무 의식 상태에서도 그를 괴롭혔던 것인가? 야광충의 눈가에 엷은 이슬이 맺혀 있는 것을 로부 옹고트는 보았다. 로부 웅고트의 눈가에 가는 갈둥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빛은 나타날 때처펌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곧 편안해질 게다. 조금만 있으면……!" 야광충과 혈부용의 관뚜껑이 덮였다. 다섯 시진만 지나면 그들, 야광충과 혈부용은 편안해질 것이 다.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 곳으로 둘이 함께 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못다 이룬 소망과 짐은 그가 대신 지고 가면 될 것이 었다. '내 방식으로 말이지!' 로부 옹고트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관에 들어갔다. 뚜껑이 스르르 소리도 없이 닫혔다. 이제 다섯 시진만 지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의 기나긴 노력의 결실이……!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ㅈㄷㄱ~~~~~~~~~````````````````
즐감하고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