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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2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7,14-15.18-20
복 음 :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신앙생활을 중단한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렵다. 평소에 상황이 좋을 때는 하느님을 찾지 않다가,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 양심에 걸린다.’
또는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서 하느님을 찾더라도,
다시 상황이 좋아지면 하느님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은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은 아들은 순수하게 아버지가 좋아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에 돌아온 것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왔는지,
그리고 큰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하였는지에 상관없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정의를 넘어섭니다.
정의를 깎아내리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회개의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큰 차원에서 정의를 뛰어넘으십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십시오, 생활 성서사, 48면)」
우리는 정의에 묶여서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의 자비는 참된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 마음먹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노인의 사망 시기를 연구한 결과,
생일 되기 전에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가 생일이 지나면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왜 생일 전후에 노인의 사망률에 현저한 변화가 나타날까요?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의학계의 거물 한 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훈장을 받기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정식으로 수여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관계자에게 부탁해서 병상에서 훈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갑자기 건강을 회복해서 몇 년을 더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우리는 그 마음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그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더 중요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지금을 힘차게 살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다며 온갖 불평불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역시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서 하느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중요한데도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 말씀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한 생활 끝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꾸는 것, 회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들의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까지 벌이게 되지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바꿔서 당신께로 나아오는 것을
기쁘게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들이십니다.
큰아들의 모습도 우리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을 위한 잔치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하였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마음을 바꾸지 못해서 즐기고 기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바꿔 얼른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 곁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마음부터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 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 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아버지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떠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이러한 삶은 어둠의 세계에 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며, 아버지를 떠난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알게 된다.
그는 죄인이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자비 투덜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렸다.”
저는 위에서 복음을 인용하며 투덜거렸다는 말에
무얼 투덜거렸는지 그 내용을 빼고 인용했습니다.
뺀 내용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인데
제가 이 부분을 뺀 이유는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듣는 것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린 것을 대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경청자와 투덜이의 대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어지는 비유에서도 재현됩니다.
둘째 아들은 경청자이고 맏아들은 투덜이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듯이
작은아들은 죄를 뉘우치고는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맏아들이 한 번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 한결같은 충성과 사랑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체험하는 데 비해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도 자비하신 것 때문에 삐지고 투덜거립니다.
아버지가 늘 아버지와 함께한 자기한테만 자비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괘씸한 동생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잔치까지 베푸니 화가 단단히 났고
그 바람에 아버지의 자비를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햇빛을 같이 쐬지 않고 나만 쐬려는 고약한 심사인데
그 바람에 자기도 동생에게 자비롭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비도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웃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도 체험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람이 이웃에게도 자비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동생을 환영하는 잔치에 함께하자고
아버지가 초대해도 그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비유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
자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은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그 집을 떠났다가 되돌아오지만
맏아들은 화가 나서 그 집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몰랐던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차이가 있다면
작은아들은 늦게라도 자비를 알게 되고 자비 안으로 돌아간 반면
맏아들은 동생과 같이 아버지의 자비 안에 있는 것을 거부했기에
끝까지 아버지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 밖에 있게 된 점입니다.
끝까지 투덜거리며 아버지의 자비 밖에 있는 맏아들이 가엾습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투덜이 맏아들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비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는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이자 중심은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집 떠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귀향한 타락한 동생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큰아들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저 기다리시고 환대하십니다. 용서하시고 큰 잔치를 베푸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묘사된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사랑,
어처구니없는 바보 같은 사랑,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의 원래 의미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그런데 위로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배은망덕, 배신의 삶, 방황과 타락으로 얼룩진
지난 삶 앞에 눈을 꼭 감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는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돌아온 우리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으시며, ‘잘왔다. 잘왔어!’ 라고 외치시는 분이십니다.
돌아온 우리를 품에 안으신 아버지는 혼잣말로 계속 되뇌이십니다.
“괜찮다, 다 괜찮다!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거라.
네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나는 행복하단다.
그렇게 주눅 들어 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더 이상 울지도 말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 보자꾸나!”
그런 반면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흙으로 나를 빚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 덕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 입어 이렇게 두 발로 서있습니다.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근원이요 출발점이신,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그분께로 거슬로 올라가는 작업, 바로 회개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님)
“정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비를 선포하고 자비를 살 때만이
그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악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 자비 때문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님)
죽음에서 생명에 이르는 처절한 변화(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기쁨)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 15장에는 세 편의 비유가 실려 있다.
그것은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카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들을 연이어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 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은 본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 마땅해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카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신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 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 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 타락의 과정은 작은 아들의 자기 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 육신의 욕심, 즉 放蕩과 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肉과 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의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어제는 우리가 마태오복음의 ’악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마태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소작인의 악행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끝장을 내야 하는 正義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루카복음은 저의보다는 慈悲를 강조한다.
루카에게 있어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은 정의라기 보다는 자비이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죙니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온르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 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 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正義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 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不辭하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인과응보도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