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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 탈출 3,1-8ㄱㄷ.13-15
제2독서 : 1코린 10,1-6.10-12
복 음 : 루카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님께 알리면서,
자신들은 그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이 벌을 받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논리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루카 13,5 참조)
더욱 강하게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개를 참회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때에만 회개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회개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분명한 죄를 지을 때까지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과 회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죄인의 개념은 인간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죄에 묶여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모든 인간이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부르시는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악을 피하고
하느님을 향하여 자기 생활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2)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절박함을 봅니다.
자신이 거름을 줄 테니 한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주인에게 부탁하는 포도 재배인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18,13)라고 고백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3년 1월 16일 자로 발령받은 저는 갑곶성지를 떠나
지금의 성김대건성당으로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외출을 나갔다가 성당에 들어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못 찾아서 헤맬 때가 많았고,
걸어서 물건을 사러 근처 가게에 갔다가 성당 방향이 아닌 정반대로 간 적도 있었습니다.
건물이나 길이 다 비슷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길눈이 어둡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길치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길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길이 헷갈리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다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현재 위치를 잘 몰라도
주위의 풍경, 개략적인 지형도를 알고 있기에 손쉽게 성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그 길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길을 알기 위해서는 주변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위를 보고 많이 알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와 묵상을 게을리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랑하며 살아가야 주님께 가는 길을 훤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한다고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평불만만을 반복하면서, 주님께 가는 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가는 길은 낯설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그 길을 가려는 우리의 사랑 담긴 노력으로 훤하게 알 수 있게 되면서,
그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시던 시대에는 인간의 죽음을 삶의 결과로 보고 있었습니다(지금도 비슷합니다).
만약 불행하게 죽으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고,
편안하게 죽으면 선행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것을,
또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을 죄의 결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죄의 결과로 죽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 이 순간 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회개하면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그 길에 들어서게 되고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기다림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미뤄서는 안 되고, 지금 당장 들어서야 합니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해서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고을을 들러 가르치실 때의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여기서 '회개'가 강조됩니다.
사실 ‘회개’란 먼저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갈릴래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회개’란 무엇을 말하며, ‘죄’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제1독서는 이를 밝혀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1독서의 맥락 안에서
‘죄의 본질’과 ‘회개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이 죄인가?
성경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의 죄’이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무지의 죄’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사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성조들과의 약속을 맺으신 하느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후손들과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고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피해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호렙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한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탈출 3,4)
얼마나 놀랬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살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모세인 줄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피하여 도망해 온 이곳에서,
일종의 수배자 신세인 자신을 아는 이가 있다니!
더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하시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이 귀양지가 무슨 거룩한 곳이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그러니 그분은 아직 성조들의 하느님이실 뿐,
그 후손들과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려왔다고 하십니다. (탈출 3,7-8)
그리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탈출 3,14-15)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우선 세 가지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없는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 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방인들의 신처럼 이름의 한계 안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하느님으로
‘늘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장차 보게 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라오에게 행한 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홍해를 건네는 탈출을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체험시켜 주십니다.
나아가, 손을 잡아 붙들어 주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무지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이미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끊임없이 망각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에서는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마침내는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떠나갔으며,
‘망각의 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의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주 하느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맡겼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마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코린토인들’에게,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세례를 입고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죄를 지어 죽어 널브러졌던 사실을
본보기로 주었음을 환기시키며,
종말에 다다르기까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4.)
이는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께서 ‘구원자 주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의 죄’와
그것을 알고도 무시하고 배척했고 거부한 ‘망각한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에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회개’란 ‘믿는 일’입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 일인가?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이 선포가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다스리는 나라,
곧 죄와 속박으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에덴에서 벌어진 축복(원복)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그 ‘축복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손아귀 안에 있다. 손에 들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손에 들려 예수님과 함께 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은
그 나라를 들고 온 예수님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구원자 주 하느님이요, 동시에 당신 손에 들려 함께 가져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윤리적인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복음'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복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희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오,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우리의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돌보고 희망 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그 사랑을 베풀며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사순 제3주일: 다해
오늘의 전례는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 나갈 때, 즉 회개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특별한 메시지며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항상 모세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구원해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다.
야훼라는 이름은 ‘내가 있다!’ 즉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구원하는 하느님이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일치할 때 그분의 구원적 능력이 나타난다.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다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대목은(1-5절) 갈릴래아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 때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을 때
빌라도가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한 사실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그들 가운데 열여덟 명이 희생당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는가를 보고 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2-3절).
그들은 모든 불행을 다 정해진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을 더 깊이 깨닫기를 회피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거절하신다(참조: 요한 9,3).
이러한 생각과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오로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수단이나, 정해진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만 설명할 때는
그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 신앙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3절).
이 ‘멸망한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영적인 ‘파멸’,
즉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지 않는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 이르게 되는 본질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회개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즉 회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우리 자신의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은 덮치면서 나를 스쳐 가는 이유가 특별히 있기 때문인가?
만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내게 아직 결정적으로 마음을 결정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
나 자신이 더 열심히 투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든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매일의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21,18-19)와 마르코(10,12-14)는
예수께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하셨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주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루카는 심판과 처벌의 의미보다는 자비와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주인은 ‘삼 년’을 기다리면서 열매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도,
포도원 재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이다.
주인은 이런 아량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자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내로 기다려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의 표징이면서 또한 심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매 순간순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회개하고 그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크면 큰 만큼
책임과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게을리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불행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맞은 위험에 놀라서
이집트 노예 생활에 대해 향수를 갖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탈출 14,11-12).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도 안이한 일도 아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일의 사건들과 현실들을 통해 입증되는 마음의 회개로써
‘자유’를 성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공진화’라는 주제를 읽었습니다.
공진화란 생태계에서 여러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생태계에서는 벌과 꽃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발전합니다.
기업도 생태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기업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은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를 엘지의 제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애플과 앱 개발자들이 협력하며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세상의 공진화와 신앙의 공진화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 즉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었고,
광야를 지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다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 때면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떠 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였고,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앙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공진화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사랑과 은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회개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결국 깨닫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사랑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던 죄인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공진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신앙을 키워 갔듯이,
우리 신앙도 회개를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공진화를 이뤄 나갈 것인가?
우리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 약해지고, 세상에 휩쓸려 하느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실천할 때,
그것이 곧 신앙의 공진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을 따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곧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 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는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코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사람들은 재난을 당하거나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하늘이 내린 재앙, 혹은 자기의 숙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면 그 불행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재난과 불행을 인간 죄에 대해 내리는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준 벌이니, 사람은 그것을 잘 참아 받아야 합니다.
그 시대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인을 멀리하고 외면함으로써 의로우신 하느님 편에 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재난과 불행으로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 편에 선 의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웃이 겪는 재난과 불행을 퇴치하는 선한 노력을 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그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학살하였다고 말합니다.
식민지를 지배하던 총독은 백성의 소요를 항상 우려하였습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는 과잉 반응은
식민지 갈릴래아를 지배하던 로마 총독에게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언급하는 실로암탑은 예루살렘의 급수시설에 있던 구조물입니다.
그것이 붕괴하였다는 사실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의 첨단 과학 기술로 건립한 大橋와 대형 건물도 무너지고 내려앉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두 가지 재해는 모두 그 시대에 있을 법한 것들입니다.
여니 재해와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들입니다.
모든 불행은 죄에 대한 벌로 하느님이 주신다고 믿던 유대인들에게
그런 재해로 희생당한 이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벌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논리이지, 예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실에 따라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賞이나 罰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재난의 책임을 하느님에게 전가하지 말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이 재난이나 불행을 당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웃이 그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돌보아 줍니다.
모든 불행이 하느님에게서 온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나는 하느님이 나를 버렸다고 믿어 절망 가운데 죽어갈 것입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내 이웃이라면,
그와 같은 벌을 나는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그런 자세들은 모두 예수님의 눈에는 인간으로서 “망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짓밟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높은 자도 강한 자도 아니고,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그 자녀인 신앙인도
그 자비를 실천하여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하느님이 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심고 기다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호세아 미가, 예레미야) 안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열매 맺도록 가꾸겠다는
포도원지기의 말을 받아들이는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기대하고 기다리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안에 나타나는 부정적 표현들,
“잘라 버리라” 혹은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등의 말을
오늘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부정적 표현들은 기원후 66년에 시작한 유대아 전쟁이
70년에 이스라엘의 패전으로 끝나고,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느님의 인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무화과나무를
드디어 잘라 버리셨다고 믿으면서 신앙인들이 발생시킨 말입니다.
하느님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삼 년이나 기다렸다”, 혹은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라는 오늘 복음의 표현들은
심고 기다리는 하느님은 우리의 응답을 기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심고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열매 맺는 노력을 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는 자비로운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다양하게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심고,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만이 보십니다. 우리의 좁은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잘라 버릴 판단을 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의 포도원 지기의 역할입니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함께 심어진 동료 인간이 이웃을 위해 할 일입니다.
그런 노력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할 일입니다.
자기의 뜻을 완강하게 관철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못난 구석과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의 뜻을 강요하고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사람은
자기의 못난 구석과 약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웃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대화하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며 그를 돕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하느님은 특정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배하라고 특권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의 뜻을 꺾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며 하느님을 배워야 하는 자녀들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심어놓고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생명, 자비로우신 당신의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열매 맺도록 기다리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