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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5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7,23-28
복 음 : 루카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오늘의 묵상>
한창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말을 못 하는 이가 말할 수 있도록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루어집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 말씀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대한 일종의 답변인 것 같습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듯합니다.
마치 제엘제불의 힘을 빌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그럴 만하다고 이야기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예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다른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 모습은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의 사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이미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표징을 보여 주실 때
적어도 그들은 그 자리에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도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구체적인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결코, 잊지 않을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 쓰신 글입니다.
“나는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비록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웃으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좋으신 하느님 앞에 행복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좋으신 하느님의 은총을 가장 잘 얻게 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어떤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면
그분은 감동하시어 우리에게 열 배의 은혜를 주십니다. 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성녀의 말씀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 고통과 아픔도 은혜였음을 깨닫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바쳤을 때는
조금 더 빨리 하느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평, 불만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는 시간이 더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혜 속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순간에서도 불평불만의 삶을 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내가 인정받고 더 사랑받아야 한다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연히 하느님이 자기 안에 없으니, 하느님의 은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행복한 삶일 수가 없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말을 못 하는 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일까요? 아니면 원망의 순간인가요?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더 큰 마귀가 우리 곁에 왔다면서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기를 구원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멀리 쫓아내고 맙니다.
어떤 책을 읽으니,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떠올려지면
긍정적인 생각 세 가지를 만들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만약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얼른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생각과 행동 세 가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일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
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7). 아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조욱현 토마 신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한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은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 버리려는 자이다.
우리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며 살지 않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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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인데 서랍장이 되는 가구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모습인데,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더 멋진 변신이 있습니다.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는 로봇이 자동차로 변하기도 합니다.
변신이라는 면에서 잘 알려진 동물도 있습니다. ‘카멜레온’입니다.
카멜레온은 몸의 색을 보호색으로 바꿀 수 있어서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성은 청순하게도, 화려하게도, 지적으로도, 활동적으로도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변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미는 7년 동안 애벌레로 있다가 매가가 된다고 합니다.
여름에 듣는 매미의 노래는 7년을 기다려온 기쁨의 노래일 겁니다.
변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나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예쁜 나비가 됩니다.
변신의 원조는 누구일까요? 저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높은 곳을 향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더 낮은 곳을 향한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더 멋진 모습과 더 큰 능력을 지닌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의 변신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변신은 본능에 의한, 자연의 법칙에 의한 변신인데
예수님의 변신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한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변신은 예수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은총과 자비의 변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과 예수님의 모습은 화려하고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박해와 멸시를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신앙인의 변신은 겉모습의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타인에게 보여 주려는 변신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의 변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그 변신 때문에 박해를 받을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모욕을 당할지라도,
그 변신 때문에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변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는 아무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습니다.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짓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신앙에 무관심한 자와 미지근한 자 중 누가 더 나쁠까?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보고는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마치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힘센 자와 강도가 싸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하시며,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라고 결론을 내리십니다.
만약 전쟁에서 상급자가 하는 일에 자꾸 불만을 품거나
상급자를 인정하지 않는듯한 태도를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마치 ‘탈영’을 하는 일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고자 탈영하면 어떤 면에서 크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을 수 있으나,
실제로는 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쟁에서 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게 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이와 같은 역할을 담당합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의 길 안내자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얻기 위해 간절하게 말합니다.
“골룸이 착한 주인님을 잘 모시겠어요. 골룸이 길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골룸은 프로도와 샘을 속이기 위해 친절한 모습과 간교한 모습을 반복하며
내부에서 그들을 분열시키고 약화했습니다.
그는 샘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고, 프로도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
결국 프로도는 샘마저도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프로도는 신뢰했던 친구 샘에게
“돌아가 버려! 네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골룸의 최악의 배신은 프로도와 샘을
거대한 거미 괴물 ‘쉴롭’의 소굴로 유인한 사건입니다.
그는 프로도를 죽게 하고 자신이 반지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프로도가 거미에게 마비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듭니다.
샘이 프로도를 구해 냈지만, 내부에서 일어난 이 배신 때문에
프로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도 가리옷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가 아니어도 십자가의 길로 가시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냉랭한 사람보다 사랑하는 척하며 그분 곁에서 열성적이지 못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부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이끌며 로마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며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한니발 앞에서 로마는 마치 늑대 앞의 양 떼와 같았다.”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한니발의 모든 계획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무너졌습니다.
카르타고의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한니발의 성공을 질투하고 견제하며,
필요한 지원과 병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한니발은 계속해서 본국에 편지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지도자들은 이 요청을 무시하거나 지연시켰습니다.
결정적으로, 내부의 배신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 직전에 절정을 이룹니다.
카르타고의 정치 지도자들은 내부에서 협력하여 한니발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 로마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도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전투 후, 절망한 한니발은
“내 진정한 적은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의 정치가들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법치주의 국가였기에 결단력이 빨랐으나,
카르타고는 결정을 지연하고 일치하지 않으며 패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마치 아버지처럼 자상하다가도
탈영한 자에 대해서는 매우 무서운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이 탈영한 자의 목을 사정없이 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이 있고 나이 든 부모가 있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온 국민에게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냥 죄를 지어 자기만 지옥에 가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대통령 부부가 아무리 미워도
비행기 사고로 떨어져 죽으라고 하는 사제는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모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를 자신이 빠져도 되는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노력을 하지 않고 주일미사에만 열심히 나옵니다.
그러나 선교도 전쟁입니다.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빼앗깁니다.
한 영혼을 빼앗기는 것은 전쟁에서 한 민간인이 죽는 것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신앙인이 선교에 열정을 쏟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도 노력하지 않고 나만 혼자 신앙생활 하려고 한다면
역시 전체적인 사기를 떨어뜨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운 것은 삼키시지만, 미지근한 것은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하느님을 마음을 잡읍시다. 그분을 감동시킵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제 어린 시절 집집마다 가축을 키워 내다 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경험 많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닭을 잡을 때는 날개를 잡으면 끝이다.
토끼를 잡을 때는 귀를 잡으면 꼼짝 못한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으면 쉽다.”
그 대목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개는? 같이 사는 개들에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꼬리를 꽉 잡았더니 엄청 으르렁댔습니다.
개는 잡지 말고 그냥 쓰다듬어주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디를 잡아야 할까요? 손목을? 머리를?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그 어떤 부위든 신체 접촉을 아예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다만 사람은 마음을 잡아야 합니다.
감동을 줘서 마음을 사로잡으면 다 잡는 것입니다.
그 어떤 교육적 노력도 먹히지 않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해도 그 어떤 작은 변화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 즉 감동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은 때였습니다.
때로 마음이란 것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담길 때와 마음이 전혀 없을 때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과 사랑,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마음과 정성, 진정성이 당긴 기도는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 안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니 더 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형식적, 습관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기도 생활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적수들의 모함과 예수님의 반격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그분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분의 걸음이 빨라질수록 예수와 반대자들의 대립과 긴장은 고조된다.
적수들의 모함도 더 노골적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확실한 선택을 요구하신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23절)
오늘 대립의 발단은 예수께서 사람을 언어장애자로 만든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면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예수가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사주를 받아
마귀를 쫓아낸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베엘제불은 직역하면 ‘집주인’이란 뜻이지만, ‘오물의 신’으로 널리 쓰였다.
아마 유대인들이 이교도들의 神名을 경멸하려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자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반격은 3단계로 진행된다.
① 마귀가 마귀를 쫓아낸다면 마귀 세력의 內紛과 瓦解를 초래할 것이 뻔한데
아무리 마귀라 할지라도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할 리가 없다.
② 예수가 마귀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마귀를 쫓아내는 그 누구라도,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 자신들과 그 자식들까지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다른 어떤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면,
예수의 능력 또한 마귀와 별개의 것으로 인정해야 함을 피할 수 없다.
③ 힘센 자의 무장을 해제하려면 그보다 더 힘센 자가 요구되듯이,
마귀를 추방하는 데는 마귀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력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원문에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수들의 모함에 대한 예수님의 3단계 반격은 결국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음”(20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된다.
하느님 나라의 到來는 메시아의 도래로 실현되는 것으로서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는 때”(이사 35,6)이다.
따라서 벙어리 마귀의 구마는, 메시아 도래의 상징적 행위에 속한다.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驅魔하심은 곧 사람에게 인간 본연의 품위와 자유,
하느님 말씀의 傾聽과 發說을 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일을 예수께서 하신다면 그는 하느님이시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20절)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믿고 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그 어떤 힘도
하느님의 손가락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