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광개토왕 시기 후연이 고구려에 대해 공세를 퍼부은 기록들 (1. 400년 신성 남소성 함락 7백여 리 개척 , 2. 405년 요동성 침공, 3. 406년 목저성 침공 --최초 출처는 전부 진서 재기이고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서 이를 그대로 카피했지요) 이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점이 이상하여 (제가 아는 선에서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될지, 이것이 과연 후연측의 윤색이나 조작이라 생각할수 있는 부분은 없는 것인지 선생님의 고견을 여쭙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405년, 406년 침공은 결국 후연의 패배로 귀결되지만 유일한 승전 기사인 신성 남소성 함락 기사는 일전에 읽은 선생님의 명저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에서 후연 측이 고구려에게 공격받은 것을 의도적으로 축소 은폐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을 봤던 점이나 패전을 승전으로 왜곡한 몇몇 중국 기록 사례 (나당전쟁의 매소성 전투가 유명하지요) 를 봤을때 더욱 강하게 의심됩니다.
(사족이지만 모용선비와의 전쟁뿐 아니라 훗날 수당과의 전쟁도 그렇고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측 기록이 일방적으로 풍부하게 남아있고 고구려 측 기록은 훨씬 희박해서 후대에 전적을 따져볼때 고구려가 불리한 면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물론 중국 기록이나 광개토왕비문, 삼국사기 등에 실린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의 승전 기록도 상당수가 교차 검증이 되지 않을 뿐더러, 한국 고대사 기록에 대해 빡빡하게 교차검증 원칙을 적용하면 살아남는 기록이 얼마나 될까 싶긴 합니다만..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차검증이 안되더라도 전후 맥락이나 상황으로 보아 가능한 내용이면 대략적으로 신뢰하는 걸까요? 당시 고구려와 후연은 치열하게 교전중이었기에 후연이 고구려에 강하게 공세를 퍼붓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만...
졸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구려와의 전쟁 이전에 후연은 북위와의 참합파 전쟁의 대패로 타격받았고 난한의 전횡과 남연 분리로 더욱더 악화된 상태라 그런 피폐한 상태의 후연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신성 남소성 함락이나 목저성 요동성 공격같은 공세를 주도적으로 할수 있을지 의심스럽지요
그리고 중국측의 기록이 많고 고구려측의 기록이 부실해서 실증적인 자료입증에서는 고구려가 열세에 놓인 것도 맞지만
그러나 고구려 후연전쟁 연구에서 자료입증을 객관적으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관적으로 맞는 기록들끼리 단편적인 일괄비교론으로 결론내는 것도 또 하나의 왜곡된 설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기에 외교 전쟁사 같은 경우는 디테일한 객관적 검증이 필수이지요
고구려 후연전쟁에 관한 현재 자료들은 그런 디테일한 객관적 검증기본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수밖에요
교차검증에 무엇보다 객관성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400년 후연이 남소성을 공략한 기사에 대해서는 큰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400년 당시 고구려는 5만 대군을 남해안으로 보냈기 때문에, 요동 지역 방어력이 약화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상황을 후연에서 충분히 인지하고서, 공격했다면 고구려가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구려가 남해안 원정은 완전히 마무리짓지 않고(신라, 가야를 완전 멸망시키지 않은 것) 신라에 소수의 군대를 두고 철수한 것은 후연에 대한 반격을 고려한 탓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차 검증도 중요하지만,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서 사료가 거짓인지, 과장인지, 은폐인지를 판단할 수는 있습니다. 405년, 406년에도 후연이 고구려를 충분히 공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후연의 패배였습니다. 다만 이때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 굉장히 많은 은유적 표현으로 후연의 패배를 감추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정사]로 인정되는 사료들은 시대 상황, 사실의 출처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검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405년 후연의 목저성 공격 당시의 기록만 봐도 후연이 거란을 공격하다가 거란의 군세가 막강한 것을 두려워해서 대량의 치중대를 버리고 방향을 바꿔 고구려로 진격해서 목저성까지 공격했다는 등의 앞뒤 맥락이 맞지 않은 내용만 봐도 그렇네요 몇년전에 고구려에 정벌되어 타격을 받은 거란이 후연을 상대할 집단이 될수 있는지 그리고 거란이 강하다고 전쟁 취소하는 후연이 거란보다 강한 고구려를 공격한다는게 앞뒤가 맞는 얘기인지 이런 점들을 보면 고구려 후연전쟁 기록이 후연 중심으로 기술되어 이런 논리적인 모순으로 점철된 내용들을 수록할수밖에 없네요 405년 406년 후연의 고구려 공격 기록도 그런 성격에서 봐야될것 같네요 다만 405년 후연의 목저성 공격이 가능하게 만든건 404년 고구려가 공격한 후연 연군의 위치와 연관되지 않을까요
404년 고구려가 공격한 후연의 연군이 요서에 위치해 있었다면 후연은 수도 근방까지 고구려에게 털리는 씩의 중대한 타격을 당한 셈이라 이런 상태라면 목저성 공격은 물론 거란 공격도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 만리장성 이남의 현 베이징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고구려의 서쪽 전선의 대다수 병력들이 먼 연군 공격에 투입되었기에 요동 전선의 수비에 공백이 생길수도 있고 후연이 그 빈 공백을 노려서 목저성으로 오지 않았나 그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고대 로마의 2차 포에니 전쟁때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본토 이탈리아에 침입한 한니밭의 카르타고군을 제쳐둔채 카르타고 본토인 북아프리카로 침입하여 한니밭의 이탈리아 철수를 이끌어낸 것과 같이 후연의 목저성 공격을 보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