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 고구려비에서 새로운 판독된 글자로 알려진 영락7년세재정유( 永樂七年歲在丁酉)에 벌어진 397년 신라 매금에 대한
의복 하사 같은 내용
중원고구려비의 영락 7년 397년 신라 매금에 대한 의복 하사 내용에서 등장하는 광개토태왕의 태자가 논란의 중심이 될수밖에 없는데 광개토태왕의 태자라 함은 그 뒤를 이은 아들 장수왕이 유일하게 기록된 터라
광개토태왕의 아들을 장수왕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중원고구려비의 영락7년(397년) 광개토태왕의 태자가 장수왕으로 유력할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장수왕이 부왕 재위 18년인 409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고 기록하여 고구려비의 영락7년의 광개토태왕 태자가 장수왕이라고 할수 있을지 그 의문이 들수밖에 없지요
409년 이전까지 장수왕을 태자를 세우지 못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배치되는 것이라서 고구려비의 영락 7년의 기사에서 신라 매금에 의복 하사한 주체로 나오는 광개토태왕의 태자가 장수왕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렵고 고구려비의 광개토태왕의 태자가 사료에 나오지 않을 장수왕의 또다른 형제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지요 아니면 왕족에서 광개토태왕에게 입양된 사람일 가능성도 있고요
또 하나는 409년 이전에 태자가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고구려비의 영락 7년의 태자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꾸미는 대역 태자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는 법이지요 태자가 없는 상태인데도 고구려의 외교적 필요성의 일환으로 대역으로 태자를 만들어서 신라와의 외교를 전담케 했다는 점 일본의 카게무샤와 비슷한 의미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