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줄
김정경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빼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
2013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금쟁이, 날아오르다
최정희
그녀가 오늘 한쪽 유방을 들어냈어 무거워진 한쪽이 사면처럼 기울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 기울기를 가진다는 건 양팔저울 한쪽에 슬픔을 더하거나 덜어내는 것
가끔 또는 자주 비가 내렸어 그녀의 눈 속에 살고 있는 소금쟁이는 언제나 눈물의 표면을 단단히 움켜쥐었어 그렁그렁한 표면장력, 그 힘으로 소금쟁이는 침몰하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했어
오늘 그녀는 기울기를 가졌어 x축과 y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걸음을 걸을 때마다 가슴에서 눈물이 호수처럼 출렁였어 그녀는 비로소 너무 오래 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 남은 한쪽의 젖꼭지가 짓무를 때까지 오늘 울기로 했어
소금쟁이가 떠났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2013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 여자, 마네킹
강봉덕
때론, 패션도 종교가 된다
묵언수행 하는 그 여자
침묵으로 한 종파를 완성시킨다
그 종파의 교리는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
한 계절 똑같은 웃음이나 빛깔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계절에 이르기 전
그 여자의 설법은 고요하고 은밀하다
이 거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술에 걸리듯
그 여자의 짝퉁이 되기 시작한다
포교는 항상 중심에서 변방으로 퍼진다
짧은 치마처럼 간단명료한 표정
미끈한 팔다리로 사람들을 전염시키며
파격적인 노출도 교리가 된다
패션이 변할 때 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며 순종적으로 바뀐다
경기불황이 몰려오면
그녀는 더 화려하고 빠르게 변신한다
사라진 추종자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것은
침침한 눈으로 바늘귀에 실 꿰듯 힘겨운 일이지만
손바닥 뒤집듯 가벼울 수 있다는 듯
투명한 벽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 여자, 화려한 변신을 시작한다
나를 버린 사람들이 몰려든다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 할 때까지
2013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낮잠 훔쳐보기
양성숙
달아나려는 바쁜 오후가 아기의 손에 잡혔다
오가는 발소리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옴짝달싹 못한다
허공을 말아 쥔 채 공기까지 부여잡고,
요람 속에 깊숙이 빠져든 아기가
놔줄 기미 보이지 않자 풀 죽은 오후가 잠잠하다
찬찬히 탐색하는 눈길을 아는지
아기입술에 꼬리가 생겼다 사라진다
살짝 벌어진 살구꽃잎에 나른한 웃음이 고여있다
이백팔십일간의 비밀을 가득 담고 깊게 잠든 손
내막이 궁금한 커다란 손이 얇고 투명한 손가락을 열면
움츠러들며 더 힘껏 말아 쥐는 아기의 손
나팔꽃처럼 오무라든 주먹이 숨겨 논
아기의 비밀을 가만가만 펴보니
저항 없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는 아기의 손
돌돌말린 하얗고 긴 먼지가 살포시 누워있다
하얀 손수건이 조심조심 아기의 비밀을 캐내자
고스란히 따라 나오는
아기의 내력이 기록된 솜털뭉치들
천천히 한 올 한 올 닦아내면
다시 순서대로 접히는 미모사 같은 아기 손가락
작정하고 한 번 으깨보고 싶은 큼지막한 손이 꼬옥 감싸자
깨끗하고 까만 눈이 활짝열린다
그제야 정보가 누출된 것을 알았는지 맑게 웃는다
악착같이 감추지 못한 아기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공범을 밝히려 손을 뻗자
아기에게 잡혀 들통 날까 안달 난 오후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낮잠 속에서 깨어난 아기, 몸을 늘린다
양성숙 1968년 서울 출생, MERIX 학원 원장, 시마패·숲 동인회 회원
201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적도
조율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 부근쯤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
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내려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구인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속에서
적도는 옆구리 뜨거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에 엉킨 오르막길을
왜 이렇게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 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 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대
2013년 영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 지다
권행은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툭,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권행은 1962년 전남 광양 출생, 2006년 미네르바 신인상,
2012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작
고양이눈 성운
나온 동희
우주의 등고점들이 연결되고
연결되어 퐁퐁다알리아 만발한
손바닥을 본다
손바닥을 바라보는 일은
단 하나의 슬픔을 응시 하는 것
TV속의 한 아이가 오디션의 심사평에
갓 구운 빵처럼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의 왼손은 시리얼을 들추어 보다가
허풍스러운 그 중 하나를 놓치는 순간이다
어제 사랑스러운 루루가 죽었다
한 장의 종이에도 기록되지 않을 무성한 슬픔이 허공에 빛나고
오늘 아침엔 가판대에서
일회용 잡지를 집듯 간단히
그것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부턴 슬픔이 없을 것이다
이것들의 근성은 처음부터 슬픔이 아니었을 것
문은 닫아야만 나타나는 낡은 방 내부의
야광들은 한때 나의 위로였으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
지금은 창문들이 별 몇 송이를 내어놓고 저녁이 되는 시간
내 손바닥 중심에는
다알리아 붉은 색을 밀어내면서
날 응시하는 루루가 살고 있다
*고양이눈 성운- 용자리에 있는 행성상 성운
첫댓글 어두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시들이 눈에 띄네요...
신춘문예작품들을 일찍 접할수있어 감사드립니다..
저녁에 찬찬이 감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