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김남조
아슴한 어느 옛날
겁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도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샘솟는 그리움이라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 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 날에
가물거리는 보라빛 기류 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살에는/이외수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살에는
선잠결에 스쳐가는
실낱같은 그리움도
어느새 등넝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서
몸살이 되더라
몸살이 되더라
떠나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왜 그리 텅 비어 있었을까
날마다 하늘 가득
황사 바람
목메이는 울음소리로
불어나고
나는 유지처럼 부질없이
거리를 떠돌았어
사무치는 외로움도 칼날이었어
밤이면 일기장에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의 숫자만큼
사랑이라는 단어를 채워넣고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살에는
이제 가야만 한다/최승자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태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動詞)만으로도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 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네기 피어나리라.
서녘/ 김남조
사람아
아무려면 어때
땅 위에 그림자 눕듯이
그림자 위에 바람 엎디듯이
바람 위에 검은 강
밤이면 어때
안 보이면 어때
바다밑 더 패이고
물이 한참 불어난들
하늘 위 그 하늘에
기러기떼 끼럭끼럭 날아가거나
혹여는 날아옴이
안 보이면 어때
이별이면 어때
해와 달이 따로 가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한가지
서녘으로 서녘으로
잠기는 걸
석류/나희덕
석류 몇 알을 두고도 열 엄두를 못 내었다
뒤늦게 석류를 쪼갠다
도무지 열리지 않는 門처럼
앙다문 이빨로 꽉 찬.
핏빛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네 마음과도 같은
석류를
그 굳은 껍질을 벗기며
나는 보이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린다
입을 열어봐
내 입 속의 말을 줄게
새의 혀처럼 보이지 않는 말을
그러니 입을 열어봐
조금은 쓰기도 하고 붉기도 한 너의 울음이
내 혀를 적시도록
뒤늦게,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게
익숙지 않다/마종기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일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이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해질까.
왜 몰라/이장근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연꽃만 칭찬하지만
연꽃을 피울만큼
내가 더럽지 않다는 걸
왜 몰라
내가 연꽃이 사는
집이라는걸
왜 몰라
참 좋은 당신/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울기만 했어요/조운
바람 처불고 비 오든 간밤에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창에 젖는 빗방울 방울마다
님이 그리워서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바람소리 빗소리 물소리 속에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가는데
나는 혼자서 울기만 했어요.
풀꽃/나태주
자세히 보아야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詩,
꽤 많은 시들을 소개한 거 같네요. '왜 몰라' 라는 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읽을 적마다 그래도 아직 바닥이 아님을, 꽃을 품어낼 수 있음을, 깨닫곤 합니다. 시 모음 6편은, 1~4편까지 본문엔 없지만 여러분들이 댓글로 달아주신 좋은 시들을 제주관적으로 골라내어 올릴 생각입니다. 배경 음악은 키친 OST, '일년 후'의 전주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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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언니ㅠㅠ... 정호승 시인의 미안하다 읽다가 울어버렸네...........................ㅠㅠ.. 왜이렇게 아프니.. 싯구 하나하나가....ㅠㅠ
이외수 시 있는 시집제목좀 알수있을까?ㅜㅜㅜ
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너무 좋다....아름다워ㅠㅠ
이외수 시ㅠㅠㅠㅠㅠㅠㅠㅠ이거랑 풀꽃 너무 좋다ㅠㅠㅠㅠ
눈물이 줄줄난다ㅠㅠㅠㅠㅜㅠㅠㅠㅠ막 공감되는 구절구절이 날 토닥토닥해주는거 같아ㅠㅠㅠㅠ
언니 스크랩!! 아 참 좋당~~ 비도 오고...선선하니 읽어야겠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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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시시 베이베 베이베
왜 몰라랑 참 좋은 당신 너무좋다 ㅠㅠ 언니 글 첨 보는데 완전 짜장이야 이외수 샘것도 너무 좋고^.^!난 서정윤 시인 추천하고 갈게!!ㅋㅋㅋ암튼 넘 잘 읽고 가^_^*
아 댓글들도 너무 좋고....메일로 스크랩해갈게
언니 스크랩할게......................... ㅠㅠㅠ 좋다좋다ㅠㅠㅠㅠ
스크랩했어..ㅠㅠ 시가 이렇게 좋은건지 잘 몰랐는데 ㅠㅠ
왜몰라 진짜 좋다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치! 당신이 꼭 빼앗긴 우리나라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야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는데...
맞어.. 꼭 학교에서 배우는 한용운 시인이나 다른 애국지사 시인들 시에서 나오는 당신 뭐 이런 어구들은 다 독립으로 해석해 ㅡㅡ ... 진짜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해서 쓴거면 어쩌려고
개인적으로 왜 몰라랑 풀꽃 내 스타일임....... 저렇게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시 너무 좋음
고등학교 때 수능준비하면서 억지로 읽고 외우고 공부했던 시들....... 그 땐 진짜 읽어도 어렵기만 하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지금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음. 눈물 나게 하는 시도 있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시도 있고......
맞아! 수능과 상관없이 시를 읽게 되니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게 되는 것 같아!ㅋㅋ
시ㅠㅠ고딩때이후로 안본지 꽤된거같애....보면볼수록새롭게 보이는게 시인듯
지금 스무살이라서 그런지 이외수 시인 시 너무 와닿는다.... 언니 스크랩 해갈게!
마음아파 너무 좋다 ㅠㅠ....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
- 류시화 -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메일로 스크랩 해갈게요! 너무 좋다 시 하나하나
시도 좋고 음악도 좋다 ㅠㅠ
매번 스크랩하고 있어ㅠㅠ 근데 덧글에도 좋은 시가 너무 많아서.. 어디 천사같은 여시언니 댓글 하나 좀 달아줘요ㅠㅠ
g!
sjan whgdk...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해석하는'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 꼭 그렇게 '생각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ㅋㅋㅋ 보통 시를 읽고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건 시를 읽고 '느낌'으로 느낄수 있으니까.. 여러가지로 해석할수 있지만 그때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이렇게 생각하는 '수'도 있다..이렇게. 예쁜 시를 조각조각 분해해내면 느낌이 퇴보하는 건 맞지만 ㅠㅠ 시험이랑 결부되니까 더 색이 바래기도하고..안타까운 일이야 ㅠ 어쨌든 언니 시 잘 보고 있어!! 고마워요!
나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걸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는만큼 눈에 보이기 마련이니까ㅋㅋㅋ
하지만 해석을 해놓고서 그 '해석' 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그렇게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앜ㅋㅋ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저어 오오
이 싯구에서. 내마음은 호수요는 직유법이에요. 내 마음을 호수로 빗댄거에요^^ 호수하면 어떤 느낌이 떠어르죠?? 네 그거에요 내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거겠죠?
이런식으로 시인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내마음=호수. 호수의 의미 : 넓음. 아량.
이런식으로;; 공식화시켜서 한가지 답만 나오도록 가르치는 현재 교육체제는 문제가 있다고 봐 ㅋㅋㅋㅋ 호수를 보고 누군가는 넓음을 느낄수도 있고 누군가는 죽음을, 슬픔을, 기쁨을 맑음을 청아함을 더러움을 등등을 느낄 수 있으니까 ㅋㅋㅋ
응 모니카 언니 말도 맞어!! 언니 말처럼 정해진 해석을 배우는건 일종의 주입이라고 생각해.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을 해줘야 되는데 말이야 ㅠㅠ
스쿠랩 ㅠ
[시모음]짱이야ㅠㅠㅠㅠㅠㅠㅠㅠ
[좋은시들가득함] ㅠㅠ너무좋다
[가슴에 내려앉는 시 모음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