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수교 30년 한-중 관계의 진면목
광복절 기념식을 보았습니다. 기념식 중계가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리기 일쑤인데 이날은 대통령 축사 후반부터 끝까지 보았습니다. 광복절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멋지지 않습니까? 4개 국경절 노래 가사들이 모두 좋습니다. 왜 일까요? 물론 민족적 염원을 담았고 또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지었기 때문일 겁니다. 광복절, 삼일절 노래는 피를 끓게 하지만 제헌절, 개천절 노래는 차분하면서도 우리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등을 생각게 합니다. 요즘 애들 말로는 꼰대 중에서도 꼰대 학자들이 지은 가사인데 어떻게 이런 감성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나는 우리 사회가 싫어해 폐기처분한 암기/암송식 교육문화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순간적으로 그냥 스치는 인상을 중시하는 영상물에 함몰된 요즘 세태에 비해 고전을 수십, 수백 번을 읽어 암기한다는 것은 어휘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 미묘한 맛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수양이고 차원 높은 구도자적 교육이 아닐까요? 그냥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금년이 한-중 수교 30주년이군요. 수교일 8월 24일을 전후하여 학술 세미나 등 행사가 많네요. 며칠 전(8/12)에는 한중 외무장관 회담이 열렸습니다. 한국과 만나면 기고만장하던 중국이 한발 물러 선 듯 했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시원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하급 관리들도 (주한 중국대사는 북한주재 대사보다 한 급 아래인 외교부 국장급이나 그 이하일 겁니다.) 한국 정부를 우습게 알았지요. 마치 구한말 총독 행세를 하며 조선조정을 주무르던 원세개(袁世凱)같이 굴었습니다. 우리정부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내일 한국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겠다’느니, 중국 대사관이 느닷없이 ‘한국 기업 총수들 다 모이라’고 소집시키고, 또 xx ‘연구중심’이니 하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연구기관 소속 학자들도 한국 기자들과 학자들에게 호통 치곤했지요.
한중 외무장관 회담 수일 전 중국외교부장 왕이(王毅)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한자로 ‘왕이’를 찾을 수 없어 생각해 보니 우리말로 ‘이’가 아니라 ‘의’이군요. 중공군 10대 원수 중 한명이며 주은래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을 오래한 진의(陳毅)와 같은 ‘의’이군요. 왕이가 대만 문제를 두고 미국을 비난하면서 보인 표정은 가관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구/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끝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그의 표정은 단호함이 아니라 ‘제발 우리 말 좀 들어다오’라는 애절함이 한껏 묻어나더군요.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에서 읊은 ‘如怨如慕 (여원여모)원망하듯, 사모하듯, 如泣如訴 (여읍여소) 흐느끼듯, 호소하듯’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냉전시대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손가락을 하늘을 찌르면서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모습이 서방 뉴스 매체에 단골로 등장하곤 했지요. 오늘날 TV 앵커나 정부 대변인이 ‘중국의 국익을 해치는 행위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외칠 때 말투는 여전히 단호하지요. 그러나 이날 왕이의 표정이나 말투는 단호하기 보다는 애절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두 모습입니다. 약자에게는 거만하고 강자에게는 그렇지 못한 중국이란 말입니다. 신의니 대인배니 중국인들의 성품에 대한 찬사는 개개인에 대한 평가일 뿐입니다. 국제정치사에서 이같은 행태를 보인 국가는 러시아와 중국이 대표적입니다. 과거에는 독일도 그랬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호되게 당한 뒤로는 ‘정상국가’가 되었지요. 협상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면서 호통하고 허리에 찬 칼을 덜컹거리면서 공갈과 협박을 일삼지요. 외교란 상업적 거래와 같이 주고받기에 익숙해야 하는데 중국이나 러시아는 이런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2017년 2월 글방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짱’>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중국이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겁박하는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용기와 배짱(gut)이 필요하며 특히 중국과의 외교에서는 배짱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대통령 탄핵 후 대선 정국이 뜨거웠을 때였을 겁니다. 이 때 중국은 우리의 대선정국을 이용하여 사드에 대해 ‘3불1한’이란 원칙으로 압박해 왔습니다. ‘사드를 추가 않고’, ‘미국 미사일 방어 및 한·미·일 군사동맹에 불참’한다는 3不과 ‘기존에 배치된 사드의 운용을 제한’한다는 1한(限)입니다. 한국의 ‘주권’은 깡그리 무시한 망발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신문들은 성주에 있는 사드 부지를 공격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게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이며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 정도 협박이면 한국이 놀라 굴복할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중국정부는 뒤에 민간차원의 여론이라면서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요. 더구나 한한령(限韓令)이라 하여 한국 연예인들의 공연을 금지하고 중국민들의 ‘자발적’ 분노가 표출된 것이라면서 한국 상점과 상품들을 마구 부수었지요.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을 공격한 의화단과 같은 야만적 행위를 21세기에 정부의 묵인아래 재현한 것이지요. 치안, 그들은 공안(公安)아라 부르는 인민의 안녕과 질서를 기장 중시한다는 중국의 짓거리였습니다.
이것이 한국을 길들이는 중국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일단 협박하고 공갈을 해보는 것입니다. 영약3단(另約三端)이라 들어보셨을 겁니다. 구한말 시절인 1887년 7월 한국의 독립을 대외에 천명하기 위해, 특히 중국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합니다. 중국은 그 의도를 뒤늦게 알아채고 조선정부에 제시한 것이 소위 ‘영약3단’입니다. 1.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중국공사를 찾아가서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2.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중국공사의 아래 자리에 앉는다. 3.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듯이 중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이건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겁니다. 외교관은 주재국 외무성에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비로소 외교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연회장 배석은 주재국 입장에서, 예를 들어 대사급 사절, 공사급 사절 교환 혹은 외무장관 방문 등 필요에 맞추어 정하는 것입니다. 당시 한국사절단의 통역과 가이드로 동행한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후일 주한 미국공사)의 기록에 의하면 박정양(朴定陽) 공사는 겁을 먹고 중국의 요구에 순응하려 했다고 합니다. 알렌이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라면서 중국의 협박에 굴복하면 자기는 통역을 하지 않겠다고 위협하여 한국 사절단을 국무성으로 바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영약삼단은 이렇게 파기되었지요. 한국에서는 이걸 박정양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요. 박정양은 귀국 후 원세개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라는 말입니다. 안보는 항상 우리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사드 위기 당시 우리의 대통령 후보들은 모두 이를 외면했습니다. 이들이 단결된 자세로 단호히 맞섰다면 국민들이 이를 지지했을 겁니다. 대통령이 된 인간이 앞장서서 용기와 ‘배짱’으로 대응했다면 중국은 억지를 부릴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 세 후보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 같이 침묵했고 중국에서는 한국 상점을 공격하여 피해는 더욱 커졌고 오늘날 까지 중국은 ‘3불 원칙’이니 하면서 가당찮은 요구를 지속하고 있는 겁니다. 중국은 그들의 정책이 먹혀들어간다 싶으면 당근을 조금씩 주면서 적당히 수위를 조절합니다. 이건 2천 년 전 한국-중국 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해오던 수법입니다. 여기에 굽히고 들어가면 그 다음 부터는 몽둥이로 길들이는 강아지 신세가 되는 겁니다.
이번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은 사드문제를 두고 ‘3불1한’을 내놓았다가 한국 정치권과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자 하루 만에 물러섰다고 합니다.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중국의 3불 정책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지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어설픈 균형자니 중립은 국제정치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비빌 언덕을 만든 다음 당당히 맞서야 하지요. 왕이는 12일 신화사 통신 인터뷰에서 ‘(양국은) 미국의 사드 배치에 대해 포괄적이고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했으며 ‘상대방의 합리적 안보이익을 중시해 이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양국 관계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내놓은 답안지입니다. 중국은 그동안 중국이 취해온 대한(對韓)정책, 특히 지난 5년간의 한중관계를 검토하고 득실을 계산해 보았을 겁니다. 30년 전 양국이 국교정상화를 이룬 뒤 한국에서는 친중국적 정서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중국이 6.25 전쟁에 참전하여 나라가 두 동강이로 만든 사실도 잊어버리고 마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 중국의 역사나 이와 관련된 유적과 도시들, 그리고 시문 등 한국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중국에 대한 환상이 봇물 터지듯 했지요.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일본에 훨씬 앞섰고 미국과 비슷하거나 앞지를 정도였습니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2천년 한중관계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우위에 있어 우쭐한 기분으로 중국여행을 만끽하면서 즐겼습니다. 마치 역사가 짧은 미국인들이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휘졌고 다닌 것과 비슷했습니다.
이것이 사드사태로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때 중국이 보인 행태는 어떠한 합리성도 없는 너무나 역겨운 것이었지요.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완전히 역전되어 중국은 이제 한국인 80%가 싫어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6.25 전쟁 전후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며 비분강개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했습니다. 중국이 이걸 모르겠습니까? 사드에서 보인 중국의 대책은 단기적이고 졸작으로 중국의 진면목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과거와 같은 친밀도를 되찾기 위해서는 다시 30년, 아니 50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배짱을 갖고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국제정치에서 제국이란 그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양자관계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중국이 상대해야 할 국가나 지역이 엄청 넓고 많아졌지요. 한국은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선순위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지요. 수-당이나, 송, 명-청 시대 관리해야 할 주변들을 모두 고려하면서 한국정책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볼까요? 가장 중요한 미국과의 관계이며 그 외 문제들도 그 배후에는 모두 미국이 있습니다. 대만문제, 동남아에서 중국 해안을 이어지는 해상수송로(sealane), 미, 일, 영국, 호주 등 반중국적인 연합인 ‘콰드’에 대항하는 문제, 인도, 중동석유 문제, 러시아 문제, 그리고 티베트, 신강의 인권문제와 미국의 反중국 정책에 동조하는 유럽국가들에 대항하는 문제 등등.... 수없이 많습니다.
북한 핵문제조차 설 자리가 보이지 않군요. 미국과 손잡고 강경히 나선 한국을 윽박지르면서 다시 긴장을 고조시킬 필요성을 느낄까요? 5년 전 중국이 강조했듯이 사드가 중국의 안보에 치명적(vital) 전략적 문제이든가요? 그러니 한국을 한번 쿡 찔러 반응을 떠본 뒤 양보하는 체하며 물러난 것입니다. 5년 전 한국은 중국인 관광객 유커(遊客)들이 줄고 수출도 줄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기도 했지요. 세계 10위 경제력을 가진 우리의 경제능력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준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를 계기로 중국에 의존도가 높은 품목을 다변화하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교역은 또 win-win 게임지요.
그동안 한국 내에서 일어나는 반(反)중국 정서는 한중관계에 대한 우리의 미몽을 깨워 주었습니다. 중국이 본질적으로 어떤 나라인가, 특히 한국에게는 어떤 나라인가 그 실체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죠. 광복절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문’ 건립이 보여주듯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이제 남북한 관계에서도 이같은 미몽에서 깨어나길 기대합니다.(2022.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