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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의 시편들
一속물 시인들울 각성시킬 김철 시인
김용태
(시인, 문학평론가)
1
낚시꾼이 대어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피라미들만 걸려 올라오면 짜증스럽듯이, 평론가도 작품다운 작품울 못 만나고 탐탁찮은 시집들만 나날이 받았을 때는 짜증스럽다.
특히 금년은 봄인지 여름인지 계절을 즐길 겨를도 없이 나라가 초상집이 되어 허둥거리다가 낙목한천落木寒天, 일락서산, 또 한 해를 잃게 되었으니 쓸쓸한 마음 그지없다. 이런 감상적인 심사에 젖어 있는데, 며칠 전에 시집 한 권이 부쳐져 왔다.
김철 시인의 제3시집 『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이다. 김철 시인의 이름을 보는 것도 반가웠고, 시집의 제목이 그대로 한 행의 시로 읽혀져서 맛이 좋았다. 아, 시인이란 이름이 쓰레기통에서만 와글거리는 것이 아니고,잠자는 듯하면서도, 깨어 있는 시인이 아직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연말의 허전한 마음에 물기가 돌았다.
김철 시인은 시를 아는 시인들은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 나라 명문 부산고둥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공대를 나온 공학도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번역(영역)도 잘하는 시인이다. 일찍이 김수영金洙暎 선생에게 사사하고, 《대한일보》 시 부문에 박목월, 박재삼 선생의 심사로 당선되었으며, 이어서 《현대문학》 시 부문에 박두진 선생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이 나라 시단에 당당하게 데뷔했다. 그는 학력만 일급이 아니고, 문학의 본적도 ’문학의 서울대학‘이라 하는 《현대문학》이다.
그는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시인으로서 감성적이거나 낭만적인 모습보다는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공학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 개성이 뚜렷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공경하는 예의가 분명하고, 속깊은 사랑을 감추고 있어, 그의 시에는 간절한 사랑이 있지만 그는 이를 지성으로써 적절히 절제하고 있다. 이러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그를 좋아한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2
글을 쓰자니 앞의 말들은, 하나의 일으키는 말이었고, 이제 그의 시집의 시 몇 편을 이끌어 와서 그의 시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시집 제목 『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이라는 이 한 줄이 한 편의 시라고 내가 앞에서 말한 바가 있다. 그 이유는 조금 뒤에 말하기로 하고, 이 제목을 보니 윤동주 시인의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떠오른다. 즉 하나의 시집 제목에 명사가 네 개 들어가고, 또 접속사가 세 개 들어간다는 공통점 때문인 듯하다. 나의 다섯 번째 시집 제목도 『물•바람•안개•그 인연들』이다. 나는 접속사를 생략하고 가운데 방점을 하나씩 찍었을 뿐이지 역시 하나의 제목에 명사가 네 개 어울어진 것은 위와 같다.
여기서 살펴보면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서 ‘하늘’, ‘바람’, ‘별’은 서로 공간적 연관성이 있고, 나의 시집 제목 ‘물’, ‘바람’, ‘안개’도 서로 기류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김철 시인의 시집 제목의 ‘비’, ‘나무’, ‘하늘’, ‘땅’에 있어서는 우선 그 이미지 면에서 대립성의 인연을 가지고 있어서, 의미 면에 앞서서 대립적 회화적 동시성을 부여하고 있는 점이 재미가 있다. 이래서 이 자체가 많온 연속적 연상율 유발시켜 주고 있기에 한 줄 자체가 한 편의 시라고 한 것이다. 시란, 단어가 많아도 상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고, 단어가 적어도 상상이 많이 일어나면 훌륭한 시가 되기 때문이다.
‘대립적 동시성’이란 뭣인가. ‘비’는 내려오고 있고, ‘나무’는 올라가고 있다. 이것이 그 접속사의 효과로 함께 보여지고 있다. 서로 다른 사물을 함께 보는 재미를 단 한 자 ‘와’라는 접속사로써 조치를 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 접속사란 기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부속품이나 같은 것이 아닌가. 공학도가 기계를 조절하는 기술이 바로 언어를 조절하는 시적 재능으로 옮아 앉은 것이다. 비록 난해하기는 하지만 공학도인 이상李箱 역시 공학도적인 기계의 계산술이 언어의 배열술로 옮겨 앉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에서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공존시킨 점은, 이미지 면에서는 회화적인 재미가 있지만, 의미 면에 있어서도 다양한 생각을 일으키게 해주고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하강하는 ‘비’와 땅에서 하늘로 상승하는 ‘나무’는 그 모습과 작용은 서로 반대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상승하는 ‘나무’는 ‘비’로 인해서 그 작용이 가능한 것이고, 하강하는 ‘비’는 상승하는 나무로 인해서 그 효과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가 어찌 자연에서만 그러하랴. 인간사에 있어서나, 모든 사물에 있어서 음양陰陽은 언제나 대립적이면서도 그 대립으로 인해서 상생相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존재의 의미를, 우주의 원리에 부합시켜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과 ‘땅’을 다시 한 번 생각케 해주고 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용어로써 ‘진리의 말씀’을 하는 성구聖句와 같아서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비는 뿌리가 하늘에 있고/ 나무는 뿌리가 땅에 있네/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빨 리/ 나무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네 천천히/ 비는 나무를 온 몸으로 휘감고/ 나무는 비 를 온몸으로 껴안네/ 하늘이 비를 타고 땅으로 내려오고 빨리/ 땅이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네 천천히/ 뿌리가 뿌리를 만나 번개가 되고/ 뿌리가 뿌리롤 만나 우레가 되네/ 보 이지 않는 번개/ 들리지 않는 우레/ 하늘에서 내려온 비가 땅을 사랑하고 보이지 않게/ 땅에서 올라간 나무가 하늘을 사랑하네 들리지 않게
一〈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 전문
‘비’와 ‘나무’를 통해서 ‘하늘’과 ‘땅’의 상반된 존재와 만남의 조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늘’에서 땅으로 ‘빨리’ 내려오는 ‘비’에 대해서 대립적으로 ‘땅’에서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는 ‘나무’로써 ‘빨리’에 매몰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천천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나무’는 ‘빨리’의 ‘비’를 ‘천천히’로 바꾸는 여유를 보이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나무’는 ‘땅’을 ‘하늘’로 올려서 ‘땅의 뿌리’를 ‘하늘의 뿌리’와 만나게 한다. 그래서 ‘번개’가 일어나지만, 이 ‘번개’는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 ‘번개’요. 또 ‘우레’도 일어나지만 이 ‘우레’는 육이肉耳에 들리지 않는 심청心聽의 소리인 것이다.
천지조화의 철학적 이법理法을 ‘비’와 ‘나무’의 일상日常의 모습으로써 문학(시)을 만들어서, 다른 군소리 없이 쉽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시인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고, 진리를 사물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절감할 수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 내가 비가 되기도 하고, 또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하늘’과 ‘나의 땅’이 서로 만나 ‘번개’와 ‘우레’를 일으켜 준다. 꽉 막힌 무명無明의 구름장이 한꺼번에 홀락 벗겨지는 기적 같은 기쁨이 일어난다.
이 시인은 깊은 철학적인 문제를 시의 모습(비유)으로 보여주는 시를 여러 편 보여주고 있다.
〈시간, 그리고 공간〉이란 시는 정말 깊은 사유를 일으켜 준다.
1920년 2월 파리에서/ 조소앙이/ 시간의 처음이 어디뇨라고/ 물어도/ 공간의 끝이 어디뇨 라고/ 물어도/ 베르그송은/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이 공간과 한 몸이고/ 공간이 시간과 한 몸임울/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알았더라면/ 어떠했옳까// 그런 질문은 나오지도 않았을 테 고/ 답을 안 해도 부끄럽지 않았을 텐데//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없는 시간/ 안도 밖도 없 는 공간//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은/ 공간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도/ 시간이 아니 라는 것을// 아아 그 모두/ 이차원異次元의 그림자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시간율 불잡 고/ 공간을 붙잡고/ 맴율 도는 우리// 이제 죽어서/ 영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조소앙과 베르그송은 과연/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꿈에라도 그들을 만나/ 물어보고 싶고녀
一〈시간, 그리고 공간〉 전문
우라는 공기 속에서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잠시라도 살 수 없으면서도 ‘공기’를 잊고 있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 또 ‘공간’에 의지해서 살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위의 시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 문제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소앙趙素昻(1887~1958)과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1859~1941)이란 두 인물을 등장시켜서.
조소앙(본명 조용은趙鏞殷)은 불교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그는 불교, 유교의 지식이 해박했으며, 특히 원효元曉에 대한 경모심은 어느 불승佛僧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이미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도 충분히 소화하였을것이고, 이를 소화하자면 자연히 인도의 용수龍樹나 청목靑目이 시간의 문제를 깊이 관찰한 바를 모를 리 없었율 것어다.
용수는, 근대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보다 천 년도 더 먼저, 그의 블멸의 명저 『중론中論』의 <관시품觀時品>(시간을 관찰하는 장)에서 시간에 관해서, 서양의 그 어느 철학자도 따를 수 없이 사유하고, 논파하였다.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시간이란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이 현재 속에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는 것이다.”라고 논급하였고, 이에 대해서 3백년쯤 뒤에 역시 인도의 청목靑目이 이에 대한 해설올 소상하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앞의 시인은, 이러한 문제들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조소앙을 등장시켜 놓고, 그 다음에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을 갖다 붙였다. 왜 그렇게 붙였올까.
1922년,베르그송은 프랑스의 철학회에서 있었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강의에서 제시한 ‘시간의 개념’에 대한 질문으로 논쟁을 일으켰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헤어졌으나 그 후 그는,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사유한 결과, 『지속과 동시성』이라는 명저를 내놓기도 했다. 이 저서에서도 베르그송은 앞의 용수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영원한 지속”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하기에 용수의 시간관을 이해한 조소앙과 베르그송은, 말하자면 ‘시간학자’라는 면에서 서로 맞붙어 볼 만한 적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에는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赤無住”라는 게송이 있다. “한 생각으로 무한한 시간을 꿰뚫어 보면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머무는 것도 아닌 여기에 바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함께 들어앉았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베르그송도 논쟁만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한 것이 ‘시간’이고, 조소앙과 베르그송이 문답을 하다가도 답을 얻지 못한 것이 ‘시간’이고, 공기 속에 살면서도 ‘공기의 모습’ 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 ‘시간’이니 위의 시에서는,그래서 ‘꿈에서라도 지금쯤 영이 되어 있을 조소앙과 베르그송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누가 나에게 위의 시룰 가지고 와서 ‘시간’을 묻는다면, “시간이란, 너에겐 너의 시간이고, 나에겐 나의 시간인데, 나도 나의 것인 줄 모르고, 너도 너의 것인 줄 모르고, 조소앙도, 베르그송도, 용수도, 청목도, 다 모르면서 다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 다음, “위의 시를 자꾸, 자꾸만 읽어 보고 앞의 화엄경 게송을 꿰뚫어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시화詩化한 ‘마음’이란 시도 눈여겨볼만하다.
①육신에 깃든/ 허공
⓶그림자 없는/ 세계
⓷연緣이 오면 웃고/ 연緣이 가면 우는/ 기쁨과 슬픔의/ 골짜기
⓸눈 감으면 어두워지는/ 거울 속처럼/ 무한히 깊고 투명한/ 심연
⓹번개이듯/ 찰나적으로나마/ 거기 머물다 가는 것들까지/ 모두 사랑하고 미워 하다/ 보이지 않는 손길 따라/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마는/ 나그네 같은 그것
⓺바람 같은 그것
⑦있어도 없는 그것
—〈마음〉 전문
※연의 번호는 필자가 부여한 것임.
1연에선 마음올 ‘허공’에 비유했다.
여기엔 최소한으로 세 가지는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는 ‘마음이란 분명히 있기는 하다’이고, 두 번째는 ‘그러나 마음은 모양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런데도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어느 것이든 아니 들어가는 것이 없이 광대무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독자들도 작자도 평소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 빗대느냐(비유)에 따라서, 관념적인 것이 감각적인 맛으로 바뀐다. 시는 ‘맛’이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질 수도 없고 모양 지을 수도 없는 무한대의 ‘허공’을 ‘육신’ 속으로 이끌어 왔다. ‘마음은 육신 속에 깃든 허공’이라고 말이다.
제연을 우선 이렇게 일으켜 놓고, 그 다음을 꾸려가는 연들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화엄경’의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의 ‘유심게唯心偈’를 이끌어 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음이란 화가와 같다(心如工畵師)
세상의 모든 모습 다 그려내나니(能畵諸世間)
다섯 가지 감각의 작용에 따라 그 대상 생기어서(五蘊實從生)
무엇이든 만들어 내지 못함이 없네(無法而不造)
부처도 마음과 같아 그러하고(心如佛赤爾)
중생도 부처와 같아 그러하니 (如佛衆生然)
분명히 알라, 부처와 마음 그게 그것인 줄(應知佛輿心)
그 본체 모두 허공처럼 다함 없도다(體性皆無盡)
만약, 어떤 사람이(若人欲了知)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부처 알고자 한다면(三世一切佛》
분명히 우주[法界]의 본성이 뭣인지 관찰해 보라(應觀法界性)
그 모든 것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나니라.(一切唯心造)
이 밖에도, 유심게(마음을 표현한 시)는 더 많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만 보여도 앞의 시와 함께 놓고, ‘마음’ 을 마음에 담아 보기에 족할 듯하다.
화엄경의 핵심을 우리나라 조선 시대 묵암黙庵 최눌最訥(1717~1790)은 그의 『화엄품목華嚴品目』에서 “통만법通萬法 명일심明一心”이라는 여섯 글자로 압축해 놓기도 했다. 그만큼 화엄경은 ‘유심사상有心思想’의 원전原典이라고 할 만하다. 이 ‘유심’을 인도의 마명馬鳴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나눠서 해석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이 양자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 보배로움을 다 보일 수는 없고, ‘진여문’이란 “마음의 물과 같음”이요, ‘생멸문’이란 “마음의 파도와 같음”이라 하겠는데, 그러나 ‘파불이수波不離水 수불이파水不離波’(파도가 물울 떠날 수가 없고, 물이 파도를 떠날 수 없음)를 생각해서 ‘마음의 있음’과 ‘마음의 없음’을 독자가 자기 마음을 견주어 알아차리면 될 것이다.
말이 길다. 김철 시인의 앞의 시를 잊어버리겠다. 어서 가자. ②연은 다 알 것이니 뛰어넘고 ③연으로.
‘마음’ 이란 ‘부처’도 되고 ‘중생’ 도 된다는 것을 앞에서 보였으니, 부처가 오면 웃는 것이고,‘중생’이 오면 우는 것이다. 만남의 인연 따라 ‘웃음의 기쁨’을 짓기도 하고, ‘울음의 슬픔’올 보이기도 하는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이 깊은 ‘골짜기’ 를 누가 볼 수 있으랴. 그러나 담에 뿔을 보고 소가 있음을 알고, 뜰 앞의 매화를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우리는 알면 그만이다.
④연으로 가자. 마음은 ‘거울’이다. 언제나 밝은 제 모습 제가 지니고 있지만 눈 감으면 적막강산寂寞江山이다. 그러다가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물속’(심연)이 되었으니 어느새 ‘마음’은 ‘산골짜기’가 ‘깊은 물속’이 돼 버렸다.
또 그러다가 ⑤연에 와서는 그 물속에서 ‘나그네’(사람)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인연 따라 만나는 것,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다가 정처 없이 ‘훌쩍 떠나는 나그네’ 가 되니, 파도를 손에 잡고 보니 파도는 간 곳 없고, 물만 남는 이치가 다시 생각나게 될 것이다. ‘마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는 그 이치 말이다.
⑥연과 ⑦연은 각각 한 줄(1행)씩 ‘바람 같은 그것’(6연), ‘있어도 없는 그것’ (7연), 결국 ‘마음’은 ‘허공’으로 귀결됐으니 수미상환首尾相環을 이루어서, 이 시를 알아보는 사람이면 하나의 동그라미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마음’이나, 부처를 ○을 그려 표시한 선화禪畵를 종종 볼 수 있지 않은가.
까불지 말자. 천만 소리 다 지껄여도 소용없다. 마음은 역시 김철 시인의 ‘마음’을 읽어 보는 것이 독자들의 마음에 들어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김철 시인은 이 시집에서, 이렇게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오묘한 문제만 시화한 것이 아니고, 아주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시도 여러 편 보여주고 있다.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이제 그러한 시 한 편 더 보여 주기로 한다. 마침, 거리에는 은행잎이 낙엽으로 뒹굴고 있고, 서산에 걸린 해는 곧 기울게 되니 사람의 마음도 무상감에 젖어들고 있다. 하기에 이런 감성의 동반자가 되어 줄 시가 보이기에 이끌어 오기로 한다.
떨어지가 싫어도
떨어져야 하는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하는
너
아니면
나
—〈낙엽》 전문
이 시는 짧기에,시각적 효과를 위해서 행과 연을 원형 그대로 옮겨 본 것이다. 낙엽을 보면서, 우리 인생을 느낀다. 가기 싫어도 가야하고 늙기 싫어도 늙어지는 인생. ‘너’도 ‘나’도 다 낙엽으로 뚝뚝 떨어져 가고 있다. 무상감이 한충 고조된다.
이 밖에도〈단풍丹楓〉에서 ‘단풍’을 ‘이별의 불꽃’, ‘아름다운 만가輓歌‘로 표현한 것도 그렇고, 〈낙엽과 나〉에서 “낙엽을 보는 순간/ 내가 낙엽이 되고/ 낙엽이 내가 된다”는 표현도 다 같은 계열의 작품들이다.
지극히 지성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김철 시인의 가슴속엔 시적 감성이 깊이 들어앉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고,〈사랑법〉이라든지, 〈어느 시인의 무덤 앞에서〉라든지 하는 시들은 인간 본연의 감성들을 지극히 지성적으로 조율하여 보여준 시들이다.
이 글에서 여러 편들 다 이끌어 와서 이렇다 저렇다 할 수가 없으니 후일 내 사정이 허하면 ‘김철 시론’ 같은 본격적인 글을 한번 써보기로 하고 작품 인용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그치고, 결론으로 넘어간다.
결론이 뭣이냐. 별것 아니다. 낙엽이 뒹굴고,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세상은 못난 것들이 잘났다고 판을 치고, 시詩는 잡초의 혼돈 속으로 떠내려가고, 시인은 속물이 되어, 그것도 명예라고 패거리를 모아 설쳐 대고, 문학을 배운 족보도, 계보도 없는 엉터리들이 문인 제조소룰 차려 놓고 영업을 하는, 가소롭고 쓸쓸하고 허망한 세상에, 시를 알고, 시를 사랑하고, 시를 쓰는 시인이,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선물을 던져 준 것이다. 2014년, 한해를 보내면서 김철 시인이 우리에게 보내준 이 선물로써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시인이 살아 있고, 시가 꽃피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우리가 공감할 만한 자신의 시론詩論 〈우주와 별과 시정신과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한국시의 무질서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질타하고, 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시는 시정신의 소산所産이다. 시정신 없이는 시가 태어날 수 없다. 시심이나 시감으로도 얼마든지 시를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기장에 남겨놓을 자기만의 시일 뿐이 다.
자기만의 시가 아닌 시, 남과 공유할 수 있는 시, 즉 남을 진실로 감동시킬 수 있는 시, 번뜩이는 시, 살아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문재가 있어도 지성이 없으면 비록 시집 을 수없이 많이 발간하고, 문학상을 수없이 받았다 해도, 순진성울 잃은 (Sophisticated) 속물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의 생각올 대변해 주는 듯해서 더 실감을 했다, 이 시인이 말한 ‘시정신’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약간 거들기로 한다. 여기서 말한 ‘시정신’ 이란 다른 말로 하자면 ‘시적 지성’ 이라고도 하겠는데, 이는 예술을 만들어 내는 장인정신匠人精神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시인은 분명히 시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감성이 발로發露된 다음, 그것을 가지고 예술이 되도록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만들어 내는 정신 그것이 바로 ‘시정신이고 ‘시적 지성’이다.
김철 시인은 자신의 이 시론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소목장이가 만든 상자의 뚜껑과 몸체가 마지막에 ‘딱’하고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시 가 좋은 시” 라고 한 김수영金洙暎 시인의 말대로 ‘똑 소리 나는’ 시를 써서 저마다 나름 대로의 삶을 앓으며 지쳐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결코 뿌리가 부실하지 않은 시적詩的 꽃나 무를 깊이, 깊이 심어주기 위하여.(끝)
참 좋은 시론이다. 나는 목조 건물을 많이 지었다. 그래서, 시를 강의할 때, 우리의 전통 목조 건축을 이끌어 와서 시를 설명할 때가 더러 있었다.
목수가 나무를 깎고 다듬어서 갖다 물리면 딱 맞아떨어졌을 때 기쁨을 맛보지 않는가. 시인들도 시적 감성이 일어났을 때, 그걸 담을 말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찾아낸 말들을 다듬고, 맞추고,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고, 또 바꾸기도 하고 해서, 잘 맞추는 일이 바로 시를 짓는 일이다. 목수가 나무로 집을 짓듯이 시인은 말로써 시를 짓는다. 그래서 시를 ‘언어의 건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말을 마치자.
김철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가진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시인이다. 이번에 우리에게 보여준 시집 『비와 나무와 하늘과 땅』에 수록된 시편들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다. 나는 변변찮은 이 글로써 김철 시인의 시의 지어진 모습과 그의 시적 신념을 이 세상에 널리 알린다.(끝) [2014.년 12월호 『문학공간』 게재]
김용태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신라대학교 총장 역임 •(사)화쟁문화포럼 이사장 •시집으로 『물, 바람, 안개, 그 인연들』 외 다수 •평론집으로 『선적 상상력과 문예비평』, 『한국현대시의 불교문학적 연구』 외 저서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