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에서...
출발전의 불협화음
7월 24일 아침 9시,
지리산 장터목 산장 예약이 완료된 상태에서,
전날 야근을 하고 퇴근한 남편이 오후 늦게서야 출발할 수 있을것 같다고 한다.
우선은 잠을 좀 자야하고,
모부처 장관이 내려 오는데 언제 동원령이 떨어질지 몰라 오후까지 비상대기를 해야한다며...
전날 야근을 했으니 잠을 자는거야 당연하지만,
장관님 행차 때문에 비번자까지 동원할지 모른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버럭!
" 오늘밤 산장 예약 했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
" 오늘은 그냥 펜션에서 자고 내일 등산하면 되지! "
" 그럼 천왕봉 일출은 어떡하고??? "
" 넌 그럼 직장이나 남편 건강이 중요하지 천왕봉 일출이 더 중요하냐??? "
오후 1시 30분,
잠을 자고 일어난 남편이 직장에 전화를 걸어 비번자는 동원이 없음을 확인하고
지리산으로 출발한다.
' 휴~ 다행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리산에 도착하면 적어도 네 시는 될것이고 그 시간에 장터목 산장까지 가는건
무리라며 또다시 백무동 근처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일찍 등산할것을 주장하는 남편...
매사에 조심성 많고 신중한건 좋지만,
그렇게 가리고 따지고 재고 하다보면,
우리가족 지리산 천왕봉 등반은 좀처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난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아이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고,
남편이 산에 오르는걸 좋아할때까지...^^
출발은 조금 늦었지만...
오후 네 시,
네 시 이후에는 입산이 금지된 백무동 매표소를 출발하면서 장터목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원래 6시 까지는 산장에 도착해야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7시 이전에는
도착하기 힘들것 같기에 전화로 조금 늦을것 같다고 미리 얘기를 해 두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산장에 이르는 등산로는 초입에서부터 가파른데다,
흐린 날씨로 산속은 금세라도 어둠이 내릴것같은 분위기다.
초반부터 힘겨워하는 남편에게 처음 한 시간만 잘 견디면 그다음부터는
몸이 적응해서 그다지 힘들지 않다며 격려하지만 부담스러울만큼 많이 힘들어한다.
아무래도 한 시간도 못버티고 도로 내려가자고 할것 같아서,
앞서가던 두연이를 불러 세워 아빠와 함께 뒤따를것을 당부하고,
우연이와 함께 선두에 나섰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 시간쯤 올랐을까...
하동바위에서 첫 이정표가 나온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벌써 1.8km나 올랐으니 조금만 힘내라고 했더니,
같이가자며 한사코 기다리라고 한다.
15분 동안이나 기다려 넷이 뭉쳐 잠시 휴식을 취한뒤,
출발하면서 부터는 다시 우연이와 선두를 잡는다.
백무동과 장터목 가는길의 중간지점인 참샘에 먼저 도착해서 전화를 걸어,
조금만 올라오면 얼음물처럼 시원한 샘이 있으니 힘내라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샘에서...
참샘에서 시원한 물로 땀을 식히고,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길을 재촉하지만
참샘에서 부터는 급경사 오르막 길이라서 마음처럼 발이 나아가질 않는다.
왼쪽에 구름위로 살짝 드러난 엉덩이 모양의 봉우리가 반야봉...
반야봉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데...
아무리 갈길이 바빠도 저녁놀이 잦아드는,
이 아름다운 풍경앞에서 쉬어가지 않을수 없지않은가~
산장에서의 하룻밤
밤 8시...
지리산엔 이미 어둠이 내린 가운데 장터목 산장 도착~
서둘러 밥을 짓고,
미리 양념해간 불고기를 익혀서 막 허기를 달래려는데 산장에서 안내방송을 한다.
밤 9시에 소등을 할테니,
소등 이후에는 다른 사람 수면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하고
천왕봉 일출을 볼 사람들은 일출 1시간 10분전에 출발할것을...
안내방송이 끝나면서 등산객들은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고,
미처 산장을 예약하지 못하거나 야영 준비를 한 등산객들은,
밖에서 일행들과 한 잔 술을 나누기도 하는 가운데 우리 가족만이 늦은 저녁식사 하기에 바쁘다.
장터목 산장에서는 남,녀의 방이 따로 있는데,
나의 세 남자가 잘 방에 몇 안되는 남자들이 자고 있기에 나도 그냥 남편 옆에 낑겨서 자기로 했다.
여러 남자들과의 하룻밤~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다.
초반부터 어찌나 큰소리로 코를 골아대던지,
그 소리를 들으면서는 도저히 잠들 수 없을것 같았던 젊은친구의 코고는 소리,
처음 누울때부터 '아구구 허리야' 하더니,
자면서도 계속 잠꼬대를 하는가하면 이를 갈아대는 그 옆에 누운 또다른 젊은친구,
애기울음 소리를 내는 고양이 한 마리,
여기저기서 수시로 부스럭대는 소리,
잠들지 못한 누군가의 한숨소리...
하지만 나의 수면을 앗아간 가장 큰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았다.
배고프던차에 급하게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누운게 화근이었던지
두연이가 체한 것이다.
두연이에게 준비해간 소화제를 먹이고,
손과 발을 주물러 주면서 체를 내리느라 안간힘을 쓴건 나보다도 남편이 더 열심이었다.
평소 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빠의 자상함에
두연이 녀석 고생을 하면서도 아마 감동 먹지 않았을까...
그렇게 산장에서의 하룻밤을 쉬 잠들지 못하는 사이,
천왕봉 일출을 보기위해 나서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꿈결에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장터목 산장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아침노을...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리에 흑심을 품지않은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 물방방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따라
온몸을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시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싶다면
언제 어느곳에서나 아무렇게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시인은 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지리산에 몇 번이나 올랐을까...
삼대가 적선을 해야만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비록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아침 햇살 받으며 제석봉을 지나 천왕봉 가는 길엔,
밤새 고생한 두연이 손을 잡고 야생화와 꿀벌과 대화하며 걸을 수 있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제석봉의 야생화
제석봉 고사목
2006년 여름 휴가는 이제 끝났다.
마지막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이 비 그치면 본격적인 불볕 더위가 시작될 테지만 내게 남은 휴가는 없다.
하지만...
그토록 염원했던 지리산 천왕봉 가족등반을 무사히 마쳤고,
출발전의 불협화음과는 달리 해냈음에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나의 여름휴가는 그 어느때보다 풍요롭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름 휴가를 다녀오느라 좀처럼 결석하지 않는 별뜨락에도 며칠 결석 했습니다.
별뜨락님들 아직 휴가 안하셨죠? 아무쪼록 즐겁고 풍요로운 휴가 보내시기를 바랄게요.^^
첫댓글 초록님, 안 그래도 며칠 보이지 않아서 휴가 가신 줄 알았지요.. 끌어주며 밀어주며 천왕봉에 우뚝 선 초롱?님의 세남자의 모습을 한참 봅니다..천왕봉 표지보다 더 자랑스러워 보입니다..함께 떠난 가족여행에서 두연이의 복통으로 더욱 진한 가족애,..무사히 다녀오심을 반기며,..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선물(글과 사진..^^* )에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늘 건강하세요..^^*
목적성하기 위한 집착 대단합니다,,,하지만 저는 남편의 기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조직 생활 하다보면 마음따라 몸이 가질 않는다는 사실을,, ,, 여러 남자들 숲에서 보낸 찐한 여름휴가 거웠겠다
그저...부럽다.^^* 초록님의 맑은 지혜가...
초록님, 잘 봤어요. 고맙고요.^^
초록님..가족..,사랑,,,찡하구요,,,천왕봉,,한국인의 기상,,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야~~~~~~~~~! 멋지네요~~~, 님의 고집(?)에 천왕봉 오르신 옆지기님이 아마도 두고두고 고마워할것 같네요~~~ 가족 사랑의 그 아름다운 마음이 찐하게 느껴집니다. 행복은 가꾸고 다듬고 지키는 것이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