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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활동지원사 권리를 찾아서(전국활동지원사노동조합)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연재> 22. 전신마비장애인, 그리고 보험설계사로 일한 10년
코난 추천 0 조회 142 14.11.12 10:3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동해 망상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며...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운동을 좋아하지만 선수가 될 만큼 잘하는 운동도 없었다. 살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꿈도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큰 고민도 하지 않았다. 때가 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구해 회사를 다니다가 군대를 갔다 오고, 다시 회사를 다니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하는... 남들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나도 그저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 아닌 목표였다.

 

그런데 그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 욕심(?)이었을까? 물질에 대한 큰 욕심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산적도 없는데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인이 되면서 평범했던 하루가, 평범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바뀌고 말았다.

 

차라리 팔을 다쳐 두 손을 못 쓰거나, 허리를 다쳐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전신마비장애는 손도 발도 쓸 수 없기에 문 밖을 나서고 싶은 자유마저도 없었다. 그래서 방안에 누워 세상과 단절된 채 1년이 지나고, 다시 1년이 지나면서 육체적인 장애보다 점점 깊어지는 정신적인 장애라는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그로 인해 자유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방 안에 누워 5년의 시간을 보낸 끝에 보험설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비록 하루에 8시간, 주 5일, 한 달에 110만원이라는 돈을 주고 얻은 자유였지만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자 큰 행복이었다.

 

어렵게 되찾은 평범한 일상의 자유, 그러나 영업을 못해 실적을 못 채워 돈을 못 벌거나, 나를 도와줄 활동보조인을 구하지 못 하거나, 심한 합병증으로 인해 장기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어렵게 되찾은 평범한 일상의 자유는 언제든지 물거품이 되어 깨질 수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상쾌한 아침, 바쁜 출근길, 직장에서의 업무, 따스한 햇살, 파란 하늘, 친구와의 즐거운 만남, 퇴근길 동료와의 술 한 잔... 건강하다면 누구나가 누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하루의 일상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써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에게 사기를 당해도, 한겨울 추위에 부들부들 떨어도, 무리하게 일하다가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도, 매달 마감 때 실적을 채워야 하는 스트레스가 쌓여도. 방광염이 심해 고열에 시달려도 나는 그러한 고통보다 어렵게 되찾은 일상의 자유를 또 다시 잃을까봐 언제나 전전긍긍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고자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7년 9월부터 우리나라에도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활동보조제도가 도입되어 정부로부터 월 80시간의 활동보조서비스를 지원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전까지만 해도 사비로 월 110만원을 주었는데 50만원이 줄어서 그나마 큰 도움이 되었다.

 

사고 당시 산재도 자동차보험 보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보험영업으로 번 돈의 대부분을 활동보조인 월급으로 써야 했다. 다치기 전에 국민연금에 가입해 있어서 장애인이 된 후 장애연금으로 매달 50만원 정도 나왔는데 장애연금과 보험영업으로 번 월급을 합치면 월 평균 150만원 정도 되었다. 그래서 활동보조인에게 월급을 주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버티곤 했는데 가끔 실적이 모자라 월급을 적게 받을 때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활동보조인 월급을 주고, 다음 달에 좀 더 열심히 영업을 해서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갚기도 했다.

 

그렇게 내 인생은 언제 다시 떨어질지 모르는 외줄타기와도 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인생은 흐르고... 삶은 파도친다.

 

삼성화재 보험설계사 10년차...

 

2012년 9월, 30년 가까이 살았던 정든 이천을 뒤로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정년이 되어 목회자를 은퇴하시면서 그나마 지방보다 장애인복지가 잘되어 있는 서울로 이사를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서울로 이사하고, 바로 활동보조인을 구해서 보험설계사를 계속했다. 그런데 오래된 장애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가 먹어서인지 자꾸 컨디션이 떨어지고, 합병증 중에 하나인 방광염이 수시로 생겨 몇 번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보험설계사를 계속하려면 돌아다니면서 영업을 해야 하는데 컨디션이 떨어져 기립성저혈압도 심해지고, 방광염 때문에 수시로 치료를 받다보니 보험설계사를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상태로 너무 무리를 하다보면 몸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 영업하는 것을 자제하고 우선은 자동차보험 갱신건만 하다가 몸이 조금 좋아지면 다시 영업을 해야지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장님께서 영업실적이 낮아 이 상태로는 보험설계사 코드를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했다. 나도 이 상태로는 보험설계사를 계속한다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장님께 말하고 보험설계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2003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보험설계사를 하게 되었고, 한 해 한 해 버티다보니 2013년 11월, 정확히 만 10년을 채우고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은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활동보조인제도가 있어서 보험설계사를 안 해도 언제든지 문밖을 나올 수 있지만 활동보조인제도가 없었던 10년 전만 해도 문밖을 나서는 것조차 힘들어 방안 침대에 누워 우울하게 살아야 했다.

 

10년 동안 어렵게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 번 돈의 대부분을 활동보조인 비용으로 써서 모아둔 돈은 없지만 그 대신 언제든지 밖을 나서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어서 힘들면서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합병증으로 인해 몸이 점점 더 안 좋아 지지만 그래도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싶다.

 

그러나 그 마저도 나에겐 욕심일 수도...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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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1.12 20:47

    첫댓글 아 정말 좋은 글이에요. 저도 열심히 살아야 할텐데 흠..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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