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아래 구례 천은사[ 泉隱寺 ](전남사찰)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
구례 천은사[ 泉隱寺 ]
천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입니다.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로서, 828년(흥덕왕 3) 인도에서 온 덕운(德雲)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여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하였습니다. 그 뒤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건하였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로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의 전화로 완전히 불타버렸으나, 1610년(광해군 2)에 혜정(惠淨)스님이 중창하였고, 1679년(숙종 5)에 단유(袒裕)선사가 중건하여 천은사라 하였습니다. 절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합니다.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나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습니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보물 제2024호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팔상전(八相殿)·응진당(應眞堂)·칠성각·삼성전(三聖殿)·첨성각(瞻星閣)·감로전·불심원·회승당(會僧堂)·보제루(普濟樓)·방장선원(方丈禪院)·종무소·일주문·수홍문(垂虹門) 등이 있습니다. 또 문화재로는 보물 제924호 극락전아미타후불탱화·보물 제1340호 괘불탱(掛佛幀), 보물 제1546호 금동불감(金銅佛龕), 보물 제1888호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보물 제1889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및 대세지보살좌상(大勢至菩薩坐像) 등이 있습니다. 한국의 명찰 다큐가 제작될 당시 1995년경의 지리산과 천은사 인근 마을, 그리고 사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덕운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루가 창건하였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뒤 875년(헌강왕 1)에 보조선사가 이곳에 주석(駐錫)하면서 중축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 2)에 혜정대사가 중수하고, 1679년(숙종 5)에 단유대사(袒裕大師)가 복원하였는데, 1773년(영조 49)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775년에 혜암이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바꾸자 그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현재 2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법당인 천은사 극락보전은 다포양식을 갖춘 화려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천은사 극락전 아미타후불탱화(보물)는 18세기 한국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은사 [泉隱寺]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