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수채화
눈을 뜬다. 보통 새벽 4시 30분에 핸드폰 시간 맞춤을 해 놓는데, 아까 시간 맞춤 음악이 나왔을 때 그냥 끄고 다시 잠을 잤다.
오늘은 그냥 늦잠을 자고 싶어서다. 직장에 다니느라 항상 바쁘게 사는데 모처럼 맞는 휴일은 게으르게 살고 싶다.
다시 눈을 떠보니 여섯시를 지나고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평소의 습관이 있어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까지 잠자리에 있지 못 하니, 이것도 직업병인가 보다.
쌀을 씻어서 밥솥에 밥을 앉혀 놓고는 집을 나선다. 3개월전 새로 이사온 아파트는 처음엔 낯설었으나 이제 천천히 정을 들이고 있다.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 이 동네에 왔을 때 처음엔 막막했다. 먼저 살던 집은 큰 대로 옆이어서 항상 밝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데, 이 곳은 외져서 저녁이면 상가 불빛 하나도 없이 적막하여 남편이 늦게 들어 올때는 혼자 있기 어려워서 괜히 쏘다녔다.
그러다 집뒤에 작은 암자로 가는 길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같은 예산에 살아도 그 암자에 간적은 언젠가 초파일때 순례삼아 절을 찾은 딱 한번 있을 뿐이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암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올라 가려고 했으나 그때 마침 길가에 묶여있던 개는 얼마나 요란하게 짖으며 쫓아 오는지 갈 엄두를 못 내었다. 한두달 후 휴일날 낮에 천천히 올라 가보니 극성맞게 짖던 개는 개 집에 들어 앉아서 조게 손님인지, 도둑인지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마침 뜰에 계시던 비구니 스님께 인사드리고 앞 아파트에 이사왔는데 오고 싶어도 저 개때문에 못온다고 하니 스님이 깔 깔 웃으시며
" 쟤는 겁이 많아요, 사람이 오면 도망가요" 하신다. 그러고보니 그렇게 극성맞던 그 개가 쭈삣거리며 한 쪽으로 도망가는게 아닌가!
" 에라, 이눔아, 괜히 너를 무서워 했구나" 때릴 것 처럼 주먹을 쥐니 얼른 제 집으로 도망간다.
이렇게 가기 시작한 작은 암자는 특히 비구니 스님이 두분 계셔서 편하고 좋았다. 새벽에 기도 하고 나오다가 잔디나 주위밭에 풀을 뽑기도 하고 늙은 소나무엔 집에 남은 막걸리를 갖다 주기도 한다. 또 아래 주차장처럼 쓰는 노는 땅이 있어서 호박을 심어도 된다고 하셔서 장에 가서 호박모를 사다가 세개를 심었다. 그러니 비가 안 오면 물도 줘야 하니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아파트를 나와서 암자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꽃 향기가 와락 다가온다. 아파트를 둘러싼 이팝나무와 아카시아 꽃 향기다. 가는 이슬비가 안개처럼 내린다. 암자로 가는 길은 벚꽃나무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어서 초봄에는 벚꽃이 또 흐드러졌었다. 암자는 산이랄 것도 없는 작은 산자락 아래 위치하고 있고 그 너머로는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요즘에 웬만하면 절도 크게 짖는데 왜 이리 가난한가 했더니 땅이 남의 땅이어서 증축을 하지 못한다며 "언젠가는 땅을 사서 잘 지을 수 있겠지요" 하신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소박한 암자가 나에게는 딱 맞는다. 평소에 시골에 전원주택을 원했던 나는 내 정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혼자서 시골 전원주택 관리 하기도 어려운데 스님들이 관리하시니 더 정갈하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요사채 뒤에 있는 작은 법당에 들어간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셨던 보살님들은 가고 없는 법당에 조용히 앉아서 금강경을 독송하니 참으로 마음이 평안하다. 요즘엔 매일 절에 와서 기도하는 셈이다. 좀 일찍 일어나면 한시간 거리의 향천사에 가고, 좀 늦게 일어나면 이 암자에 와서 기도한다. 법당에 조용히 앉아 있으니 처마에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가 피아노 소리처럼 아름답다. 빗소리에 섞인 풍경소리는 사물놀이에서 꽹가리처럼 자연의 소리들을 리드하는 것 같다.
법당을 나오니 하얀 마가렛꽃이 무리지어 인사한다. 엣날 여학교 뜰에 피었던 하얀 마가렛........마가렛꽃을 보며 같이 교정을 거닐었던 영자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떠오른다. 가끔 통화만 하고 자주 만나지 않으니 더 옛날 여학교때 소녀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그애도 많이 늙었을테지......." 하고 생각해본다. 잔디밭 한쪽에 높다랗게 서 있는 소나무에 집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준다. 소나무가 허연게 영 생기가 없어 보인다. 언제든 신암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한통쯤 사다가 푹신 취할만큼 드려야겠다고 생각한다.
마당 입구에서 법당을 향해 다시 한번 합장한다.
비 내리는 작은 암자...........
정말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다.
첫댓글 산자락님 마음이 연꽃처럼 청아하니 다가오는 수필에서 단아한 삶의 수채화를 느끼고 가요.예쁜글도 보시여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