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金東洙(광복군) (1916 ~ 1982) 】 "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장 ”
1923년 아버지를 따라 상해로 가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김구(金九)·장졔스[蔣介石]의 합의에 따라,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특설된 훈련반에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 등 한국인 훈련생 90여 명과 함께 입대하여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 사관으로 군무를 수련하였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난징[南京]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8년 3월 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김인(金仁)·이하유(李何有) 등과 함께 중국인을 포함한 약 50명의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 점령 지구인 상해에 파견되어 정보수집·선전·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1939년 11월 한국 청년만으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 해 겨울 이해평(李海平)·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을 이끌고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 루안[潞安] 방면으로 가서 중국인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1940년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내에 한국청년훈련반이 특설되자, 송호성(宋虎聲)·박기성(朴基成)과 함께 구대장(區隊長)으로 임명되어 일선공작에 필요한 군사훈련과 외국어 등을 가르쳤다.1941년 12월 광복군 제5지대 간부로 산시성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적 후방공작 및 유격전을 전개하고, 정보수집 및 광복군 초모활동을 하였다. 1942년 3월 지대장 나월환이 대원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군에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5월 충칭으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 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임시정부 중화대표단 동북특파원 자격으로 교포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귀환을 돕다가 1948년 6월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연대장·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9월의 독립운동가 김동수(金東洙) 선생
(1916. 12. 6 ~ 1982. 2. 20)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부대장으로 적 후방 교란작전을 전개하고, 한국광복군 제5지대 부지대장으로 병력모집과 선전활동을 전개한 김동수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강화에 세거한 양반가문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인 1923년, 선생의 부친은 자유로운 선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교육의 상징인 인성학교를 다니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갈 수 있었고, 화랑사 등 각종 소년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인성학교와 공시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 이후 중국 내에서 벌어지는 학생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34년경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윤봉길의거 이후 독립전쟁의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연마하는 한편, 김구가 조직한 특무대에 들어가 반일운동에 참여하였다.
낙양분교를 졸업한 선생은 1936년 중국군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다음 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남경에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선생은 피난 중의 임시정부 등 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이후 선생은 나월환 등 한인 청년들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였다. 전지공작대는 전방인 서안으로 가서 초모 및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때 초모된 한인 청년들은 후일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중경에서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1년 1월 선생이 소속되어 활동하던 전지공작대는 혁명역량의 집중이라는 대승적 견지에서 광복군 제5지대로의 편입을 결정하였다. 선생은 신설된 광복군 제5지대의 부지대장 겸 제1구대장이 되어 초모, 선전, 정보수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아울러 새로이 초모한 대원들에 대해서는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청년반을 특설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선생은 1945년 4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산하에 조직된 토교대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일종의 보충대라고 할 수 있는 토교대 임무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선생은 중경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선생은 한국독립당 감찰위원,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교포의 생명, 재산의 보호, 안전한 귀국을 주선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8년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