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論介) 유사(遺事)
임진년(1592) 10월의 큰 승리 후 1593년 6월 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이 이끄는 왜군에게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논개(論介)는 신안주씨(新安朱氏)로서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애첩(혹은 內室)으로 알려져 있다. 최경회가 전라도 장수현감으로 있을 때에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논개 모녀를 관아로 데려와 돌봐 주었는데 최경회가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게 되자 그를 따라 진주로 왔다고 한다. 왜군이 진주성을 유린하고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에 의분한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벌인 주연에 기녀로 참석하여 술에 만취한 왜장 게야무라(毛谷村)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이때부터 논개가 떨어졌던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19살에 결행한 이 거룩한 의절(儀節)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譚.1622년)에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고 간단한 기록만 남아있기 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논개가 태어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命碑(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가 있다.
論介에게 정표(旌表)를 내려줄것을 청하는 崔鎭漢의 상소문 -1726년 승정원일기
慶尙左兵使崔鎭漢疏曰, 伏以臣愚陋賤品, 決拾末流, 地分卑微, 見識窾啓, 鞅掌職事, 尙且區畫之不暇, 瀆擾宸嚴, 何敢僭妄之自干乎? 唯是尙節慕義之心, 顯忠遂良之誠, 所素蓄積于中, 而不肯自後於人矣。玆將隱卒之微忱, 敢陳燭幽之聖鑑, 伏願殿下, 澄省而採納焉。중략
且臣嘗閱柳夢寅所著野談一冊, 有曰論介者, 晉州官妓也。當萬曆癸巳之歲, 金千鎰倡義師, 入據晉州, 以抗倭, 及城陷軍散, 人民俱死, 而論介, 凝粧靚服, 立于矗石樓下峭巖之前, 其下萬丈, 直入波心, 群倭, 見而悅之, 皆莫敢近, 而獨一倭, 挺然直前, 論介, 笑而迎之, 遂抱其倭, 直投于潭, 彼官妓淫倡也。而視死如歸, 不朽於賊, 渠亦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賊, 無他, 忠而已, 猗歟哀哉。夢寅, 以文章名, 爲此傳, 頗詳密, 臣每讀至此, 未嘗不擊節, 而嗟異之, 及到晉營, 矗石之下南江之上, 果有峭岩, 而義巖二字, 大刻其上, 臣訪於古老, 則乃是論介殺身殱賊之處, 而其所傳說, 頗與古記無異, 臣見其巖而聞其說, 不覺義膽之自激也。噫, 當時之亂, 屈節賣身者, 不知其幾何人哉, 而孰謂一娼妓, 能辦士君子所難乎? 昔者薜仁杲降將旁地仙之復叛也。有王氏女, 取地仙所佩刀, 因刺地仙而斃之, 詔封崇義夫人, 以旌其義, 夫論介之所成就, 詎下於王氏之後哉? 嗚呼, 野記一編, 芳名昭載, 蒼巖半面, 義字不爛, 而泯沒至今, 獨無旌美, 此不但賤臣之所歎惜, 實是南士之共咨嗟者也。如臣愚賤, 地卑言微, 前日再啓, 俱未得行, 則事不當更爲煩瀆, 而且臣所管事務蝟劇, 凡於恤軍賑飢之方, 尙未自遑, 則誠知此等事, 不急於目前, 非關於分內, 而猶且不避猥越, 妄自論列者, 哀彼諸臣一妓之取義抱冤, 而旣無子孫之呼籲, 終絶天聰之登徹, 故不容泯默而止, 玆敢冒昧而陳, 伏願殿下, 勿以人廢言, 特於卄一諸臣, 均施贈職之典, 官妓論介, 亦加旌表之章, 用慰抑鬱之魂, 以爲激勸之方, 不勝幸甚, 臣無任激切屛營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當初區別, 必有委折, 義巖雖存, 野談所記, 何可憑信, 且百餘年之事, 似難輕擧, 而卿之欲褒忠烈之意, 嘉矣。其令廟堂, 稟處。
晉州義妓祠記 - 정약용 여유당전서
婦人之性輕死。然其下者。或不耐忿毒。幽鬱而死。其上者義不忍汚辱其身而死。及其死。槪謂之節烈。然皆自殺其軀而止。至若娼妓之屬。自幼導之以風流淫蕩之物遷移轉變之情。故其性亦爲之流而不滯。其心以爲人盡夫也。於夫婦尙然。矧有能微知君臣之義者哉。故自古兵革之場。縱掠其美女者何限。而未嘗聞死節者。昔倭寇之陷晉州也。有妓義娘者。引倭酋對舞於江中之石。舞方合抱之。投淵而死。此其祠也。嗟乎。豈不烈烈賢婦人哉。今夫一酋之殲。不足以雪三士之恥。雖然城之方陷也。鄰藩擁兵而不救。朝廷忌功而樂敗。使金湯之固。失之窮寇之手。忠臣志士之憤歎恚恨。未有甚於斯役者矣。而眇小一女子。乃能殲賊酋以報國。則君臣之義。皦然於天壤之間。而一城之敗不足恤也。豈不快哉。祠久不葺。風雨漏落。今節度使洪公。爲之補其破觖。新其丹碧。令余記其事。自爲詩二十八言。題之矗石樓上。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 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情)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 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夫婦)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君臣)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美女)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倭寇)가 진주(晉州)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倭將)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義節)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功)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城地)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사(祠)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새었는데, 지금의 절도사(節度使) 홍공(洪公)이 부서진 것을 고치고 새롭게 단청(丹靑)을 칠한 다음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자신은 절구(絶句) 한수를 지어 촉석루(矗石樓) 위에 걸었다.
祭義妓祠文 - 위암문고
嘻吁乎睠晉陽之佳麗兮, 擅形勝於域中, 鳳岑秀而峨峨兮, 藍水逵而溶溶, 鐘地靈於人物兮,若冀北之多騄駬, 猗名公與巨卿兮, 固炳耀於靑史, 夫惟一美人兮, 邁從古而莫與比, 旣蕙心而紈質兮, 又蘭芳而玉潔, 當龍蛇之風雨兮, 宇縣震盪而潰裂, 哀衆人之蕩折兮, 擧鳥獸之竄穴, 偉美人之秉義兮, 辦丈夫之所難, 輕鴻毛於一瞬兮, 取熊魚於百竿, 悤珠轉而自沈兮, 非象罔之可求, 曰捐生而成仁兮, 又何怨而何尤, 矗之樓兮巍巍, 樓之下兮深潭, 一片石兮可語, 至今名以義巖, 羌江流而石不轉兮, 若有人兮江之渚, 故立祠於江上兮, 夫惟靈脩之所也, 月黃昏兮風凄凄, 雲慘慘兮雨冥冥, 山哀兮浦思, 猿嘯兮鶴鳴, 搴芳洲之杜若, 採芙蓉兮折楊柳, 奠瓜顆兮荔子, 雜肴蔬兮椒酒, 更千秋與百世兮, 靈不昧而名不朽。
論介祠銘幷敍事
板蕩殉節丈夫猶難况匹婦乎從容捨命脅勒猶難况故赴乎阨窮處義自謀猶難況殺賊乎以一身而幷三難者亙萬古惟義妓一人而已嗚呼壯哉妓名論芥晋陽人當壬辰城陷之日誘賊將河羅並飮酒於巖上乘賊況醉抱墜于江事 聞㫌而祠之其後二百年星州人鄭蓍慕其義拜于祠後爲嘉山郡守遇賊不屈而死世間一種烈氣盖無間於男女而亦可見於無事時也銘曰 有石巖巖烈烈其名鴻毛泰山孰重孰輕花飛玉碎于 國有光聞聲却軍膽落夷羌其姊亦烈一種深井百世聞風凜乎心冷乃如之人女中紀信芳魂在水滔滔不盡春秋苾芬廟宇斯輝勳嵬可紀義炳靡虧愧死陵律夫也堂堂匹婦卓節展我東方磨而不磷涅而不緇我來作銘瞻彼遺祠
義妓論介碑 (논개의 비석 앞에서) - 황현 매천집
楓川渡口水猶香。濯我須眉拜義娘。蕙質何由能殺賊。藁砧已自使編行。長溪父老誇鄕產。矗石丹靑祭國殤。追想穆陵人物盛。千秋妓籍一輝光。
신내 나루는 냇물이 지금도 향기로워 깨끗이 세수하고 의낭에게 절을 하네
향초 같은 몸으로 어찌 적장을 죽였을까 낭군이 이미 항오에 들게 했기 때문이라
장계의 노인들은 제 고향 출신임을 자랑하고 촉석루 단청에는 나라 위한 죽음을 제사하네
생각해 보면 선조 때에는 인물이 많았는지라 기적에도 한 줄기 빛이 천추에 발하였네
論介者晋州官妓也當萬暦癸巳之際金千鎰倡義之師八據晋州以抗倭城䧟軍敗人民俱死論介凝粧靚服立于矗石楼下峭巖之巔其下萬丈卽入波心羣倭見而悅之皆莫敢近皆一倭挺然直進論介笑而迎之倭將誘而引之論介遂抱持其腰直投于潭俱死壬辰之亂官妓之遇倭不見辱而死者不可勝記非止一論介而多失其名彼官妓皆滛娼也不可以貞烈稱而視死如不汗於賊渠亦聖化中一物不肯背國從賊旡他忠已矣
賊入城爭掠州妓美女有論介者故盛粧而媚之賊將悅而狎之與遊矗石樓巖上論介乃抱賊將投崖而死
義妓歌 三首 (김택영 소호당집)
晉州妓有曰論介者。宣廟癸巳。日本將陷晉。招妓游前江大石上。酒酣妓抱將落江俱死。余旣訪其祠。因爲詩揚之。
江水羅裙碧。江花魂氣遲。願收江裏骨。千歲傍要離。
孤石春風厲。荒祠蘚色滋。至今江上女。照水正蛾眉。
愛娘眞珠舞。愛娘錦纏頭。我來問芳怨。江水無聲流。
論介巖 - 古今堂集卷之一○海東續樂府 / 晩醒文集卷之三
壬辰之亂晉陽城陷倭酋登矗石樓置酒張樂有妓論介者才色殊絶酋愛之因要酋至江上危巖歌舞興闌遂抱酋投江而死江水萬仞深江巖千丈直魂來江樹綠魂去江雲黑明眸晧齒若有人羅袖裔裔江之干江之干兮不可留上有百尺高樓壯士忠魂髮衝冠生不欲被汚鱗介誠爲辱等是死殲一倭酋尙賢已莫道壹倭少人殲壹倭倭且休堪笑昭君臥毳幕生得胡雛添漢憂步出闉闍曲井井黃蘖塢英英刺桐花冶豔當窓戶千家錢樹子歌笑爭春姸妾生墮䯱髵寄身娼樓邊芳年屬破苽多姿最可憐天性苦貞諒欲罷不能忘門前白馬客押坐飛瓊觴强顔酬數語萬杵心頭撞使君一何催小酌喝朱捧凌兢步華筵擧止多錯迷歌嚨澁欲絶舞袖垂每低日晩徑出辭頗遭官長詆天步厄辰巳醜虜長蹂躪衣冠辱俘擄廟都隨灰燼日夕倚柱念蛾眉攢脩劍孤城乏儲胥坐失金湯險哀哀六萬人同日爲猿鶴頑酋據胡牀縱酒恣讙謔騃渠牝牡性挑撻肆淫黷一劍諒非難經瀆竟何益作計乃爾立忻然隨俯仰高樓正不韻江石洵訏廣願言攜手去徜徉窮曛旭癡奴魂已銷隨語聲應諾危巖陡戌削上可容盤礴下有千仞潭流睇澹淸漣强忍嚴閃意近身稍向前緊緊抱其腰用力儵擧趾渢渢萬丈下吾與爾共死醜骨餌鮫鰐香魂侍龍宮龍宮達于海遙與浿江通浿上有義妓剚刃奴腹中 謂華月妓 菁江淺如泓浿水西北流絶代而佳人姱節名不休
義妓傳 - 西溪集卷之六
晉陽城外大江之上有石矗矗而立此矗石樓之所以得其名者而石大四五圍高三四丈下臨深湫上砥而平可坐六七人而書其前面曰義巖卽義妓判命處而義妓者 論介也萬曆癸巳六月晦日賊陷晉陽城城陷而無復可爲者論介喟然曰國事至此生不如死然徒死無益豈爲 ▩瀆之諒哉以凝糚盛服登義巖彈琴而謌酋長喜而來遂嫣然而迎與之舞舞將半抱賊投江而死諸賊大驚欲救之已無及矣賊喪其帥犬亂奔潰城復全上聞之命立義妓之閭閭在義巖北數十步許嗟乎士讀書講明義理平居談論莫不自許以忠臣烈士而及一朝遇事變未免徘徊於死生之閒不能決然於熊魚之分卒爲天下後世笑者種種焉彼無知一賤娼之能憂社稷扶綱常含笑臨江視死如歸了無纖毫顧惜之意而又其奇謀祕策出於人意慮不到殲賊魁於乘勝方張之際振士氣於敗衂殘傷之餘捐一縷而爲南方數百年收復根基者此果前古史所嘗有者乎吾欲招李璥白士霖輩而告之
義巖碑記 - 明菴集卷之四
柳於于夢寅野談曰論介者晉州官妓也當萬曆癸巳之歲金千鎰倡義之士入於晉州以抗倭及城陷軍散人民俱死論介凝粧靚服立于矗石樓下峭巖之上其下萬丈直入江心羣倭見而悅之莫敢近獨一倭挺然直進論介 笑而迎之倭將以誘而引之論介遂抱持其倭直投于潭俱死壬辰之亂官妓之遇賊不見辱而死者不可勝記非止一論介而多失其名彼官妓皆淫娼也不可以貞烈稱而視死如歸不汚於賊渠亦聖化中一物不忍背國從賊無他忠而已倚歟哀哉云此出於當時實錄則今於刻碑之辭不必爲疊床之語故仍以刻之係之以銘曰獨峭其巖特立其女女非斯巖焉得死所巖非斯女烏得義聲一江高巖萬古芳貞
논개(論介) - 卞榮魯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불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끝)
[출처] 논개(論介) 유사(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