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의 경이로움에 관하여…신간 '김혜순의 말'
김용래입력 2023. 6. 22. 08:00
현대시 지평 넓혀온 시인 김혜순의 삶과 문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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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신간 '김혜순의 말'은 40여 년간 몸, 고통, 여성성 등에 관한 시 작업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혀온 김혜순(68) 시인을 젊은 후배 황인찬(35) 시인이 인터뷰한 기록이다.
'글쓰기의 경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육체, 고통, 죽음, 타자성, 억압, 여성으로서의 글쓰기 등 그의 시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주제 의식들을 시인의 생애와 겹쳐서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김혜순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정리한 세 권의 책을 언급하면서 이를 '생체시학'으로 정의했다. 여성으로서의 몸, 육체성에 기반한 시학으로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를 감지한다"고 그는 표현한다.
문학의 강렬한 첫 체험으로 꼽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한때 강은교·이승훈의 시를 즐겨 읽고, 보들레르의 시와 니체의 아포리즘을 직접 번역해가며 공부한 일, 평소 즐기는 힙합 음악과 영화, 미술 작품,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들에 대한 소회 등 김혜순의 삶과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담겼다.
문학청년들에게 시 창작과 시론을 가르쳐온 그에게 선생(先生)이란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먼저 죽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까지 있어 온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이제까지 없었던 것을 발명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인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오랜 시간 재직하며 지금은 고인이 된 오규원, 최인훈 등 기라성 같은 문학의 거물들을 동료 교수로서 가까이서 지켜본 얘기들도 흥미롭다.
"최인훈 선생님이 관념적이고 추상적 단어를 선택해서 이야기를 하시면 오규원 선생님은 아주 간략하고 묘사적이고 구체적인 단어로 그 말을 받아쳤지요. 소설가와 시인이 어쩌면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반대 영역의 언어를 구사했지요."
김혜순의 시편들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독자라면 그의 시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험하기 전에 이 안내서를 일별하고 출발하면 여행길이 좀 더 즐겁지 않을까 한다.
마음산책. 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