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네가 아니란 걸 안다/ 한기수
너는 엄마와 포옹을 하고 나는 네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보고 헤어질 때 네 눈에 흐르는 그 모습을 애써 보이지 않으려 했지 공항에서 광주(廣州) 까지 오는데 수십 번 눈을 훔쳤다
스무 시간 이나 걸린다는 뉴욕 행 어미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린 아이는 무슨 영문이나 알고 가는지 수 억 만리 지구 저편에서 열 네 시간이나 늦은 시차로 네가 낮일 땐 나는 밤이고 내가 낮일 땐 너는 밤이겠지
괴도를 타고 도는 세월 몇 년이 될지 몇 십 년이 될지 알 수도 없겠지만 그 아이 앞날을 생각하면 너도 네가 아니란 걸 안다
어차피 한 세상 인륜은 인륜대로 천륜은 천륜대로 흐르게 두자 네가 늙고 네 아이가 아범 되는 일 세월이 만들 것이고 우리에겐 그 세월이 선생님이 될 것이다
- 너른고을문학 17집(한국작가회의 광주지부, 2012) ....................................................
예전에는 고시 패스하여 관직에 나설 때, 해외로 유학길에 오르거나 근무지를 옮길 때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은 물론 조상님의 묘소를 찾아 고하는 것이 자식 된 당연한 도리이고 후손으로서의 마땅한 예절이었다. 심지어 6~70년대엔 며칠 해외출장을 나가는 경우에도 조상의 무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이 있었다. 비행기 타고 물 건너 나가는 일 자체가 지금처럼 흔치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해외여행자유화가 전면 시행된 1989년 이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 찍은 인증 샷 사진 한 장이 남들 앞에 자랑거리가 되었다.
자유의사에 의한 해외나들이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으니 해외여행은 선망의 대상이고 로망이기도 했다. 외국을 이웃집 드나들듯 하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크다. 내가 KAL에 입사한 이듬해인 1983년부터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2백만 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1회 유효한 관광여권을 발급해주기 시작함으로서 최초로 관광목적 해외여행이 허용되었다. 해외여행은 이제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로선 특권층의 전유물이었고, 방귀깨나 뀌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에서는 연봉과 복리후생 면에서의 유리함에 더하여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로 해외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인사발령이 나면 미주지역에 근무하는 직원 가운데 자식 교육 등을 이유로 꼭 몇 명씩은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주저앉곤 했다. 아직도 해외근무를 여전히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90년대 이후로는 사정이 많이 바뀌어 인기가 시들해졌고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해외근무자가 국내근무자보다 승진 등에서 불리한 여건에 놓여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해외 명문대로 유학을 떠나야 하고, 글로벌 시장 환경에 부응하는 스펙을 쌓으려면 해외근무 경험이 필수코스이다. 대학의 교수나 연구직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잘난 자식을 둔 부모로서는 거의 이와 같은 이별을 겪게 된다. 공항에서 헤어져 뉴욕으로 떠난 시인의 아들 역시 아버지에겐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별이 못내 서운타. 손자를 포함한 아들가족이 아주 멀리 가버리는 오랜 이별이 되지 않을까 두렵고, 천륜으로만 그 세월이 흐를까봐 가슴 먹먹하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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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