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산(山)속에 홀로 떨어져 사는 '저절로'이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있고 걸려오는 전화(電話)도 하루에 몇 번(番)씩은 있어서, 매일(每日) 매일(每日)의 생활(生活)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유별(有別)나게 다른 점(点)이 없는데; 어제는 어찌된 일인지, 하루가 끝나 어두워지고 밤이 되도록 전화(電話) 벨(bell) 한 번도 울리지 않고 찾아온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었기에, 기르는 강아지와 '나비' '잠자리'들과 함께 계곡(溪谷) 물소리와 '산(山)새'소리만 듣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느낌을 가진 것도 아닌 채 무념무상(無念無想) 속에서 지났다고나 할까......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때문인가?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고려(高麗) 말(末) 3은(三隱) 가운데 한 분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한시(漢詩) 한 수(首)였습니다.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내산조어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개울가에 초가집 지어, 한가히 홀로 사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 즐거움이 넘친다. 손님이 찾지 않아도, 산새들이 속삭여주고 대나무 언덕으로 평상을 옮겨, 누워서 글을 읽는다.
[참고]
길재 (吉再 / 1353∼1419)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호는 야은(冶隱) · 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海平). 시호는 충절(忠節). 고려 말(高麗 末) 삼은(三隱)의 한사람으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다. 1383년(우왕 9) 등과하고, 1387년(우왕 13)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이듬해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교육(敎育)했다. 1389년(창왕 1) 노모(老母) 봉양(奉養)을 이유로 귀향(歸鄕)하여 선산(善山) 임천(林泉)에서 은거(隱居)했다. 그 뒤 '고려왕조'가 멸망(滅亡)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져 1400년(정종 2)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職)을 내렸으나 두 왕조(王朝)를 섬길 수 없다고 사퇴(辭退)하고 선산(善山)에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진력(盡力)했다. 저서(著書)로는 《야은집(冶隱集)》 《야은속집(冶隱續集)》 등(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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