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샤를르 드 푸코).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정말 우리의 신앙이 부족함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도끼에 찍히는 순간 나타납니다. 진짜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힐수록 도끼날만 상하게 합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이지만 도끼에 찍힘으로써 진위가 판가름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내 건강이나 물질이나 뜻이 찍히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스스로 훈련하지 않는 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기는커녕 가장 결정적인 순간 추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베드로의 호언장담입니다(13:37, 마26:33, 막14:31, 눅22:33). 베드로는 예수께서 체포되시는 순간 고백만으로 그치지 않고 동산에서 칼을 뽑아 휘두르며 군사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처럼 홀로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독립을 가져다줄 정치적 메시야 되심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던 능력으로 그들을 쓸어버리실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군대와 맞선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눈앞에 벌어진 일은 주님께서 무기력하게 결박을 당하시고 대제사장의 뜰로 끌려가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신념이 찍히고 꿈이 꺾이며 계획이 부서지고 희망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17, 25, 26~27) 베드로는 세 번의 물음에 부인으로 일관했으며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였습니다(마26:74). 결정적인 순간에 그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의뢰해야 하는 베드로는 상황만을 보고 자기만을 의지함으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추악한 배신자가 되었고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내 존재가 찍히고 부서지는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빛을 발하는 성도가 돼야 합니다. 이 사회는 비판으로 세워지지 않고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밝아질 것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자신의 집으로 끌려온 예수님께 평소 제자들에게 가르친 교훈과 내용을 고하라고 심문합니다(19). 주님은 대제사장이 그의 가르치심에 트집을 잡기 위함임을 잘 아셨기에 당신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라 하십니다. 그때 하속 한 명이 답변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손으로 때립니다(22). 이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폭행이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서 뵙는 행운을 누렸음에도 주님께 폭력을 행사한 최초의 패역한 인간이 되었고 회개조차 하지 않는 비참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님께서 서 계시는 그 뜰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결국에는 주님을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그것 역시 하속과 다를 바 없는 주님에 대한 폭력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난받고 돌아가실 것을 여러 번 예고 하셨지만, 그는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을 듣지 않고 흘려버렸기에 이 순간을 준비하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한 때는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난 후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하였습니다(마26:75).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지 않는 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도리가 없습니다. 나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이 세상이나 환경은 절대 개선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나의 환경이듯, 그들에겐 내가 그들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바로 세우지 않고 주님을 부인하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핍박하던 로마제국이 그로 인해 세워지는 새로운 나라의 역사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