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년의 주택법과 철거민의 구원
박창수(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
먼저 용산 참사로 희생된 여섯 분의 유족 여러분께 삼가 조의를 표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필자가 철거민을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것은 지난 1997년 12월이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필자가 몸담았던 ‘새벽이슬’이라는 기독교학생모임에서 기도회가 있었다. “성탄절을 맞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논의하며 기도했다. 한 자매가 TV에서 본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을 이야기했다. 충격적인 강제철거 과정이 방송된 마을이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기독교인인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분은 예배를 못 드린 지 오래되었다고 하시며, 정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언제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울타리 밖 교회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때부터 약 6개월간 마을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군용 천막 안에서 일요일마다 저녁 예배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드리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철거민 마을을 방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시간 전쯤 철거용역소장이 왔다. 추기경과 언론사 기자들의 방문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소장을 보자 한 할머니가 거칠게 가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소장이 천막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밀어내려 하였다. 그 와중에 소장이 발길로 어머니뻘 되는 그 할머니를 거의 이단 옆차기로 걷어찼고 할머니는 나뒹굴었다. 소장이 큰 소리로 주민들을 협박하고 돌아간 다음, 한 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소장이 일전에 와서 철거민들을 협박하면서 사용한 사시미 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철거용역회사가 바로 당시에 철거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적준’이었다. 철거반에게 두들겨 맞아 마을 아저씨들은 대부분 갈비뼈 하나씩은 부러져 있었고, 아주머니, 할머니들도 몸이 성한 분이 없었다.
연세가 80세 정도 되신, 그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믿음이 깊은 분이셨다. 그 아드님이 철거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이셨고, 연세가 60세 가까이 되셨다. 할머니가 우리를 좋아하셔서 비닐집으로 몇 번 찾아뵈었는데, 아드님이 교회를 안다닌다고 걱정하시곤 하셨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비닐 집안으로 외풍이 너무 심해서 어떻게 할머니가 이런 곳에서 견디실까 걱정스러웠다. 건강을 여쭈어 보았더니, 외풍 때문에 추워서 온 몸이 아프다고 하셨다. 아는 한의사 선배에게 한방진료를 토요일마다 해 줄 수 있는지 부탁드렸다. 그 선배는 기쁨으로 해 주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정말 기뻐하셨다. 그 선배는 진료를 해 드리며 간간이 예수님을 전하였다.
두 번 정도 서울 동부 지법에 갔다. 법정에 선 위원장 아저씨와 판사와 재개발조합-건설회사 측 변호사를 보았다. 판사는 나이가 지긋하였는데 철거민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하였고, 양측에 원만한 합의를 주문하였다. 상대편 변호사는 무기력해 보였고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모습이었다. 주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생각했다. 판사가 앉은 자리에 주께서 좌정하실 것이요, 탐욕에 눈이 멀어 힘없는 이웃들을 내쫓는 데 가담한 자들은 모두 피고석에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어느 주일 저녁, 어르신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몹시 경직되어 있었고 긴장하고 계셨다. 주민들이 가수용단지(임대아파트 입주권과 더불어 세입자 철거민의 핵심요구사항으로서,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기 전에 아파트 공사기간 약 2-3년 동안 주민들이 지낼 수 있는 단지)를 요구하기 위해 세운 임시 천막을 허물기 위해, 다음날 철거용역반이 들이닥친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염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기로 결심했다. 예배 중에도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늦은 밤 홀로 천막에서 내일 피 흘리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였다. 마을에는 천주교 도시빈민사목위원회로 기억되는데, 거기에서 파송한 수사 한 분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 수사님의 숙소에서 함께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가수용단지 건설 촉구를 위해 세운 임시 천막 옆 공터에 모여 앉은 주민들 집회에 참석하였다. 철거용역소장이 철거반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천막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갑자기 소장에게 달려들었다. 온 몸으로 소장과 충돌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전에 소장에게 발길질을 당한 그 할머니였다. 또 다른 아주머니들이 소장과 철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에는 참으로 선한 마음씨를 가진 기독교인 아주머니도 계셨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철거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참으로 유순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대화 나누던 분들이었는데, 철거반을 보자마자 눈빛이 말 그대로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며 온 몸을 던져서 육탄으로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눈빛과 모습에서 이 분들의 마음의 상처와 한이 얼마나 깊은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의 격렬한 저항에 소장과 철거반이 일시 후퇴하였다. 격렬한 저항이 자칫 유혈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묵도하고 발언 기회를 요청하여 주민들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가 미국 남부로 가져가려고 하는 운동은, 외부의 물리적 폭력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정신적 폭력, 곧 증오심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철거반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지 말라고 간곡히 요청 드렸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등 뒤의 철거반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랐고,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면 그냥 맞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고민되었다. 마음 한편에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 ‘그래. 저항하지 말고 주민들과 철거반의 가운데에서 그냥 맞아 버리자’ 하고 마음을 정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소장이 조직부장 아저씨와 협상을 한 것이다. 소장과 철거반 역시 철거민들과 더 이상 충돌하고 싶지 않은데, 자기들을 고용한 재개발조합-건설회사가 가수용단지 천막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서 그것을 허물어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니까, 일단 자기들이 천막을 조용히 쓰러뜨리고 사진을 찍어 갈 테니, 자기들이 간 다음에 바로 다시 천막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들은 일단 명령대로 허물었는데, 나중에 주민들이 또 세운 것으로 하면 자기들도 재개발조합-건설회사에 할 말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그날 피를 흘리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내 마음을 아는 마을의 조직부장 아저씨로부터 이 세상이 얼마나 비정한지를 듣게 되었다. 이 분들이 철거민 문제 해결을 위해 언론사에 취재를 요청하면 기자들이 하는 말이, “피를 흘려야 보도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직부장 아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게,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피 흘리고 싶지 않고 다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기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점에서 피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기자들만의 비정함일까? 피가 흘려지기 전에는 가난한 이웃들의 울부짖음에 주목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잔인함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예배드리던 군용 천막은 백열전구 하나가 있었고, 나무장작으로 불을 때는 난로가 한 가운데, 그리고 군대 내무반처럼 출입구 좌우로 높은 평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 분들을 위해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강하고 충만하게 임재하셨다. 많은 집회에 참석하였지만 이 천막에서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임하신 경험은 드물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목적은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희년(禧年)을 선포하기 위함이라는 말씀(누가4:18-19)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희년의 주택법
희년법은 참으로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 경제법은 크게 네 가지인데, 토지법, 주택법, 대부법, 노동법이다. 이들 법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법은 토지법이다. 토지법의 기초 위에 주택법과 대부법과 노동법이 서 있다. 토지법이 준수되면 다른 법들도 쉽게 준수될 수 있고, 토지법이 무너지면 다른 법들도 지키기가 매우 힘들게 된다. 희년의 토지법의 원칙은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 보장’, 줄여서 ‘평균 지권(平均 地權)’이다. 토지법이 주택법의 기초라는 원리를 현대 한국 사회의 철거민 문제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평균 지권(토지 가치 공유)-->토지불로소득 원천봉쇄-->토지불로소득(재개발 이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을 노리는 재개발 시도 소멸-->철거민 발생 예방, 곧 주거권 침해 방지
이 글에서는 주택법을 상고하지만, 주택법과 토지법의 깊은 연관성, 곧 주택법의 기초는 토지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토지법과 노동법에 대한 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졸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희년의 주택법은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원칙은 ‘만민의 주거권(住居權) 보장’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성 안의 도시 주택법’이다(레위25:29-30). 사고 판 지 1년 안에 판 자가 무르지 않으면, 산 자의 영원한 소유로 확정된다. 이 규정에 대한 해석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나그네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의 정착을 장려하고 그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이 규정은 그들 가운데 나그네들과 개종자들이 와서 정착하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런 사람들이 가나안에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상속인을 위하여 토지를 살 수는 없었지만, 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어 있었던 그들에게 가장 편리한,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은 살 수 있었다.”(Gray가 쓴 Biblical Museum에 레위기 25:29에 관련되어 인용된 Bush의 글. 재인용 출처: Frederick Verinder 저, 이풍 역, 『하나님의 토지법』, CUP, 1996, 81쪽).
나그네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토지를 사더라도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살 수 있었고, 또 희년 전에 언제든지 판 자의 가까운 친족이나 판 자 자신이 토지 무르기 계약을 요구하면 반드시 토지를 물러 주어야 했기 때문에, 성 밖의 넓은 토지가 필요한 농경과 목축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상업과 수공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주택은 상업과 수공업에 유리한 성 안의 도시 주택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의 도시 주택은 주거 공간이면서 동시에 상업과 수공업을 할 수 있는 노동의 공간, 곧 일터가 된다.
그런데 만약 이 도시 주택마저도 토지법의 규정과 마찬가지로 무르기법과 희년의 회복법이 적용되어,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만 주택을 살 수 있고, 또 희년 전에 언제든지 무르기 계약을 요구받을 때 물러 주어야 한다면, 그들의 정착과 주거는 크게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그네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의 정착을 장려하고 그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성 안의 도시 주택은 무를 수 있는 유효기간을 오직 1년으로 제한하고, 1년 안에 무르지 못하면 희년이 오더라도 판 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영원히 산 자의 소유로 확정한 것이다.
둘째, ‘성 밖의 농촌 주택법’과 ‘레위인 주택법’이다(레위25:31-33). 토지와 마찬가지로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사고 팔 수 있고, 희년이 오기 전에 언제든지 무르기가 가능하다. 이것은 성 밖의 토지를 평균 분배받은 이스라엘 12지파와 이 토지 평균 분배에서 제외된 레위 지파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규정이다.
셋째, ‘극빈층 주거보장법’이다(레위25:35).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극빈층을 홈리스 상태에 내버려 두지 말고 맞아들여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이상에서 희년의 주택법은 요컨대, 나그네들과 이방인 개종자, 이스라엘 12지파와 레위 지파, 극빈층 등 한 마디로 만민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곧 만민의 주거권 보장이 희년의 주택법의 원칙인 것이다.
주거권은 천부인권
이처럼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의 주택법은 ‘만민의 주거권 보장’을 그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거권은 천부인권(天賦人權)이다. 인권 중에서도 기본적 인권인 주거권은 ‘세계 인권 선언’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CESCR, 이하 사회권 규약)’, 그리고 ‘세계 주거 회의’(HABITAT)에서 채택된 ‘벤쿠버 선언’과 ‘하비타트 의제’ 등을 통해 이미 기본적 인권으로 선언된 바 있다. 특히 사회권 규약은 지난 1990년 한국 국회 비준을 정식으로 통과하여 동년 7월 10일부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되었다. 사회권 규약 Art.11.1에서는 “본 규약에 가입한 국가는 모든 사람이 적당한 식량, 의복 및 주택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과 가정을 위한 적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생활 조건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주거권을 규약 가입국의 모든 사람의 권리로 인정하였다.
‘유엔 사회권 규약 위원회’는 ‘일반논평 4’의 제목을 바로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로 달았으며, 1995년, 한국 정부가 제출한 1차 보고서에 대해 “위원회는 한국 정부가 주거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위원회의 일반 논평 4에 따라, 주거 대책 없는 철거를 중단할 것을 권고한다.”는 최종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2001년, 한국 정부가 제출한 2차 보고서에 대해서도, “위원회는 민간 개발 사업에 의한 강제철거의 피해자들에게도 보상과 임시 주거 시설 등의 보호가 제공되어야 한다고 권고한다.”는 최종견해를 밝혔다. 또 사회권 규약 Art.11.1에 관한 ‘일반논평 7’의 para.15에서는 불가피하게 철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진솔한 협상의 기회 제공, 사전 고지, 예정된 철거에 대한 정보의 공개, 철거 시 공무원이나 그들의 대표자 입회, 철거수행 인원의 신원 확인, 야간 또는 악천후 등 하에서의 철거 금지, 합법적 보상책 제공, 법적 지원 제공이라는 사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철거민의 주거권은 아직도 한국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유린되고 있다. ‘유엔 사회권 규약 위원회’가 한국 정부에 권고한 ‘주거권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대책’, ‘주거 대책 없는 철거 중단’, ‘민간 개발 사업에 의한 강제철거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임시 주거 시설 등의 보호 제공’은 실제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회권 규약에 관한 ‘일반논평 7’에서 권고한 ‘불가피한 철거의 전제조건인 철거시기의 사전 고지, 야간 또는 악천후 등 하에서의 철거 금지’ 등은 실제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
강제 철거의 인권 침해 실태
[주: 이하의 강제 철거 인권 침해 사례는 (사)한국도시연구소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2005년도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 개발사업지역 세입자 등 주거빈곤층 주거권 보장 개선방안을 위한 실태조사」(2005년, 128-139쪽)에서 선별 요약 인용한 것이다.]
(1) 생가 철거와 기물 파손
완전한 퇴거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생가(生家)를 적절한 이주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강제 철거하고 기물을 파손하고 있다.
[사례] “저항하는 과정에서 머리채를 끄들린 채 끌려 나왔고, 막무가내로 살림을 내가는 바람에 아이들 앨범사진 등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모두 분실됐어요.”(양○순, 여, 62세)
[사례] “집을 비운 사이에 철거를 당했다. 파출소에 갔더니, 사람이 없더라도 집행관이 와서 철거를 했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했다. 세탁기며 장롱이며 모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집을 부쉈다.”(윤○수, 남, 60세)
(2) 폭행
사람이 거주하는 생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용역반원의 철거민에 대한 폭행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폭행은 철거민에게 육체적 손상뿐만 아니라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사례] “내 막내 아들보다도 어린 놈들에게 폭행을 당하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 때는 그놈들 죽이고 나도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조○애, 여, 62세)
[사례] “10월 1일 새벽 5시 반이 되었는데, 빨간 옷을 입은 용역들이 동네에 들어왔다. 얘들을 깨워서 옷을 입혀서 딸을 바로 큰 집으로 보냈다. 근데 아들은 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맨발로 끌려나오는 것과 용역들한테 얘들 아빠가 맞는 것을 다 봤다. 그것이 충격이 컸는지 성적도 괜찮게 나왔는데 대학가는 것도 포기했다. 철거로 인해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자식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과 젊은 녀석의 앞길을 막았다는 것이다.”(박○애, 여, 49세)
(3) 사전고지 부재
강제 철거는 명도소송과 행정대집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명도소송을 통한 강제 철거의 경우, 법적 근거는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인데, 사전고지가 의무사항이 아니다. 다음으로 행정대집행의 경우, 원칙적으로 사전에 계고장이 발부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절차가 생략될 수 있는 예외 조항(「행정대집행법」 제3조 제3항)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실제 현실에서는 사전고지 절차 없이 강제 철거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례] “철거에 대한 경고는 전혀 없었다.”(위○심, 여 51세)
[사례] “짐승도 아니고 사람인데 아무런 통보도 없이 내쫒는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가라는 통보가 있었다면 나갔을 것이다.”(이○숙, 여, 51세)
(4) 동절기, 장마철, 심야, 새벽의 강제 철거
동절기와 장마철에 생가를 강제 철거하는 행위는 반인권적인 악행이다. 이러한 행위가 반인권적이라는 사회적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어 지난 1990년 당시 서울시장(고건)이 동절기 철거 금지 약속을 한 적도 있다. 또 심야나 새벽에 철거하는 행위 역시, 특히 철거민의 자녀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해서는 안 될 악행이다. 그러나 이런 악행들이 여러 지역에서 지금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사례]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81번지에 대한 강제철거는 동절기인 2002년 11월 23일에 일어났고, 인근 신천동 83번지에 대한 강제철거 역시 동절기인 2004년 12월 31일에 일어났다. 또 서울특별시 을지로 삼각·수하동 도시환경정비사업구역에 대한 철거는 2004년 11월 7일 새벽 4시부터 용역반원들이 몰려들어, 새벽 5시부터 강제 철거를 하였고, 상도 5동은 새벽 6시 30분부터 철거가 시작되었다.
[사례] “새벽 5시에 1,200명 가량이 왔다. 주민들이 100명 정도밖에 없는데,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잘 철거하라고 아예 보호해주고... 다 짜고 쳤다. 경찰의 비호 아래, 시청의 묵인 아래, 법원의 협조 아래 강제철거가 이루어졌다. 없는 사람들만 서럽다.”(곽○덕, 남, 54세)
(5) 방화 가능성이 큰 화재 발생
철거민의 저항이 장기화될 때, 주변의 빈 집들에서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것은 용역업체가 철거민을 내쫓기 위해서 불을 지르는 방화일 가능성이 매우 큰데, 그 이유 중에는 화재 발생 시 소방서의 늦장 출동과 소극적인 화재 진압 태도도 있다. 이런 방화는 실제 거주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크게 위협하는 반인권적인 악행이다.
[사례] 광명 소하 택지개발사업지구에서는 2004년 11월 22일 화재가 발생하여 60세대, 11개 공장이 전소되었다. “광명시청에서 항의집회를 한 날, 불이 났다. 소방차가 한 40-50대는 출동을 했는데, 물줄기가 매우 약했다. 그래서 물을 더 뿌리라고 요구하자 소방관들이 물이 없다고 하더라. 내가 보기에는 불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김○환, 남, 42세)
[사례] “우리를 나가게 하려고 불도 지르고 하더라구. 불이 두 번이나 났어. 얘들하고 텔레비전 보는데 화재가 나 버린 거야. 끈다고 난리 났었지. 그래서 3일 날 이사나오기로 한 거 1일 날 이사 나왔지. 화재를 두 번 입으니까 불이라면 지금도 무서워.”(유○순, 여, 44세)
철거민 주거권 보장 정책
한국 정부는 주거권이 천부인권이라는 성서의 가르침, 주거권은 기본적 인권이라는 세계적인 주요 선언들, 그리고 철거민의 주거권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라는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첫째, 토지 가치를 공유하는 평균 지권 정책들을 실시하여 토지불로소득을 원천봉쇄함으로써, 토지불로소득을 노리는 재개발 시도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철거민 발생을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둘째, 철거민의 주거권에 대한 유린을 합법화하는 개발악법인 「택지개발촉진법」을 폐지해야 한다. 21세기는 개발이 아니라 주거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법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아무리 행정대집행과 명도소송에 의한 강제 철거라 하더라도,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는 생가 철거와 기물 파손, 철거용역반의 폭행과 방화, 동절기·장마철·심야·새벽의 강제 철거를 법으로 금지하고 엄단해야 한다.
넷째, 불가피한 강제 철거의 경우에도 사회권 규약이 권고한 대로 철거시기의 사전고지가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명도소송을 통한 강제 철거의 법적 근거인 「민사소송법」과 「민사집행법」을 개정하여 사전고지를 의무화해야 하고, 행정대집행 시 사전고지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둔 「행정대집행법」을 개정하여 예외 없는 사전고지를 의무화해야 한다.
다섯째, 주거 대책 없는 철거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모든 개발 사업에서 철거를 당하는 모든 세대에 대한 적절한 주거대책을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현재 도시 환경 정비 사업 지구와 민간 개발 사업 지구의 세입자와 미등재 무허가 주택 가옥주에 대해서는 주거대책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공공 개발 사업뿐만 아니라 민간 개발 사업에서도, 개발이익의 일정 비율을 환수하여 공공임대주택과 임시주거시설(가이주단지) 등을 건립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해야 한다.
여섯째,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를 서민 주거 복지 차원에서 인하해야 하며, 보증금에 대해 장기 저리 융자를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부담이 큰 보증부 월세보다는 전세 방식으로 최대한 전환해야 한다. 공공임대주택 입주권을 보장받은 세입자가 이를 포기하고 대신 주거 이전비를 받아 떠나는 경우가 많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공공임대주택의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점을 한국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가난한 이웃들의 계속되는 철거의 고통
해방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주택 관련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철거민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정권은, 단언컨대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철거민에 대해서는 천부인권인 주거권을 박탈해 왔을 뿐만 아니라, 강제철거과정에서 성추행과 구타, 심지어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심각한 인권 유린을 방조해 왔다.
2003년 가을, ‘10.29 정부부동산대책 규탄 및 근본대책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집회’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에서 진행한 적이 있다. 참여단체 중에는 전철협(전국철거민협의회)이 있었는데, 전철협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경기도 고양시 풍동의 철거민들이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가난한 어르신들이셨다. 그런데 들고 계신 피켓은 그날 집회 주제와는 사실 잘 안 맞는 것들이었다. “풍동 주민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보장하라!” 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려다가 10.29 대책 규탄 플랜카드와 철거민 주거권 피켓이 안 맞으니까 피켓 든 어르신들을 옆으로 가시게 하고 당일 주제와 맞는 피켓을 중앙으로 모아 재배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밀려났다가 다시 사진에 잘 찍힐 수 있는 쪽으로 오려고 안간힘을 쓰시는 모습을 보았다. 조금이라도 고양 풍동의 철거민 문제를 언론에 알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두어 주가 지나도 계속 그 분들 생각이 났다. 그래서 주일 오후에 예배를 마치고 한 형제와 함께 고양 풍동을 찾아갔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어두컴컴한 길, 그리고 철거가 진행되어 흉흉한 폐가들... 풍동주민대책위원장 되신 아저씨와 마을 주민 몇 분이 우리를 맞아 주셨다. 그 분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기가 막힌 것들이었다. 위원장 아저씨는 서울 봉천동에 살다가 철거당해서 여기까지 밀려 왔는데, 이곳에서도 다시 두 번째 철거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개발사업과정에서 철거민의 주거권을 그 지역에서 해결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내쫓는 미봉책으로 제2, 제3의 철거민들을 양산해 온 불의한 정책들에 화가 났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난한 이웃들을 점점 외곽으로, 거듭되는 철거의 악몽으로 밀어 넣고 있는 잔인한 시대······.
그 후 2005년 봄, 전철협(전국철거민협의회)에서 필자에게 ‘공직자 부동산 투기 근절 및 토지·주택공사 개혁 촉구 100만 서명운동 발대식’에 와서 연설을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날 발대식에서 판교 주민대책위원장 되시는 분으로부터 아침에 철거반이 들이닥쳐서 철거민 12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철거민이 당하는 일상화된 폭력에 마음이 아팠다. 며칠 후 판교 철거민의 주거권 실현을 위한 성명서를 기초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 중에는 지난 2001년 여름, 보금자리를 강제철거당한 김용만 씨가 집이 철거당한 자리에 천막을 치고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다가, 2002년 1월, 그 천막마저 강제철거당하고 그 며칠 후 결국 길에서 얼어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기사와 자료도 있었다. 모자를 쓴 그 분의 영정 사진을 보았다. 행당동에서 만났던 아저씨 한 분과 닮았다. 남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잘 아는 고향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돌아가신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콱 막혔다.
철거로 고통당하는 기독교인들
그해 겨울인 2005년 12월, 종로4가 종묘공원에서 전철협(전국철거민협의회)이 다른 단체들과 공동주최한 “전국개발지역주민 2005년 총궐기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너무 추워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집회에 참석한 분들 중에 정말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상도5동 철거민 대표로 연단에 올라 호소하는 50대 아주머니의 발언에서, 기독교인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나님, 교회, 목사님”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왔다. 상도5동에서는 교회 예배당이 철거되었다고 했다. 철거를 명령한 사업주체는 한양대라고 하고 한양대 이사장은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멀리 전라도 광주 양림동에서 최근에 철거당한 분들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먼 길을 올라오셨다. 양림동은 필자가 기독교 신앙을 배운 모(母)교회인 양림교회(광주에 세워진 첫교회, 1904년 설립)가 있는 곳이며, 주민의 70-80%가 기독교인인 곳으로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단순 비율로 생각하면 그 철거당한 분들 중에 아마 70-80%는 기독교인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지역인지는 모르지만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 한 분이 그 지역을 대표하여 성명서를 읽고 마지막에 “아멘,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 분도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철거로 이 추운 겨울에 고통당하는 성도들······.
광명 소하 지역에서 오신 분이 발언했다. 2004년 11월 22일 밤, 광명 소하 지구 비닐하우스에 사는 철거민들이 광명시청에서 철거와 주민이주에 따른 대책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진 다음날 밤, 비닐하우스 밀집촌(당시 13가구)에 화재가 나서 모두 전소되고 주민들은 잠옷 바람으로 피신했다. 소방당국은 작업장의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보인다고 했지만, 목격자인 주민에 의하면 화재는 작업장이 아닌 작업장 인근 헌 옷가지 더미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화재현장 부근에서 뚜껑이 열린 시너 통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철거민 집회에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불이 나서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지금 1년 넘게 고통받아오고 있다고 했다. 필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만약 누군가 가난한 이웃의 보금자리에 불을 질러서라도 쫓아내서 막대한 개발이익을 얻으려고 했다면,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한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한을 신원(伸寃)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집회 중에 “철의 노동자”를 철거민으로 개사하여 불렀는데 가사 중에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가 있었다. 필자는 정서적으로 투쟁이라는 단어가 거북하다. 싸움을 싫어하고 사랑과 화해를 강조하는 어쩔 수 없는 보수기독교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분들을 도와주는 다른 이들이 없다면, 이 분들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 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집회 중에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가난한 이웃들을 구원해 주소서.”
철거민의 구원
대천덕 신부에 의하면, 구원이란 바로 “문제 해결”이다. 성서는 “전쟁 문제 해결”, “병 문제 해결”, “경제 문제 해결” 등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모두 구원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구주’라는 말은 ‘문제 해결하시는 주님’이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저명한 신학자인 김세윤 교수도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에서, 대천덕 신부와 비슷한 구원 개념을 피력한다. 김세윤 교수에 의하면, 구원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이다. 김교수에 의하면, “그것이 우리 육신과는 소용없고 영혼에만 소용 있는 구원도 아니고, 그것이 이 세상은 관계없고 내세에만 관계되는 구원도 아닙니다.” 그는 구원을 이 세상과 육신적 삶으로만 축약시키는 태도도 경계하고, 이 세상과 육신적 삶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도 경계하면서,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특히 구원과 빈곤에 대해 인상적인 주장을 편다. “빈곤도 엄연한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빈곤과 관계없다면 그것이 무슨 구원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도 나타난다. 김세윤 교수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 세상의 몇 가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들에 축약시켜서는 안 된다고 전제를 달면서 총체적 구원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서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등 이런 것들도 다 그리스도의 총체적 구원의 구체적 반영으로서 절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거민에게 교회가 나타내야 할 그리스도의 구원은 무엇일까? 다시는 주거권을 유린당하는 일이 없도록 철거민 주거권 보장 정책들을 실행하는 것이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다. 철거반원들에게 보금자리가 무참히 헐리고, 강제 철거에 저항하다가 두들겨 맞고 모욕당하고 끌려가서 내동댕이쳐진 채 추운겨울에 비닐집에서 지내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받은 철거민에게 교회가 나타내야 할 그리스도의 구원은 상한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것이다.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가 예상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기적의 은총이 바로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구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유일한 구원자(문제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일 것이다.
박창수
이 글은 몇 해 동안 월간 <기독교사상>, 월간 <복음과 상황>,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등에 분산 기고한 글들을 묶어 보완, 정리한 것입니다. 필자는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전국철거민협의회 정책위원, 성서한국 집행위원 겸 경제 분과 전문위원,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그리고 ‘희년 사회’를 꿈꾸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