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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邦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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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山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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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邦傑 | - 子 國信 | - 子 虎 | - 子 礪仲 | - 子 輔平 | - 子 思憲 | - 子 武成 | - 子 慶立 | - 子 石昌 |
廣州君 新羅大將軍 | 門下侍中 | 檢校軍器監 尙書員外郞 | 門下侍中 | 內史侍郞 | 僉議中贊 | 平章事 | 僉知政事 | 中書令 |
- 子 弼夢 | - 子 子美 | - 子 永儒 | - 子 孚 | - 子 裕 | - 子 于器 | - 子 牧 | - 子 元衡 | - 子 瑚 |
太保內史令 | 移封順興君 | 密直副使 | 版圖判書 | 文成公 號晦軒 躋配文廟 | 文敬公 | 文淑公 | 文惠公 麗朝移封竹山君 是爲新竹山派 | 贈左議政 |
- 子 勉璞 | ||||||||
- 子 元崇 | - 子 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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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因貫順興 | 開城留守 |
- 子 弘美 | - 子 永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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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因貫廣州 | 戶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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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子 永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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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戶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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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邦俠 | - 子 國賓 | - 子 侚 | - 子 德培 | - 子 忠 | - 子 彦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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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城君 新羅副將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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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이관총초(安氏異貫總抄)
죽산(竹山), 광주(廣州), 양지지추계(陽智之秋溪, 경기도 용인시 양지), 과천(果川), 통진지수안(通津之守安, 경기도 김포지역), 교동(喬桐,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충주(忠州), 우충주지광반석(又忠州之廣反石, 충북 충주시 살미면), 괴산(槐山), 연풍(延豊, 충복 괴산군 연풍면), 제천(堤川), 청산지계은천(靑山之界銀川, 충북 옥천군 청산면), 서산지지곡(瑞山之地谷, 충남 서산시 지곡면), 아산지덕천(牙山之德泉), 경주지안강(慶州之安康, 경북 경주시 안강), 풍기(豊基), 순흥(順興), 예안(禮安), 하양지이지(河陽之棃旨, 경북 경산시), 의흥지악계(義興之岳溪, 경북 군위지역), 신평지이지(新平之棃旨, 충남 당진지역), 안의지가을산(安義之加乙山, 경남 함양군 안의면), 부안지보안(扶安之保安, 전북 부안군 보안면), 태안지인의(泰安之仁義, 충남 서산시 태안읍), 영광지육창(靈光之陸昌, 전남 영광군 군남면), 진원(珍原, 전남 장성군 진원면), 무장지장사(茂長之長沙, 전북 고창군 무장면), 강진지평덕(康津之平德, 전남 강진군 군동면 평덕), 해남지옥천(海南之玉泉, 전남 해남군 옥천면), 제주(濟州), 남원(南原), 창평(昌平), 황주(黃州, 황해도 황주군 황주읍), 서흥(瑞興), 재령(載寧), 토산(兎山, 황해도 토산군 토산읍), 간성(杆城, 강원도 고성지역), 원주(原州), 춘천(春川), 정선(旌善, 강원도 정선군), 철원(鐵原), 함흥(咸興), 정평(定平, 함남 정평군), 안변(安邊, 함남 안변군 안변읍), 덕원(德源, 함남도 문천군 덕원면), 맹산(孟山, 평남 맹산군), 이산(理山, 평안북도 초산군 초산면)
按東國輿地勝覽, 所載安氏之貫, 若是之多, 而近世惟竹山廣州順興, 三貫爲大姓, 餘皆無問, 今姑依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니 안씨(安氏)의 본관들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었는데, 이와 같이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죽산(竹山)·광주(廣州)·순흥(順興) 3개의 본관이 많이 쓰는 대성(大姓)이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들어보지 못했으나, 우선 전과 같이 기록해 놓는다.
按安氏受姓之源, 見於中國史者。新唐書宰相世系表。安氏。姬姓昌意之子。安居西方號安息國, 後漢末, 遣子世高入朝, 因居洛陽。晋魏居于安定, 後徙遼左, 又徙武威。遂爲遼東胡人。(見廣州安氏譜)
안씨(安氏)라는 성(姓)의 근원을 살펴보니,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다. 《신당서(新唐書)》<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 안씨(安氏)는, 희(姬)라는 성(姓)을 가진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자손들이 안식국(安息國, 중국 한나라 때 지금의 이란에 있었던 ‘파르티아 제국’을 일컫던 이름)으로 불리던 서역 지방[西方]에서 살았는데, 후한시대[後漢, 25~220] 말기에 왕자 안세고(安世高)가 입조(入朝)하여 낙양(洛陽)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고, 위(魏, 220~265)·진(晋, 265~316) 시대에는 안정(安定, 운남성 다리바이족자치구)으로. 그 후 요좌(遼左, 요수의 좌측 즉 요동)로, 다시 무위(武威, 감숙성 무위시)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이들이) 요동(遼東, 요동반도)의 만주사람[胡人]이 되었을 것이다.[《광주안씨족보》(1739 기미보)에 보인다.]
참고 : 중국 안씨(安氏)의 유래 http://cafe.daum.net/ahncham/DFic/345
죽산안씨 4파(竹山安氏四派)
一小府少監諱濬派。一尙書僕射諱令儀派。一判官諱漢周派。一文惠公諱元衡派。(見延昌尉派譜)
하나는 소부소감(小府少監) 휘 준(濬)의 갈래, 또 하나는 상서복야(尙書僕射) 휘 영의(令儀)의 갈래, 또 하나는 판관(判官) 휘 한주(漢周)의 갈래이고, 또 하나는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의 갈래이다. (연창위파 족보에 있다.)
按判官諱漢周派。未知分系於何世。而光山金氏譜曰。麗朝尙書金公安利。爲漢周女婿云也。(無考證)
판관 휘 한주(漢周)의 갈래를 보니, 그 계파가 어떻게 나뉘었는지 아직 모르지만, 《광산김씨족보(光山金氏族譜)》에 고려 때 상서(尙書) 김안리(金安利) 공이 안한주(安漢周)의 사위라고는 하나, 고증할 수는 없다.
광산 김안리(金安利)는 죽산 안한주(安漢周)의 사위이고, 순흥 안종원(安宗源)의 장남되는 안중온(安仲溫)의 장인이다.
려말보서(麗末譜序)
世居竹溪之上。竹溪之源。出於太白山。山之大而水之遠。安氏之與。其無窮乎。(舊傳只此二十九字餘逸不傳) - 韓山伯牧隱李穡撰
대대로 죽계(竹溪) 위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산이 워낙 커서 물줄기가 멀리까지 흘러내려 가고 있으니, 안씨 집안이 흥성하는 것 역시 그처럼 무궁하리라는 생각도 든다.(예로부터 전해진 것은 오직 이 29자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다.)
- 한산백(韓山伯)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다.
1626년 간행된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문집《목은문고(牧隱文藁)》8권 <서문(序)>중에서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떠나는 안 시어사(安侍御史)를 전송한 시의 서문[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라는 글의 일부가 인용된 것 같다.
즉, 안종원(安宗源,1325∼1394)이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떠날 때 동년들이 환송의 자리를 갖고 환송하는 자리에서 지은 시들을 묶어 소책자로 낼 때 이색(李穡,1328~1396)이 그 서문을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a_005_063d
順興安氏。世居竹溪之上。竹溪之源。出於太白山。山之大而水之遠。安氏之與。其無窮乎。謹齋先生當大定甲子。對策于天子之庭。名遂大振。還仕本國。位至005_064a封君。文章道德。一時傑然者也。其居官莅事。動有成績。至於忠義大節。激頹風。翼衰世。立懦廉頑多矣。至于今稱誦之。先生季子嗣淸。亦以文學進。予同年也。立于朝。如祥麟威鳳。使于外。如長城敵國。有父之風。而醞藉過之。先文孝公師事謹齋先生。又與其弟政堂公同年。予又與嗣淸。俱爲辛巳進士。則安,李爲世交。其於贈處。不可不以情矣。嗣淸以侍御史。出而按行楊廣。同年士相與餞之。酒行。予卽曰。旣忝世交。公又請言。豈容緘默乎。然嗣淸有學業。有節操。自始迄今。所居稱職。聲名籍甚。規之則妄。頌之則諛。然回,路005_064b何如人哉。彼其親灸乎聖人。朝夕乎聖訓。操存省察。固已無可議矣。猶宜諪諪贈處。況於吾儕乎。嗣淸揚歷中外。雖已光顯。然以世德之舊。行己之勤。功名事業。滔滔日進。未見涯涘。若其不挾所長以駕於人。則其所長也。然道德之在躬。政事之成效。又非止今日而已。必有進步之地尙多矣。嗣淸其益勉之哉。然則當如何。曰。持其志。無變其初。斯可矣。衆曰。然。遂書以爲序。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대대로 죽계(竹溪) 위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산이 워낙 커서 물줄기가 멀리까지 흘러내려 가고 있으니, 안씨 집안이 흥성하는 것 역시 그처럼 무궁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근재(謹齋 안축(安軸,1282~1348)) 선생으로 말하면, 태정(泰定)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천자의 뜰에서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올려 명성을 마침내 크게 떨치고는 본국에 돌아와 벼슬하면서 봉군(封君)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문장과 도덕이 그야말로 한 시대에 걸출한 분이었다고 하겠다. 선생은 관직에 몸을 담고서 어떤 일을 담당하든 간에 언제나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충의(忠義)에 입각한 큰 절조(節操)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퇴폐한 풍속을 격동시키고 쇠퇴한 세도(世道)를 바로잡는 데 일조함으로써, 나약한 자들이 지조를 세우게 하고 완악한 자들이 방정(方正)하게 되도록 해 준 효과가 다대하였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는 터이다.
선생의 막내아들인 사청(嗣淸 안종원(安宗源,1325∼1394))이 또한 문학을 통해서 진출하였는데, 그는 나와 동년(同年)이다. 그가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이요 위의(威儀) 있는 봉황과도 같았으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면 장성(長城)이요 적국(敵國)과도 같았는데, 부친의 풍도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온화하게 포용하는 면에서는 오히려 나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선친인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1298~1351))이 근재 선생을 스승으로 모신데다가 또 선생의 아우인 정당공(政堂公 안보(安輔,1302∼1357))과는 동년이었으며, 나 역시 사청과 함께 신사년(1341)의 진사(進士)가 되었고 보면, 안씨와 이씨 집안 사이에는 대대로 두터운 교분을 쌓아 왔다고 할 것이니, 증처(贈處)할 적에도 정리(情理)에 입각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진다.
사청이 시어사(侍御史)로 있다가 외방으로 나가서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게 되자, 동년인 인사들이 서로 모여서 전별(餞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술잔이 돌기 시작했을 때에 내가 곧장 나서서 말하기를,
“이미 대대로 두터운 교분을 쌓아 온 데다가 공이 또 한마디 말을 청했고 보면, 내가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청이 학업을 닦고 절조를 세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으니, 사청에 대해서 충고하는 말을 한다면 망발이 될 것이요 칭송하는 말을 한다면 아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안회(顔回)와 자로(子路)를 예로 든다면, 그들이야말로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성인의 감화를 직접 받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접하였으니, 심지(心志)를 굳게 지니고 성찰하는 공부에 있어서 비난을 받을 점이 원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심으로 증처(贈處)하는 말을 서로들 주고받았으니, 우리와 같은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청이 그동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이미 빛나게 현달하기는 하였지만, 오래된 세덕(世德)과 근면한 자신의 행동으로 볼 때, 앞으로 이룰 공명(功名)과 사업이 또한 마치 물이 흘러내려가듯 날로 발전하여 그 끝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이 잘하는 점을 과시하며 남을 무시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의 장점이라고도 하겠지만, 도덕을 자신의 한 몸에 지니고서 정사(政事)에 실효를 거두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는 또 오늘날에 이룬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요, 반드시 진보해야 할 여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니, 사청은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뜻을 굳게 지니고서 처음의 결심을 변하지 말아야만 옳을 것이다.”
하였더니, 모두들 옳은 말이라고 동의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 내용을 써서 서문으로 삼기로 하였다.
광릉 석말씨 사실(廣陵石秣氏事實)
高麗忠烈王朝。有諱天衢。仕爲中書員外郞, 達魯花赤, 言於王曰, “何踈賢士, 而親無類之人。” 王黙然。贒士盖指中書員外也。天衢子時用(一諱時中)。推誠補節功臣 奉翊大夫 同知密直司使 上護軍。女適, 吾直提學先祖, 諱曾(初諱受祉)。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기간(1274~1308)에 석말천구(石秣天衢)가 (원나라의) 중서원외랑(中書員外郞)으로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왕더러, “왕께서는 어찌하여 현명한 선비를 멀리하고 무뢰배들을 가까이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왕은 잠자코 있기만 했다. 현명한 선비[贒士]란 중서원외를 가르킨 것이리라. 석말천구(石秣天衢)의 아들은 시용(時用)[또는 시중(時中)]이라고 불렀는데, 추성보절공신(推誠補節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使) 상호군(上護軍)이었다. 그분의 따님이 나의 직제학(直提學) 선조 휘 증(曾)[어려서 이름은 수지(受祉)]에게 시집을 왔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를 보면,
충렬왕 원년(1275) 12월 기록 중에 “원 나라에서 중서원외랑 석말천구(石抹天衢)를 보내어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로 삼았다.”고 하였다.
충렬왕 3년(1277) 2월에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가 왕더러, “국왕께서는 어찌하여 현명한 선비를 멀리하고 무뢰배들을 가까이 하십니까?” 하고 말하자 왕은 잠자코 있기만 했다. [達魯花赤石抹天衢, 言於王曰, “王何踈賢士, 而親無賴之人.” 王黙然.]
충렬왕 4년(1278) ○ 9월에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와 경력(經歷) 장국강(張國綱)이 북으로 돌아가다가 왕을 도중에서 뵈었는데, 국강(國綱)이 말하기를, “지난 번 저의 임기가 만료되어 귀국해야 했는데 국왕께서 우리나라 관청에 부탁해 일곱 해나 더 머물게 해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다루가치와 원수(元帥) 및 우리나라 군대가 다 철수하게 되었으니 한 나라의 복입니다.” 장국강(張國綱)은 매사를 분명하고 공평하게 처리해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죽산안씨세계총람(竹山安氏世界總攬)
시조(始祖) 안방준(安邦俊) | |
初諱枝春 隴西李公諱瑗第一子 新羅景文王甲申倭亂 靖國安民之功 賜姓安氏 因改仐諱 封竹山君 憲康王四年卒 壽七十二 〇郡夫人金氏父光玉 墓開城府鵠嶺下乾坐 초휘는 지춘(枝春)으로 농서(隴西) 이원(李瑗) 공의 첫째 아들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갑신왜란(甲申倭亂)에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 공[靖國安民之功]으로 안씨(安氏)를 사성(賜姓) 받고 이름까지 고쳐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헌강왕(憲康王) 4년(878)에 졸해서 72세의 수를 살았다. 〇군부인 김씨(金氏)는 김광옥(金光玉)의 따님이다. 묘는 개성부 곡령(鵠嶺) 아래 건좌(乾坐, 서북쪽을 등진 자리)에 있다. | |
子 국보(國輔) | 子 국필(國弼) |
版圖判書 夫人鄭氏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부인은 정씨(鄭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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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윤(倫) | 子 검(儉) |
版圖判書 夫人姜氏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부인은 강씨(姜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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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덕생(德生) | 子 만생(晩生) |
版圖判書 夫人金氏父光海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부인 김씨(金氏)는 김광해(金光海)의 따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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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사(思) | 子 욕(慾) |
平章事 夫人李氏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부인은 이씨(李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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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학겸(學謙) | 子 맹겸(孟謙) |
字士逸 平章事 〇夫人李氏 자는 사일(士逸), 평장사를 지냈고, 부인은 박씨(朴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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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준(濬) | 子 로(瀘) |
少府小監 〇夫人鄭氏 소부소감(少府小監)을 지냈고, 부인은 정씨(鄭氏)이다.
| 一譜云 竹山君祈子令儀 祈字恐當從水作沂, 而盖祈與瀘兄弟行而失傳耶, 或以祈改名瀘耶 未知孰詳. 어느 족보에는 “죽산군(竹山君) 기(祈)의 아들이 영의(令儀)이다” 하였다. ‘기(祈)’자는 마땅히 물수(水) 항렬을 따라 기(沂)가 되어야할 듯하다. 생각건대 기(祈)는 로(瀘)와 형제 항렬인데 실전된 것인가? 혹시 ‘기(祈)’를 ‘로(瀘)’라고 개명한 것인가?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 |
子 필무(必茂) | 子 영의(令儀) |
必字一作時 〇軍器監 필(必)자를 어떤 곳에서는 시(時)라고도 한다. 즉, 시무(時茂)이다. 〇군기감(軍器監)을 지냈다.
| 以上文獻, 昭載麗末譜序及遺譜本註家藏世牒, 故謹此廣攷編錄, 而舊譜時旣致闕遺, 則在今難愼之義, 只依舊譜, 更自僕射公始起爲一世. 이상의 문헌은 여말보서(麗末譜序) 및 유보(遺譜)의 본주(本註), 가장(家藏), 세첩(世牒)에 실려 있기 때문에 삼가 이를 널리 고증하고 편집하여 기록한다. 그런데 구보를 만들 때 이미 빠진 부분이 있으니 지금은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생각하는 뜻에서 구보에만 의존하여 다시 복야공(僕射公)을 1세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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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세윤(世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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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少監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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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자유(自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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禧陵直 희릉직(禧陵直)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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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한평(漢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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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朝大匡 門下贊成 延興府院君 諡襄良 고려 때 대광(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고 연흥부원군( 延興府院君)으로 시호는 양양(襄良)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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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사경(社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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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匡 門下贊成 대광(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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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 극인(克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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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貞公 〇以上延昌尉公派 문정공(文貞公)이다. 〇이상은 연창위공파(延昌尉公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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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말로 놀랍소 진즉 알고는 있소마는 이렇게 열시미 연구에 열중하시메 문중에 훌륭한 인재가 계시단걸 재중 종원님께 캄솨와 함께 경의를 표함니다.~
원장님 죄송해요...제가 복사를 하다 실수했네요..
원문이 按舊譜序與此相左而今攷遺譜本註 及順廣安氏譜改證如右네요...
아직 함흥안가장 고증부분은 안나옵니다...
광주군 이하 계보에서
고쳐서 밝힌다(改證)에 대해 주촌공 가장과 1909년 죽산안씨 장단파보를 함께 고찰하면
諱 弘美공 이하는 此派本無載而見順興家譜追載라는 기록으로 보아 추가 기재이기에(追載)
子 永隣 戶長 永和 戶長이라는 기록은 諱 子美공 밑에 아들로 기록된 것입니다.
죽산안씨족보 세계총보에서
諱 로(瀘)공의 기록중 기자(祈子, 아들 낳기를 기원함)가 아니라
죽산군 기(祈)공의 아들 영의(令儀)공이며 마땅히 기(祈)공이 물수변을 따라야하나 이하 생략
諱 세윤(世允)공 이하 계보는 諱 필무(必茂)공 후손입니다.
아하... 기자(祈子)가 그런 뜻이었군요.. 자세한 내막을 몰라서 실수했습니다. 제가 워낙 문외한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