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단의 거목이신 김동리 선생이 95년 6월 17일 청담동 자
택에서 타계하셨다 '소설론'과 '소설실기'로 창작강의를 하면서 수많은 후배 문인을 길러낸
순수문학의 대가였다. 내가 김동리 선생의 작품 「무녀도」를 기획 준비한 것은 1970년경이었다.
워낙 문예영화의 붐이 한창일 때여서 수많은 영화사에서 영화화권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는데
이미 1967년 「까치소리」로 명성을 떨친 태창영화사에서 원작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무녀도」는 처음 김수용, 이성구, 조문진, 유현목 등 내노라는 명감독들이 메가폰을 쥐겠다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7년 「까치소리」로 '3· 1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은 김수용 감독이
신성일, 고은아, 남정임, 윤정희, 이대엽 등을 기용하여 예술성과 흥행성을 양립시키며
우수영화로 평가되어 수많은 상을 횝쓴 명작으로 화인되었다
「무녀도」는 「분례기」를 만든 유현목 감독이 대종상'수상소감에서 차기 작품으로
「무녀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발설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막상 제작 단계에 들어갈 때는
유현목 감독이 아니고 최하원감독으로 바뀌었음은 물론 주인공인 모화역도 당초의 김지미에서 윤정희로 교체되었다. 「
무녀도」의 모화를 놓고 김지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는데
윤정희로 배역이 바뀌자 계약위반을 내걸고 제작중지 가차압 신청을 내기도했다.
더구나 영화사와의 감정은 물론 윤정희와의 선후배 관계로 윤정회:배우협회에 제명처분이 제기되어
한때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무녀도」의 모화역에 대한 김지미와 윤정희의 갈등은 원로배우들의 중재로
극적으로 타결되었고 태창영화사와의 법정시비도 「논개」에서 김지미를 주인공으로 기용한다는 합의로 원만히 해결되었다.
김지미는 7년 후 김동리 씨가 「무녀도」를 개작한 「을화」를 발표하자 변장호 감독이 만든 「을화」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을 하는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을화」는 KBS-TV가 TV문학관'을 만들어 장미희·주인공으로 하여 열연시켰는데
스타는 한 번쯤은 '무당역을 거쳐야 한다는 등식을 낳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의 작품 중 영화화된 것은 조문진 감독이 만든 「황토기」:
김강윤이 연출한 「역마」가 있으며 tV문학관'에 소개된 「등신불」이 있다
"한민족의 토속적 사상과 역사적 현실을 바탕으로 인생의 근원적 구원을 문학적으로 추구,
우리 문학사에 있어 지워지지 않는 발자뤄를 남기고 떠났고
김동리 선생의 별세를 진심으로 애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김영삼 대통령이 애도의 조전을 보내기도 했다
우리 문단과 영화에도 큰빛으로 남은 김동리 선생의 불멸의 작품들이 이제 이 땅의 밀알이 되어
더욱 더 후학을 위한 청사진으로 영원히 위'을 떨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