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문학 100년을 되돌아보면 '을씨년스럽다'는 근대어의 어원이 직시하는 대로 '강추위와 굶주림과 누더기'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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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벽두에 나라를 잃은 치욕의 역사 때문에라도 그렇고, 1950년대에 남북한을 통틀어 전국토를 만신창이로 만든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싸움박질 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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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든 문학이든 용케도 살아남아서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정신적 명색과 물질적 구색을 갖춘 게 정말 대견스럽다는 자성 앞에서 한숨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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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권의 현대문학의 실적과 견주어 볼 때 한국문학의 그 수준이 어떤 자부심을 한뼘이나마 내놓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런 '남루의 겨울'을 오로지 인내와 극기로 이겨낸 혹독한 경험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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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현장에는 명편일수록 '겨울풍경'이 압도적으로 군림한다. 숱한 예를 들 수 있겠으나, 횡보 염상섭의 《삼대》만 하더라도 꽁꽁 얼어붙은 찬밥덩이가 일제(日帝)의 폭압적 통치술에 여일없이 쫓기는 우리 민중의 참상을 대변하는 은유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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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白石)의 명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온통 '추위와 슬픔과 외로움'이 지배(紙背)를 훤히 비추고 있을 지경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 문학의 '겨울풍경'으로서 압권은 미당 서정주의 〈동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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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시는 1966년 5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 발표시기를 보더라도 미당이 시 한편을 쓰는데 한겨울 내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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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웬만큼 널리 알려져 있어서 거의 신화나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미당은 우리말의 음율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느라고 시작(詩作)노트에다 퇴고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미 외우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터이라 새삼스럽게 옮겨적는 일도 민망스럽지만, 〈동천〉의 전문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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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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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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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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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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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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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을 '눈섭'으로 표기하고, '옴기어'도 맞춤법이 틀려 있다. 현행 한글 맞춤법대로라면 '즈문'도 '저문'이라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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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광스럽게도 필자는 미당의 육필원고도 여러 차례나 받아서 교정을 본 적이 있는데, 붓글씨체로 큼직큼직하게 쓴 당신의 그 만년필 글씨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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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천〉에는 희한하게도 그의 다른 시들과는 달리 쉼표.마침표.말줄임표 같은 부호가 일체 없다. 물론 우리말의 가락을 살리려는 미당의 숨은 섬세성 때문에 그랬을테고, 맞춤법을 무시한 배려도 예사로 읽을 수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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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인다면 "아, 그 교정이란 게 말일세…… 아무쪼록 원고대로만 잘 좀 봐주시게" 하던 미당 특유의 해학이 좋은 육성도 아직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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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하기 나름이겠으나 〈동천〉은 연년세세 한반도 위에 까무룩하니 드리운 우리 한민족의 정한이랄까 정서 같은 것이 서리서리 똬리를 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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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우리의 시름 많은 마음과 우리의 소리글이 이처럼 혼연일체를 이룬 하모니는 미당만이 빚어낼 수 있는 수일한 경지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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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짧은 시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어떤 추상적인 집합체로서의 텍스트 자체가 다소 공허하게 비칠 수도 있겠으나, '눈섭·꿈·하늘·새' 같은 순수한 우리말의 투명성이 뜻밖에도 구체적인 허무감을 한껏 양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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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이 넘은 노인이면서도 양담배 말보루를 맛있게 태우시면서 유독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키시던 미당의 그 소탈한 자태에는 분명히 탈속한 신기(神氣) 같은 것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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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눈썰미가 그나마 쓸만하다면 미당의 말솜씨에는 당신의 여러 시편들 속에 느긋이 내장된 그만의 해학, 그만의 득음(得音), 그만의 총기, 그만의 울분과 짜증과 외로움, 그만의 늠름한 품격이 감칠맛 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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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하늘을 나르는 매서운 새떼를 볼 수 없게 된 오늘의 이 숨가뿐 디지털 문명 속에서 미당의 시들을 느리게느리게 읽어가는 재미를 모른다면, 그런 이들을 속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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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우(소설가.계명대 교수)
첫댓글 휼륭한 문학을 가르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잘~새기며 갑니다 보리님^*^ _관세음보살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