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사년(선조 26년; 1593) 10월, 국왕이 환도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불타다 남은 너저분한 것들이 성안에 가득하고, 질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길에 겹쳐 있었다. 동대문밖에는 시체가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쌓여 있어 심한 악취로 통행할 수가 없었다.
-
- 사람들이 인육까지 먹어 죽은 사람이 있으면 삽시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덩이가 낭자하였다. (줄임) 지방에서는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이때에 국왕께서 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라고 명하시고 나를 도제조로 삼으시므로, 나는 청하기를 "당속미 1천 석을 군량으로 하여 한사람당 하루에 쌀 2되씩 준다하여 군인을 모집하면 응모하는 자가 사방에서 모여들 것입니다"라 하였다.
-
- 당상 조경(趙儆)은 곡식이 부족하여 응모자 모두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하여 큰 돌을 들게 하여 힘을 시험하고, 또 한 길 남짓한 흙담장을 뛰어넘게 하여 능히 뛰어넘는 자만을 합격시키니 사람들이 다 굶주리고 피곤해서 합격하는 자는 열에 한둘이었다.
-
- 어떤 사람은 도감문 밖에서 시험보기를 기다리다가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 안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쏘는 법과 창 칼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 초관과 파총을 두어 그들을 거드리게 하였다. 또 번을 나누어 궁중에 직숙하게 하고, 국왕의 행차가 있을 때 이들로 하여금 호위하게 하니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
- 위 글은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훈련도감의 설립 당시를 회고하며 쓴 글이다. 훈련도감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이듬해인 1593년, 왜군의 침략과 각 지방의 변란으로 혼란이 극심했을 때 국왕의 시위를 위해 급조되었다. 이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훈련도감은 점차 정비 강화되어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해체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서울에 상주하는 상비군으로서 국왕의 시위, 서울의 경비와 방위를 주도적으로 담당하였다.
-
-
훈련도감은 처음에는 서울의 빈민을 모집하여 조총 사격술을 훈련시켰다. 조총은 임진왜란 중 왜군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따 만든 총으로서 '날으는 새도 맞출 수 있어 조총(鳥銃)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바와 같이 당시로서는 명중률이 대단히 높은 무기였다. 또 조총은 종래 조선의 총포인 승자총통(勝字銃筒)과 같이 손으로 약선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방아쇠를 당겨 발사하는 것으로 명중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발사속도도 훨씬 빨랐고 사용법도 간편하였다.
조총의 등장은 조선의 무기 군사체제를 크게 바꾸었다.
-
-
- 조선전기에도 개인 휴대용 소화기(小火器)인 승자총통 등이 개발되어 실전에도 사용되긴 하였으나 임진왜란 전까지는 여전히 활과 화살 위주의 무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이 조선전기 군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군사인 갑사(甲士)는 바로 이러한 무술을 시험하여 합격한 무사들로 편성한 군대였다.
-
-
- 그러나 활쏘기는 상당한 힘과 고도의 숙련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숙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을 하여야 했다. 육체적인 힘 뿐만 아니라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했다.
-
그러나 조총의 등장은 이러한 무사의 존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비싼 갑옷으로 무장하고 활을 쏘는 무사들도 조총 앞에서는 힘을 못쓰고 죽어간 것이 임진왜란 전장에서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근력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조총 앞에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
- 그래서 '조총이 나오자 항우 장사도 힘을 쓰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조선후기에 유행하였다. 조총의 등장에 따라 전투시에는 말을 타고 활을 잘쏘는 호쾌한 무사보다는 대오를 갖추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조총을 쏘는 포수들이 더욱 요구되었다. 또 개인의 무예가 중시되던 것에서 이제는 조직적인 집단의 운용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 속에서 훈련도감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
훈련도감 군인들은 주로 빈민들로 구성되었으므로 군인들의 생활 모습도 조선전기와 같지 않았다. 갑사와 정병으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중앙군들은 대체로 지방에 근거가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갑사들은 부유층으로서 이들은 당번이 되면 기마와 짐말 그리고 종자를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군역 근무에 임했다. 즉 조선전기의 중앙군들은 지방에서 쌀과 면포를 가져와 서울에서 소비생활을 하면서 단기간의 군역 근무만을 했을 뿐이다.
-
-
- 그러나 훈련도감 군인들은 이와 달랐다. 이들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상주하면서 군역 근무에 임했다. 이러한 군인들에게 국가에서는 급료로 매달 쌀 12∼6말, 피복비로 1년에 면포 9필을 지급하였다. 훈련도감 군인 5000여 명에게 지급하는 급료만 하더라도 호조의 1년 경비 12만 석중 8만 석을 차지할 만큼 막대한 것이었다.
-
훈련도감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으면서 국왕 시위와 서울의 경비 방위라는 본래 임무와 더불어 평안도와 함경도로의 파견 근무, 지방군 훈련, 호랑이 잡기, 청계천 준설 작업, 소나무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훈련도감은 국왕에 대한 시위를 주도적으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7세기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반정 세력들이 훈련도감 대장과 미리 내통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전기와는 달리 훈련도감에서는 훈련대장을 비롯한 각 장교들과 군인들 간에 명확한 지휘 복종 체계가 설정되었기 때문이었다.
-
- 명확한 지휘 복종 체계 속에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선악을 판단하지 않고 복종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선후기 국왕들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인물로 훈련대장을 임명하였으며, 환국(換局)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발생할 경우 훈련대장은 즉시 교체되었으며 또 빈번히 처형되기도 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는 훈련도감 장교와 군인들에 대해서는 특별 대우와 치밀한 통제라는 양면책으로 주도면밀하게 관리하였다. 그러나 훈련도감 군인들은 조선후기 수많은 역모 사건에 연루되고 있었으며, 근대시기에는 임오군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
훈련도감 군인들은 국가에서 지급하는 급료와 면포가 서울 생활에 충분하지 않자 군역 근무 이외의 시간을 이용하여 각종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로서도 이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상업 활동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시패(市牌)를 지급하고 영업세를 감면해 주었다.
-
- 국가의 각종 특혜 속에서 전개된 훈련도감 군인들의 상업 활동은 시전 상인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어 조선후기 내내 이들간에는 끊임없는 마찰과 분규가 발생하였다. 훈련도감 군인 중 수공업 기술을 가진 자들은 가마솥, 망건, 갓과 갓끈, 각종 신발, 담배와 담뱃대, 방한구 등을 제조 판매하였다.
-
- 이들은 이러한 물품들은 자신들의 집 앞에 늘어놓고 장사를 하거나, 골목길을 다니면서 팔기도 하였다. 한편 일부 군인들은 백목전까지 열었다. 백목전은 면포전의 별칭으로 훈련도감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지급받은 면포를 백목전을 통해 다시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
훈련도감 군인들의 상업 활동과 더불어 훈련도감 군인들로 인하여 서울에는 종래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 새로운 문제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
- 이른바 도시문제였다. 훈련도감 군인들이 서울에 상주하게 되자 우선 주택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도성안에서는 택지의 확보가 쉽지 않게 되었다.
-
- 심지어 18세기 초에 이르면 사대부들도 집이 없어 세를 들어 사는 것이 보통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것은 조선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훈련도감 군인들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하는 승호제(陞戶制)에 의한 각 지방민의 상경과 서울의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의한 유입 인구의 증가 속에서 서울의 택지가 점차 부족하게 된 것이다. 훈련도감에서는 집이 없는 군인들을 위해 국가 소유의 빈 터를 택지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
- 효종대에는 창경궁 동쪽의 땅을 제공하였고, 숙종대에는 집이 없는 군인 300여 명에게 인경궁 옛터를 택지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도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도성내에서는 택지를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훈련도감 군인들은 성 밖의 산기슭이나 한강변 등지에 거주지를 마련하여 갔다.
-
-
또 훈련도감 군인들의 서울 상주는 서울의 위생 문제를 야기시켰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주로 빈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의 거주지는 불결하기 쉬웠다. 인구의 집중에 따라 안전한 식수의 확보나 오물의 청결한 처리 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전염병이 유행하게 될 때 가장 피해를 받는 지역이 훈련도감 군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숙종 44년(1718)에는 전염병으로 훈련도감 군인 460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훈련도감 군인의 서울 집중은 주택문제, 위생문제 등 이른바 도시문제를 야기시켰다.
-
- 그러나 당시 정부 관료나 지배층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것보다 훈련도감 군인으로 인한 각종 범죄의 빈발과 사회 질서, 신분 질서의 동요였다. 대략 한성부 전체 호수의 10% 이상을 훈련도감 군인과 그 가족들이 점유하자, 이들이 도성민의 생활이나 사회 분위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다.
-
훈련도감 군인들은 무력을 숭상하는 집단으로서 도성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 무기를 손에 쥐고 집단을 형성하게 되자 종래 신분 질서에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즉 이들은 서울 거리에서 떼를 지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한밤중에 공연히 총포를 쏘면서 도성민을 놀라게 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지위가 높은 금군을 집단적으로 구타하였다. 또 도성 거리에서 사대부를 만나도 조금도 피하려는 기색이 없이 노려보고 지나가거나, 사소한 일로 화를 내어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사대부가에 뛰어 들어가 사대부를 능욕하기도 하였다.
-
- 현종 4년(1663) 10월에는 술에 취해 횡포를 부리는 훈련도감 군인을 형조 금리가 잡아 가두자 동료 군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서 금리를 난타하고 그 군인을 빼내어 갔다. 이때 형조 사령들이 이들을 추적하자 훈련도감 군인들은 뒤쫒던 사령 2명을 집단 구타하여 거의 초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훈련도감 군인들에 의해 공권력조차 무시당하는 실정이었다.
-
-
또한 훈련도감 군인들은 하층민으로서 집단을 이루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와 강간 등 각종 범죄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인조 18년(1640) 이조참판 이식(李植)은 훈련도감 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 다니면서 사대부를 구타하고 부인을 겁취하였다고 상소하였다. 현종 7년(1666)에는 국왕의 온천 행차를 수행하던 훈련도감 군인 여러 명이 남편이 있는 여자를 강간하여 사회 문제로 비화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현종 11년에는 훈련도감 군인 4명이 강도단을 결성하여 서울의 서학동에 있는 의원 변영희의 집에 들어가 그 부인을 칼로 찔러 즉사시키고 그외 4명을 다치게 한 사건도 발생하였다.
-
훈련도감 군인들의 서울 상주와 이로 인한 이들의 집단적인 무력 과시, 각종 범죄 행동들은 문반 관료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문반 관료들은 군인을 조선전기처럼 지방에서 번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상주시키는 훈련도감 군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그 개편을 요구하였다.
-
- 또 효종 8년(1657) 송시열(宋時烈)은 국왕의 시위를 신분이 높은 양반 자제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군인들로 담당하게 하는 지금의 제도는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허목(許穆) 역시 오늘날 훈련도감 군제는 난(亂)을 키우는 것이지 군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훈련도감 군인들의 교만 방자함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군인들이 이렇게 교만 방자해서야 어떻게 외적을 막을 수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당색을 불문하고 문반 관료들은 훈련도감 군제를 변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러한 주장은 군비 유지를 고수하는 국왕과 훈척, 그리고 훈련대장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훈련도감은 조선후기 내내 존속하였다.
-
- 훈련도감 군인들은 군인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영세소상인이나 영세수공업자로 가족들과 함께생계를 꾸려나가던 사람들이었다. 군인 복무 이외에 각종 부업에 종사하였으나 이들은 낮은 수준의 생활을 하였다.
-
- 그런데 19세기 후반 들어 국가재정이 계속 악화되어 급료지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훈련도감 군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개항이후 외세의 영향에 따른 조선사회 내부의 변동은 군인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민씨 정권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구식군대를 도태시키고 일본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군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훈련도감 군인들은 근대화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장래에 실직, 도태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
-
- 또한 그들은 일제의 경제 침략으로 인해 도시하층민들과 함께 소비자로서, 그리고 상업 수공업 종사자로서 이중적인 피해를 입어 결국 가장 심각한 피해를 받고 있는 집단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훈련도감 군인들은 1882년 개화를 반대하는 임오군란을 주도하였고 이 사건으로 훈련도감은 혁파되고 그 군인들은 해체되었다.
-
-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와 지주 중심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이들은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