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씨족가전(氏族家傳) 『일본서기』 천무기를 보면 ‘기정(記定)’ 사업을 전후하여 씨족에 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오고 사성(賜姓)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무천황은 681년 9월에 각 씨족마다 ‘씨상(氏上)’을 정하여 보고하도록 하였고, 684년에는 씨족들의 사회적·정치적 등급을 확정한 8색의 성을 확정하여 씨족들에게 새로운 성을 주었다.
『일본서기』에서 천무천황대에 8색성 질서 안에 편입된 씨족은 174씨이다. 그런데 새로운 씨성 질서 속에 씨족들을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그 작업을 위해 기준이 되는 씨족 대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과거 오랫동안 대화정권에서 활약한 씨족들의 계보나 활약상은 『제기』와 『구사』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새로 등장한 씨족들은 달랐다. 천무조정에서는 이들 씨족에게 자신들의 조상계보나 활약한 이야기를 담은 ‘가기(家記)’, 혹은 ‘가전(家傳)’을 제출하도록 하였을것이다. 이들 씨족들은 계보를 조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이후 691년 8월에는 지통천황(持統天皇)이 대삼륜(大三輪) 등의 18씨에게 조상의 ‘묘기(墓記)’를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묘기’는 씨족의 기원과 계보, 그리고 공적담과 같은 씨족의 ‘가전’과 같은 것으로 『일본서기』 편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지통조에 ‘묘기’를 제출한 씨족들은 대부분 흠명조 이후 대화 연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신하를 배출하였던 집안이다. 이 가운데 대반(大伴)·기(紀)·물부(物部)씨 등은 계체기와 흠명기의 가야나 백제와의 관련기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씨족들이다. 지통조의 ‘묘기’ 제출은 『일본서기』 편찬과 관계가 깊으므로, 계체기와 흠명기에 보이는 일본 유력씨족들의 활약담은 이 시기에 제출된 ‘묘기’에 의해 채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천황가의 치적과 관련된 부분은 취사선택을 당하거나 개변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씨족들의 대외활동에 관한 전승은 천황가의 치적을 선양하는 데 보탬이 되도록 개변되었을 것이다.
한편 같은 사건기록에서 여러 씨족의 전승이 중복기술 되기도 하였고, 기년(紀年)이 결락되었거나, 서로 다른 역(曆, 예컨대 원가력과 의봉력)에 의한 기년의 차이도 보인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련된 기사에서 흔히 보이는 모순이나 중복 또는 기년적 착오는 이러한 원사료의 특징이나 편찬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4) 공식기록 일본 조정의 기록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동서사부(東西史部)가 정부의 기록을 관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록 조직적으로 기록을 보존하는 방법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록을 위한 선례로써 혹은 우연히 잔존하게 된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효덕기의 정치개혁에 관한 기술이나, 제명기에 대재부(大宰府)에서 정리하고 있던 외교문서와 같은 것도 편찬에 이용되었던 기록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효덕기의 대화개신에 관한 기술이나 그 이전의 민달·추고기의 ‘임나의 조’라든지, 한반도 삼국과의 외교형식을 둘러싼 이야기등에 많은 개변이 이루어져 『일본서기』에 실렸음은 고려해야 한다. 한편 천무·지통기 이후의 기술이 실록과 같은 성격을 보이는 것도 대화조정의 공식기록을 기본자료로 이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기록은 대화개신 당시 소아씨가 멸망하면서 『천황기』와 『국기』가 불탔고, ‘임신의 난’ 때 대진궁(大津宮)이 폐허가 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명이 있는 자료나 기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한반도 관련 기록들이 『일본서기』 편찬 당시 더욱 중요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 개인수기(個人手記)·일기 일본에서 작성된 개인기록물로는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 고려사문도현(高麗寺門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가 제명·천지기에 인용되어 있고, 등원겸족(藤原鎌足)의 비문이 보인다. 서명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후대의 『석일본기』의 인용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천무기의 임신의 난에 대한 기사는 『안두숙녜지덕일기(安斗宿禰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를 참조해서 기록한 부분이 있다. 먼저 『이길련박덕서』는 제명·천지조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문무조에는 율령찬정에도 참여했던 이길련박덕의 개인기록이다. 『이길련박덕서』는 『일본서기』 제명기에 분주의 형태로 세 군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왜국의 제4차 견당사가 제명 5년(659) 7월에 축자(筑紫)에서 출발하여 제명 7년(661)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왕복과정 및 당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는 한반도 원정을 앞둔 당이 왜국의 사신단을 장안(長安)에 가둔 사실이나 탐라(耽羅)가 왜국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경위 등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명 5년(659) 추7월조에는 이길련박덕과 같이 당에 파견되었던 난파길사남인(難波吉士男人)의 기록인 『난파길사남인서(難波吉士男人書)』도 인용되어 있다. 『난파길사남인서』가 『일본서기』에 인용된 유일한 곳이다. 그 내용은 견당사 대사(大使)의 배가 좌초됨에 따라 부사(副使)가 대신 천자를 알현하고 하이(蝦夷)를 바쳤다고 적고 있다. 『이길련박덕서』의 내용과는 달리 자신의 경험담을 기록하지 않았다. 『난파길사남인서』는 『이길련박덕서』와 함께 제명·천지조에 견당사 일원의 수행록 같은 정리된 기록물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일본세기(日本世記)』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 도현(道顯)에 의해서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현은 백제 멸망 전에 왜국으로 건너가 당시 국제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왜국 내에서 등원겸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군사고문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세기』를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세기』는 『일본서기』의 제명·천지기에 분주(分註)의 형태로 네 군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백제의 멸망과 원인, 복신의 풍장 귀국요청, 고구려의 멸망 과정, 그리고 등원겸족의 사망 관련기사이다. 즉 백제의 멸망을 시작으로 7세기 후반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일본세기』에는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일본세기』는 『일본서기』에 인용될 때 분주로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문으로도 기술되었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본문을 구성하는 데 용어 및 내용의 통일보다는 『일본세기』의 원문을 더욱 존중하였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인용방식과 태도는 비단 『일본세기』뿐만 아니라 서명을 밝히고 있는 자료를 인용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대외관계사 부분에서 자주 엿볼 수 있다.
6) 사사연기(寺社緣起) 불교관계 기사에는 『원흥사연기(元興寺緣起)』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원흥사연기』는 평안(平安)시대에 집록된 것이지만 「원흥사사탑로반명(元興寺寺塔露盤銘)」이나 「장육광명(丈六光銘)」과 같은 추고조(推古朝) 유문(遺文)이 실려있다. 숭준·추고기의 불교관계기사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길야비소사(吉野比蘇寺, 흠명기)와 남연판전사(南淵坂田寺, 용명기)에서 불상의 유래를 전하는 기사와 같은 것도 사찰연기에 채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7) 별권(別卷) 『일본서기』 웅략 22년 7월조에는 소위 ‘포도전설(浦島傳說)’을 간략하게 기록한 말미에 “자세한 이야기는 별권에 있다.”고 하였는데 별권이라는 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별권이라고 하였으므로 『일본서기』와 다른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경우의 별권은 편찬과정에서 별도로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며, 『일본서기』 편찬자가 참조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일본서기』완성기사에는 별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어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어느 시기 편찬계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2. 한반도 관련 문헌
1) 백제삼서(百濟三書) 『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가 신공기(神功紀)에서 흠명기(欽明紀)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백제기』라는 서명은 신공기와 응신기(應神紀), 웅략기(雄略紀)에 보이고, 『백제본기』는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에, 『백제신찬』은 웅략기와 무열기(武烈紀)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서기』의 분주에 그 출전을 명기한 경우만을 든 것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본문기사에서 인용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인용하고 있는 권에서는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가야 등 한반도 관계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본 측 사료가 부족한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삼서는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어서 그 성격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의 기록이 일본에 대해서 ‘귀국(貴國)’ 등의 경칭어를 비롯하여 ‘천황(天皇)’, ‘일본(日本)’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면, 이러한 기록은 663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많은 백제인 망명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관인이 되면서 이들이 가져온 기록을 근거로 백제인이 편찬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 기록의 백제왕력 등은 「무령왕지석」이나 『삼국사기』의 관련기사들과 대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어 비교적 신빙성이 높다. 이외에도 일본 내의 백제계 후예씨족들과 대외관계에 종사한 일본 씨족들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편찬진의 백제삼서에 대한 신뢰는 계체기에서 『백제본기』의 기년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두터웠다.
그러나 이 기록들을 역사복원의 자료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편찬되는 과정이나 『일본서기』에 인용되는 과정에서 많은 윤색과 개변이 이루어졌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본 율령용어의 사용이나 천황에 영합하는 기술, 백제의 가야정책과 그 역사에 대해 기록한 부분에서 현저하게 개변이 이루어졌다. 백제삼서의 인용과정을 검토해 보면, 『일본서기』 편찬방침 및 7~8세기 일본의 세계관,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웅략 21년에는 『일본구기(日本舊記)』가 분주로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백제관련 기사이다. 『일본구기』는 다른 곳에 전혀 보이지 않아 그 사서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 단 내용에 구마나리의 위치를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으로 기록하여 웅략의 하사로 조작했던 본문에 대한 보완적인 성격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현(縣)과 같은 율령적 용어의 사용이나 백제의 새로운 도읍을 천황이 하사했다는 논리 등은 위의 백제삼서와 비슷한 사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2) 가야 측 자료 현재 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인다. 그러나 한국 측 문헌에는 단편적인 기록밖에 보이지 않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한국 측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야 국명이나 인명, 그리고 지명 등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많은 부분이 백제삼서, 특히 『백제본기』가 인용된 곳에서 보이지만, 가야와의 교류에서 활약한 근강씨(近江氏)나 길사계(吉士系) 씨족들의 전승에도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백제삼서가 백제멸망 후 망명백제인과 관계가 있다면 『일본서기』 가야관련 기록 역시 망명가야인들의 기록물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일본서기』에 보이는 가야관련 기사는 백제관련 기사와 달리 그 출처를 명확히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대부분 백제 및 신라와 같이 등장하며, 이외에 일본 측 씨족들의 대외교류 활약 속에서 일본적 관념으로 포장되어 기술되었다. 또한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활약한 가야계 인물이나 씨족 등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가야 측 원자료가 『일본서기』에 인용되기 이전에 백제삼서 등의 백제 측 문헌에 정리되었거나, 일본 측 씨족가전의 자료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한편으로는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대(對)가야 관련씨족 전승과 함께 기사로 구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계체 23년 4월조 기사에 분주로 인용된 ‘일본(一本)’에서 구사모라(久斯牟羅)라는 가야 지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가야 측 원자료가 ‘일본(一本)’이라는 형태로 남아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도 가야에서 정리된 자료인지, 일본 내에서 정리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3. 중국 측 문헌
『일본서기』에는 본문의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서 80종 이상의 중국문헌이대부분의 권에 걸쳐 이용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용된 문헌은 「위지」와 「진기거주」뿐이다. 「위지」는 신공기 39·40·43년조에 인용되어 있는데 이른바 비미호(卑彌呼)를 신공황후로 간주한 것으로 보이며, 이 기사들 이외에는 다른 기사가 없다. 또 「진기거주」도 역시 신공기 66년조에 보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 인용되어 있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일본관계기사를 그대로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일본 측 기사가 없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중국사서와 중국력의 신용과 권위를 빌려 『일본서기』 신공기 기년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설정된 신공기의 기년은 『일본서기』전체 기년구성에 중요한 중심축으로 활용되었다.
「위지」와 「진기거주」 이외의 중국문헌들은 『일본서기』의 문장을 윤색하거나 기록이 없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그동안 『일본서기』 ‘출전론’의 연구 성과로 『일본서기』 문장 중에는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양서』, 『수서』, 『예문유취』, 『문선』, 『금광명최승왕경』, 『회남자』, 『당고조실록』 등을 참고로 작성된 것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편찬태도는 『일본서기』에만 있는 특색이고 그 이후의 사서인 『속일본기』 등에서는 아직 지적된 바가 없다. 『속일본기』 등의 기사는 기본적으로『외기일기(外記日記)』 등의 정부기록과 조칙 같은 그 당시의 것이므로 전체적으로 실록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과 관계없는 중국문헌의 내용을 상당히 길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편찬자의 편찬태도와 『일본서기』의 사료적 성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표 2 『일본서기』에 인용된 중국문헌표
구분
『史記』
『漢書』
『後漢書』
『三國志』
『梁書』
『隋書』
『藝文類聚』
『文選』
『金光明最勝王經』
『淮南子』
『唐實錄』
『東觀漢記』
1·2 神代
○
○
3 神武
○
○
4 綏靖~開化
5 崇神
○
6 垂仁
○
7 景行·成務
○
○
8 仲哀
9 神功
○
○
○
○
10 應神
○
11 仁德
○
○
○
12 履中·反正
13 允恭·安康
○
○
○
○
14 雄略
○
○
○
○
○
15 淸寧·仁賢
○
○
○
○
○
○
○
○
16 武烈
○
○
○
○
17 繼體
○
○
○
○
18 安閑·宣化
○
○
19 欽明
○
○
○
○
○
○
○
20 敏達
21 用明·崇峻
22 推古
○
23 舒明
○
24 皇極
25 孝德
○
○
○
○
26 齊明
○
27 天智
○
○
28·29 天武
○
30 持統
○
○
특히 천황을 포함한 인물들을 묘사한 경우, 중국문헌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어구를 수정한 부분도 보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 당시 일본의 상황과 부합되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중국사서의 체제를 보면 한결같이 이름, 부모, 성장기에서 성년기까지의 행적과 그 인물에 대한 성격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중국사서에 필적하는 사서를 만들고자 했던 편찬자가 기재할 사료가 없는 경우 별도의 방법으로 공백을 채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인물상을묘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중국식 표현이 갖는 과장과 추상적인 어구를 열거함으로써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일본서기』 문장을 윤색하고 기록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용한 중국 문헌은 많으나, 이들의 많은 부분이 『예문유취(藝文類聚)』를 이용하여 간접적으로 인용하였다. 당대의 문인이라고 해도 이른바 경전의 용례를 금방 생각해내서 적절하게 구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경우 육조시대 이래 유서(類書)가 많이 만들어졌다. 『수문전어람(修文殿御覽)』, 『예문유취』, 『북당서초(北堂書鈔)』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유서를 참고하면 일일이 원전을 암기해야 하거나 다시 찾을 필요 없이 전거가 있는 어구를 활용할수 있다.
여기서 『일본서기』 편찬자가 『일본서기』의 문장을 작성할 때 특정한 중국문헌 그 자체를 참고하였는지 아니면 그것을 포함하고 있는 유서를 참고하였는지의 여부가 다시 문제가 된다. 만약 짧고 고립되어 있는 문장일 경우에 문장에 차이가 없으면 둘 중에 어느 쪽인지를 결정하기 더욱 곤란하다. 그러나 많은 문헌이 전거로 사용되었고 그것들이 『예문유취』 등과 동일하거나 근접할 경우에는 그 유서에 의거한 것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유서 이외의 단행본인 경우에는 하나의 예로는 알 수 없지만, 같은 권의 다른 부분에서도 동일한 문헌으로부터 인용을 했다든가, 혹은 인접한 다른 권에 같은 문헌으로부터의 인용이 있는 경우에는 여러 문헌에서 적절한 어구를 취하여 사용하였다기보다는 동일한 문헌에서 한꺼번에 많은 어구나 문장을 인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어떤 권의 담당자가 주로 어떤 특정한 문헌 중에서 적절한 어구를 집중적으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편찬자의 중국전적에 대한 소양이나 한문 구사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구분론’과 연결시켜 볼 수도 있다.
한편 일본과 관계된 기록을 담고 있는 중국문헌인데도 인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송서(宋書)』의 경우 왜5왕 관련 기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일본서기』 추고기의 대중관계 기사와 유사한 내용이『수서』에도 실려있는데 전적으로 묵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중국문헌의 인용방식과 백제삼서를 포함한 다른 문헌의 인용방식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사서의 체제를 모범으로 하면서도 거기에 기록된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천황중심사관이라는 『일본서기』 편찬방침과 어긋나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일본서기』 편찬에 이용된 중국문헌을 파악하는 작업은 『일본서기』 문장구성 과정에 대한 해명뿐만 아니라 그 작성 시기까지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좋은 예로 흠명 13년의 불교전래에 관한 기사를 들 수 있다. 이 해 백제 성왕이 일본 천황에게 보낸 상표문의 출전에 관해서 1891년 12월에 간행된 『표주일본기(標注日本紀)』에서는 그중 42자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에서도 『금광명최승왕경』을 인용하면서 이를 취사선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견당승려 도자(道慈)가 『일본서기』 불교전래기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이러한 시각은 현재까지 인정되고 있다. 결국 이 기사는 『일본서기』 완성 직전에 서술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일본서기』 편찬과정의 한 단면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4. 기타–서명을 밝히고 있지 않는 자료
『일본서기』에는 전권에 걸쳐서 ‘일서(一書)’, ‘혹본(或本)’ 등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신대권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하나의 본문에서 많은 경우에는 ‘일서’를 11개까지 들고 있는 예도 있다. 앞의 표-1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자료들은 『일본서기』 권14 웅략기를 경계로 그 이전은 서(書) 계통의 기록물이 인용되었으며, 웅략기부터는 본(本) 계통의 기록물이 인용되었다. 서 계통과 본 계통의 기록물이 웅략기를 경계로 구분되어 인용된 이유에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단순히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로서 특정한 명칭이 없어서 『일본서기』를 담당·편집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명명된 것일 수 있고, 『일본서기』의 편찬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성립한 교본(橋本)이 ‘일서(一書)’ 혹은 ‘일본(一本)’ 등으로 전해지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체로 서(書) 계통의 기록물은 신대(神代)를 시작으로 신화나 신(神)·왕족(王族)의 계보를 담고 있다. 그리고 본(本) 계통의 기록물은 정부관계기록이나 씨족전승 그리고 한반도 관계 내용을 담고 있다.
본 계통의 ‘일본(一本)’과 ‘혹본(或本)’ 가운데는 한반도 관계 용어와 더불어 사실성 높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어 주목된다. 먼저 ‘일본(一本)’은 『일본서기』 웅략기부터 제명기까지 모두 29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10곳이 웅략기에 보인다. 여기서 한 곳만 신라관련 내용으로 나머지는 대왕가 인물과 노래가사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청녕·선화기와 무열기도 노래가사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이에 비해 계체기와 흠명기는 대부분 한반도 관계 기사에 분주로 인용되어있다. 계체기의 경우 계체 20년 추9월조부터 계체 24년 추9월 사이에 7곳이 보인다. 7곳 가운데 4곳이 가야, 2곳은 신라, 나머지 1곳은 일본 국내 전승이다. 흠명기에는 ‘일본(一本)’이 흠명 15년 12월조를 시작으로 흠명 23년 8월조까지 5곳에 걸쳐 분주로 나온다. ‘일본(一本)’의 내용은 성왕의 사망을 비롯하여 신라와 백제의 관계, 대반씨와 고구려 관계, 임나 멸망에 대한 내용이다.‘일본(一本)’의 내용이나 그 본문은 신라인명이나 가야인명이 많이 나오고 그 표기 방법도 『백제본기(百濟本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혹본(或本)’은 『일본서기』 웅략기부터 천지기까지 모두 59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일본(一本)’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 본문의 보충 설명 또는 본문의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분주로 인용되었다. 그 내용은 왜국(倭國)의 국내기사와 대외관계기사, 가전류(家傳類) 성격을 지닌 기록 등 다양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웅략기에는 길비씨(吉備氏) 관련 기사, 청녕·계체·민달·용명·황극기의 경우는 대왕 및 대왕가 관련 기사의 보충설명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효덕기에는 박시진조전내진(朴市秦造田來津) 등 씨족들의 모반기사 및 견당사 일원의 관련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효덕기 ‘혹본(或本)’은 왜국 자체의 대내외 기록물로 보이며, 7세기 중반 왜국 내에서도 기록 정리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일본서기』에서 ‘혹본’이 가장 많이 인용된 곳은 제명기와 천지기이다. 모두 23곳에 걸쳐 인용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제명 4년(658) 시세조와 제명 6년 9월조를 포함하여 8곳이 백제 관련 기록이다. 이 중에서 제명 4년 시세조와제명 6년 9월조 ‘혹본(或本)’에는 ‘노수리지산(怒受利之山)’,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등과 같은 백제자음가명(百濟字音假名)이 보이고 있고, 백제의 왕성을 ‘아왕성(我王城)’이라고 표현한 점 등을 볼 때, 망명백제인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본(一本)’과 ‘혹본(或本)’의 내용을 보면 기사의 성격 등은 대체로 비슷하다. 따라서 내용의 차이나 사료적 성격 차이로 인해 ‘일본(一本)’이나 ‘혹본’으로 구별되어 인용된 것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혹본’ 쪽이 ‘일본(一本)’보다는 정리시기가 늦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서 ‘혹본’이 가장 많이 인용되어 있는 제명·천지기에는 ‘일본(一本)’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망명 백제인의 기록으로 보이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웅략(雄略) 8년 춘2월조에 ‘일본(一本)’과 ‘혹본’이 동시에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 각 기별 편찬차가 이들 자료를 인용하는 단계에서 명명된 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일본’과 ‘혹본’은 정리된 시기가 다르고『일본서기』 편찬에 인용될 때 이미 구별된 자료로서 존재해 있었다는 점만 추정 가능할 뿐이다.
한편 ‘구본(舊本)’은 『일본서기』에 웅략 2년(458) 추7월조를 시작으로 인현전기(仁賢前紀, 487), 흠명(欽明) 23년(562) 8월조, 민달(敏達) 12년(583) 시세조, 황극(皇極) 4년(645) 춘정월조 등 모두 5곳에 걸쳐 나온다. 그 내용은 국내전승과 대외 관계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일찍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인용된 ‘구본(舊本)’을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작성하였다고 전해지는 『구사본기(舊事本紀)』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구사본기』는 『일본서기』 및 기타 다른 자료를 참고로 평안(平安)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구본’에는 대반씨(大伴氏)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보이지만, 계체·흠명기에서 대반씨 가기(家記)로 추정되는 기록이 ‘일본(一本)’으로도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씨족 관련 전승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구본(舊本)’은 명칭이 시사하듯이 ‘일본(一本)’이 정리되기 이전의 단편적인 자료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