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안태의례 역사적 가치 뛰어나"
굿모닝충청 창간 11주년: "더 나은 내일 향한 동행"
[충남의 태실 문화, 세계유산 꿈꾼다] ②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가보니
충청권 대표 인터넷신문 굿모닝충청은 오는 7월 1일 창간 11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충남의 태실 문화, 세계유산 꿈꾼다'를 준비했습니다. 충남을 비롯해 전국에 산재해 있는 태실을 점검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독자 및 충청인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충남도청 소재지인 내포신도시에서 명종대왕 태실과 비가 있는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까지는 승용차로 약 40분 정도 걸렸다. (서산시 제공/ 굿모닝충청=김갑수 기자)
[굿모닝충청 김갑수 기자] 충남도청 소재지인 내포신도시에서 명종대왕 태실과 비가 있는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까지는 승용차로 약 40분 정도 걸렸다.
주말인 10일 오전 10시쯤 출발해 예산 덕산을 거쳐 마애여래삼존상과 가까운 고풍저수지를 지나 해미읍성 방향으로 좌회전하니 얼마 안 가 명종대왕 태실 이정표를 만날 수 있었다.
좁은 농로를 따라 좀 더 들어가니 안내판이 있는 공터를 만났다. 주차장 등 관련 시설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워 보였다. 논일을 하던 주민에게 “여기가 명종대왕 태실 맞느냐?”고 물어본 뒤 “그 위로 올라가라”는 답변을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해발 128m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오르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경사가 급해 숨이 턱까지 막힐 정도였다. 약 7~8분을 오르니 임도가 나타났고, 거기서부터는 한결 수월한 길이 이어졌다.
신우대 숲을 지나니 우람한 나무 아래 공터가 나왔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돌로 된 안내판과 함께 계단이 보였다. 잠시 뒤 탁 트인 공간에는 명종대왕 태실과 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지만 명당의 기운은 충분히 느껴졌다. 동서남북 막힘이 없었고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어디든 볼 수 있었다.
주말인 10일 오전 10시쯤 출발해 예산 덕산을 거쳐 마애여래삼존상과 가까운 고풍저수지를 지나 해미읍성 방향으로 좌회전하니 얼마 안 가 명종대왕 태실 이정표를 만날 수 있었다.
멀리 명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있는 태봉산이 보인다. 한우개량사업소가 목초지로 조성한 주변 산과 달리 숲이 조성된 것이 눈길을 끈다.
좁은 농로를 따라 얼마 가지 않아 안내판이 있는 공터를 만났다. 주차장 등 관련 시설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워 보였다.
약 7~8분을 오르니 임도가 나타났고, 거기서부터는 한결 수월한 길이 이어졌다.
신우대 숲을 지나니 우람한 나무 아래 공터가 나왔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돌로 된 안내판과 함께 계단이 보였다.
태실은 예상보다 매우 컸다. 마치 큰 항아리를 거꾸로 놓은 모양새였다. 전체적인 석물의 구도와 미술적 가치 역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지난 2018년 보물 제1976호로 승격·지정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2019년 11월 서산시에 제출한 ‘명종대왕 태실 및 비 종합정비계획 최종보고서’를 살펴보면 그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명종은 1534년 중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538년 왕실의례에 따라 태를 묻은 아기씨태실과 아기씨태실비가 건립됐다. 형 인종의 급작스러운 승하(1545년)로 명종은 1546년 조선의 13대 국왕으로 등극했으며, 태실도 가봉(加封)돼 석물과 함께 주상전하태실비가 건립됐다. 1711년에는 종전의 비석이 손상돼 개각해 세우기도 했다.
주요 시설을 살펴보면 태실부는 사방석과 중동석, 개첨석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다른 가봉태실과 마찬가지로 왕릉의 장명등(長明燈)이나 사찰의 부도(浮屠) 등 석조각의 외형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또한 난간부는 기능과 형태에 따라 연엽주석과 연엽동자주석, 횡죽석으로 구분된다.
계속해서 기단부는 지면과 직접 닿는 부재로, 위치상 하부의 태항아리를 보호하고 상부 부재들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밖에 비는 1538년 세워진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와 1546년 10월 명종 즉위 다음해 건립된 주상전하태실비(主上殿下胎室碑), 1711년(조선 숙종 37년) 다시 세워진 주상전하태실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도적이 명종의 태봉을 허물었다. 이 태봉은 서산에 있는데 간악한 백성이 군수를 해치려고 하여 태실의 돌난간을 깨뜨렸다(1575년, 선조 8년)”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28년에는 일제에 의해 태항아리가 무단 반출, 태실 석물들이 도괴(倒壞)돼 원형을 잃었으며 197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이후 1986년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됐으며 2018년에는 보물 제1976호로 승격·지정된 상태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해 문외한(門外漢)이지만 명당의 기운은 충분히 느껴졌다. 동서남북 막힘이 없었고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어디든 볼 수 있었다.
주요 시설을 살펴보면 태실부는 사방석과 중동석, 개첨석으로 구성돼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다른 가봉태실과 마찬가지로 왕릉의 장명등(長明燈)이나 사찰의 부도(浮屠) 등 석조각의 외형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밖에 비는 1538년 세워진 대군춘령아기씨태실비(大君椿齡阿只氏胎室)와 1546년 10월 명종 즉위 다음해 건립된 주상전하태실비(主上殿下胎室碑), 1711년(조선 숙종 37년) 다시 세워진 주상전하태실비가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정밀안전진단 결과에 따른 전면 해체 및 위험요인 개선 등 ‘해체보수’ 수행을 권고했다. (서산시 제공)
문화재청은 “조선 왕실의 많은 태실이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변형된 경우가 상당한 데 비해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져 있고. 원래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서 주변 지형 등 환경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크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재청은 또 “태실과 가봉태실, 가봉개수태실의 변천 과정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고, 조선 왕실 안태의례(安胎儀禮)의 역사적 자료이자 한국 미술사의 태실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는 구조적인 안정성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며 “태실 석물을 중심으로 상석과 사방석 부재가 침하된 현상이 육안으로 관찰돼 지반 침하가 의심되며, 중동석과 개첨석의 기울어짐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정밀안전진단 결과에 따른 전면 해체 및 위험요인 개선 등 ‘해체보수’ 수행을 권고했다.
서산시는 이를 근거로 후속 대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있다. 시는 먼저 총 6억6000만 원을 들여 연말까지 해체보수와 지의류(地衣類) 제거 및 일부 발굴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특히 충남도가 추진 중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을 주시하며 자체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할 방침이다.
일각에서는 명종대왕 태실 및 비를 국보로 승격·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는 <굿모닝충청>과 통화에서 “현재로선 해당 문화재에 대한 보존이 더 시급한 상황이다. (앞으로는) 진입로를 비롯한 주변 정비 사업을 위해 (토지주인) 농림축산식품부와 협의할 예정”이라며 “문화재청 산하 문화재수리기술위원회의 심도 있는 검토를 토대로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첫댓글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큰 공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