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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교 이순화가 뿌린 혼종 DNA
천부교 박태선, 통일교 문선명, 영생교 조희성, JMS 정명석, 신천지 이만희 등…. 현대 한국교회와 사회에 끊임없이 논란·물의를 일으켰거나 여전히 일으키고 있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들은 이제 일반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의 과도기를 거치며 확산한 수많은 신흥종교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 그 정점에는 '정도교'의 창시자 '이순화'라는 인물이 서 있다.
경북 거창 출신 이순화(1870~1936)는 평범한 농민의 딸로 성장해 남편 진경성과 함께 1911년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가 38세 때 다섯 살 아들이 병에 들었는데, 물감 장수의 부인에게 전도받아 예수를 믿고 아들의 병이 낫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후로 기도 생활에 전념한 이순화는 48세 되던 1917년 3월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이제부터 이 두 가지 기旗(녹십자기·태극팔괘기)를 가지고 일을 하여 천하 만민에게 신시대 천국 건설 운동과 진리 방법을 가르쳐서 나의 뜻을 이루고 너희 세계 인류가 천국 복락을 누리도록 하여라. (중략)
품질 좋은 단군 자손들아! 성신으로 교통시켜 줄 것이니 시급히 독립운동을 일으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라. 그리하여 내가 너희 나라에 거하여 심판 권세 가지고 인간들의 모든 죄악을 심판한 후에 천하만국을 통일하여 일체로 화평케 다스려 천국 복락을 줄 것이고 만일 너희 나라가 독립국가가 되지 못하면, 내가 너희 나라에서 거할 수 없고, 세상은 불원간 망할 것이니라. (중략)
각국 각처에 살고 있는 조선 민족은 태극기를 만들어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어라. 이같이 하라고 하는 뜻은 내가 이 천지 구만 년 천국 시대에는 조선에 거하여 각국 대표자들을 없애버리고 통일 천하에 한 법으로 다스려 일체로 천국 복락을 누리기 위함이니 (하략)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1쪽, 괄호 안은 필자 추가]
기도 중에 세계 통일 평화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녹십자기綠十字旗', 세계 정돈 평화 시대를 의미하는 '태극팔괘기太極八卦旗'는 정도교 창교주 이순화 신앙 운동의 핵심적인 상징이 됐다.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사대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를 달고 '예수교 찬미가'와 '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제의 '예심종결 결정서'는 이순화와 그의 추종자가 시위 도중 배포한 불온 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미년 6월 26일 천명天命을 받아서 천하 만민에게 고한다. 나는 천天, 인人, 만물을 만들어 나라마다 그 대표자를 정해 두었는데, 각 대표자들은 사욕私慾으로 분쟁을 일으켜 만국을 부패시킨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선 나라에 만국독립기인 (태극)팔괘기와 십자기를 부여했는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잘 수호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중략) 선천先天 시대에 사용하던 기는 전부 파기하고 내가 주는 팔괘기와 십자기를 게양하면 만국 만민이 구제될 것이다. 나는 천사에게 명하여 만국대표기를 경성 동서남북 사대문에 세움으로써 6월 29일을 기해 어떤 사람이라도 이 기를 수호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또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은 서로 융화하여 부패시키고 망치는 일을 중지하면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이다."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1920년 4월 20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313쪽]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6개월의 징역을 마치고 1923년 출옥한 이순화는 1924년 3월 초 신자 400여 명을 이끌고 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정도교' 포교 활동을 하다 1936년 1월 26일 67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이순화의 별세 후 정도교 2대 교주는 그의 아들 진영수가 맡게 됐고, 이후에도 조선 독립과 일제 패망을 부르짖고, 천황제 비판 등으로 일제의 검속과 탄압을 겪었다.
정도교 2대 교주 진영수(사진 오른쪽)와 故 탁명환 소장. 정도교 교당 배후에는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정도교는 체계적인 교리와 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천국 건설의 중심지로 한국을 예정"해 놓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만국에서 국어, 국문, 국기를 다 일체로 없애 버리고, 한국어와 국문, 한국기(태극기) 그리고 녹십자기를 세계만방에서 다 같이 사용하도록 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이러한 내용은 이순화가 받은 계시를 경전으로 정리한 <정도교 법문>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정도교 성가>에서도 태극기와 십자기의 상징성·중요성을 다양한 곡이 등장한다.
1. 펄럭이는 녹십자기 계룡주산 형제봉 밑
지상천국 기호므로 우리 함께 모셔 오세
2. 녹십자 팔괘기는 신시대의 표준 기호
만민들의 생문방길 구원 기호 분명하다.
3. 성스럽고 거룩하신 성부 뜻을 깨달아서
썩은 세상 바로잡아 빛 세계를 맞이하세
4. 천하 만민 형제들아 일심 통일 단결로써
십자기 뜻 깨달아서 영생 길로 걸어가세
5. 신시대의 녹십자기 반공중에 높이 솟아
날으는 것 바라볼 때 기쁘고도 즐겁도다
(<정도교 성가> 제59장, '성부 뜻을 깨달아서 십자팔괘 높이 들고 천국 건설' 중에서)
정도교의 정기 예배는 매월 3회 음력 9일, 19일, 29일에 시행했으며, 태극팔괘기와 녹십자기가 장식된 천단天壇에서 녹십자기가 그려진 신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백색포를 둘렀다.
계룡산에 있었던 정도교 본부와 그 신자들(사진 위). 유니폼에는 녹십자가 그려져 있고, 양쪽에 녹십자기와 팔괘태극기를 들고 있다. 제단(사진 아래)도 녹십자기와 태극기로 장식돼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현대종교> 2020년 3월호에 기고한 '정도교와 이순화'라는 글에서, 정도교가 처음에는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924년 계룡산 신도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감록과 도참사상이 혼합된 '신흥종교'로 변형"됐으며, 또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과감하게 실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순화의 정도교는 굴절된 민족주의적 혼합종교의 효시가 되어,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발흥·확산에 지대하고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천국의 도래와 정도령 혹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한 이순화의 논리는 이후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 세력에 파급됐다.
한국 주요 이단 계보도. 싸이비가 판치는 세상_싸이판2 유튜브 채널 갈무리
새주파 김성도와 그 후예들
이순화와 더불어 서북 지역에서 발흥한 '새주파(성주교)'의 김성도는, 이순화가 보여 준 민족주의적 특성을 답습하면서도 현대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윤리적 일탈에 명분을 제공하는 교리의 해석·변형을 모색했다.
"1923년 음력 4월 2일에 김성도는 입신하여 천군 천사들을 만났고 영계에 들어갈 때에 사탄의 방해를 받았으나 이기고 들어가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때 예수와 나눈 대화 속에는 죄의 뿌리가 음란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열흘 뒤인 음력 4월 12일에는 예수와의 두 번째 면담이 있게 되었는데, 이때 예수로부터 '재림 주님이 육신을 쓴 인간으로 한반도에 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최중현,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생각하는백성), 24쪽]
'새주파'라는 이름은 "새 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순화의 한반도 메시아 도래설 외에도 죄의 근원이 '음란'이라는 논리를 구축한다. 이는 세 번째 결혼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 아들의 죽음과 상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시집 가족들의 박해 경험에서 비롯한, 가부장적 권력과 남성 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거부감·혐오가 성서 해석에 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새주파에 합류한 예수교회의 창립 주역 백남주 목사와 그의 제자 김백문이 체계적으로 계승해 나간다. 김성도의 신비체험과 성적 타락설, 한반도 재림주 도래설 등의 주장을 문제시한 당시 한국장로교회는 1925년 그를 출교 처분했다.
새주파 교주 김성도(사진 위)와 그의 사상을 체계화한 백남주(사진 아래 왼쪽)·김백문.
백남주는 신비주의자 스웨덴보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새 생명의 길>(1933)에서 "구약, 신약, 새 생명의 시대"라는 '삼시대론'을 펴면서, 이 시대에 새로운 구원자가 도래할 것이라는 신흥종교 이론을 개진했다. 그의 수제자 김백문은 1937년 새주파 성주교 창립 예배 당시 사회를 볼 정도로 백남주·김성도의 메시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경기도 파주에 '예수교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한 김백문은 <성신신학>(1954)·<기독교 근본원리>(1958)에서 인간의 타락을 '성적 타락'으로 보고, 백남주의 삼시대론을 계승하며 이후 문선명의 <원리해설>(1957)과 '통일교'의 발흥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75년 통일교에서 개최한 서울 여의도 '구국 세계 대회'. 100만 인파가 운집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행사였다. 행사장 좌우에는 욱일기와 유사한 형태의 통일교 상징이, 중앙에는 만국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문선명이 1975년 1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주최한 한국 각계 인사 초청 만찬회. 만찬장 중앙 상단에 태극기가, 하단에는 통일교기가 게양돼 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통일교도들. 태극기와 통일교기를 함께 들고 있다.
이순화·김성도 등에서 비롯한 신비적 계시 신앙의 역사적 노정에서 배태한 한국 기독교계의 신흥종교들은 '구약과 신약 시대 이후의 새 메시아의 시대'를 천명하며, 그러한 역사가 성취될 땅은 '한반도'가 될 것이라는 세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굴절된 민족주의와 동양 종교적 요소들과 혼합돼, 근대화·식민지·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콘텍스트하에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민중의 영혼 속으로 빠르게 파급돼 갔다.
이순화의 정도교나 김성도의 성주교는 해방 이전까지도 항일적인 면모를 보이며, 민족주의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조합하고자 모색했다. 하지만 영적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해방 정국과 분단 체제 하에서 그 후예들로 불리는 여러 상이한 신흥종교 분파에 이르러, 민족적 정체성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의 선언으로 전락했다.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 동방교의 노광공, 세계일가공회의 양도천,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의 구인회, 대한기독교천도관의 천옥찬,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의 김민석, 영생교의 조희성, JMS의 정명석, 신천지의 이만희 등 다양한 신흥종교 분파로 이어지는 변이·진화 과정은 점차 '정치적 편향'과 '내적 교조화'로 치달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교주를 한반도에 도래한 새로운 메시아로 내세우고, 민족적 가치와 태극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문선명·양도천·구인회·천옥찬·김민석 등은 태극 문양을 종교적 행위·상징·교리 등에 적극 활용해 포교했다.
태극 문양과 십자가를 겹친 세계일가공회의 심벌(사진 왼쪽)과 교주 양도천. 가운데 사진의 제목은 '백마를 탄 어린양'이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새마을전도회(천국복음전도회)는 태극기를 성서적으로 풀이해 새 예루살렘인 한국에 지상천국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교주 구인회(사진 왼쪽)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지만 1975년 사이비 종교 일제 단속 과정에서 구금돼 옥사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태극 문양이 박힌 구인회의 묘. 비석에는 '재림 예수님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정희와 자신의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고 태극기 신앙을 가르치고 있는 구인회. 사진 제공 현대종교
전도관 출신 천옥찬은 박태선의 감람나무 사명은 끝났고, 자신의 무화과나무 사명이 시작됐다고 주장하며 대한기독교천도관을 창설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천도관 강단에 게시된 감사장. 교인들이 교주 천옥찬에게 헌사했다. 중앙 상단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자신을 '민석 대왕 심판주'라고 칭한 만교통화교(에덴문화연구원) 교주 김민석.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이 세운 망각 지대
이순화에서 신천지로 이어지는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과는 별개로, 경북 지역 장로교를 기반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독자적인 신앙 운동을 전개한 박동기(1907~1991)의 '시온산제국'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우라"는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들어 1944년 독자적인 항일적 국가 체제와 600여 명으로 구성된 정부 관리를 조직하고, 국기國旗까지 제작해 공포한 일명 '시온산제국(시온산성일제국,시온山聖逸帝國)'은 1945년 5월 경북 경찰부에 발각돼 지도부 33명이 체포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온산제국기. 시온산제국 국기는 중앙의 정사각형(4방을 상징) 안에 녹색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 적색 십자가와 광채가 형상화돼 있으며, 무궁화가 십자가 하단부를 둘러싸고 있다. 중앙 정사각형 미지 외곽에는 흰색·녹색·적색 가로줄이 반복돼 일곱 번(흰색은 여덟 번) 겹쳐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시온산제국기의 도안은 철저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성경에 기반해 있으며, 유일하게 무궁화가 성경과 관련 없는 민족적 상징으로 삽입됐다. 정운훈이 쓴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사>(시온산예수교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이를 "무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계속 꽃이 피는 것인데 그래서 무궁화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 나라 군국주의 일본 제국의 국화인 벚꽃이 며칠 안에 일제히 피고 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함은 영원무궁하신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심을 상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동기는 포항교회 전도사 시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다가 경북 청송으로 피신해 기도하던 중 1940년 11월 29일 영적 체험을 하고, 조선의 독립과 지상천국 건설을 위해 기성 교회를 이탈해 독자 교단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이며, 이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1944년 7월 7일을 '예수 재림의 날'로 정하고 신자들을 규합했는데,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은 많은 신자에게 실망을 끼치고 무위로 끝난 바 있다. 성경에 대한 주관적·독선적 해석과 예언에서 번번이 오류가 드러나자 신자들의 반발과 한계에 봉착했고, 개인적인 문제에까지 성경을 적용해 내부 반발과 논란으로 분열됐다. 박동기는 보수 신앙과 성경에 근거한 말세 신앙으로, 일제를 '음녀의 나라', '사탄 용의 나라'로 규정하면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 등을 거부해,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시온산제국을 설립한 박동기 전도사. 사진 제공 현대종교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이 이순화의 정도교와 다른 점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에서 요구된 의무교육과 국가 의례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는 점이다. 해방 후 '시온산예수교장로교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한 시온산교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채택된 국가 상징물 태극기를 '태극점복기'로 폄하하며, '점복기 개정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시온산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실제적 기독교 국가 수립을 모색했던 박동기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일정 부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1949년 11월, 경북 의성에 무장공비들이 출몰해 민가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경찰은 시온파 신자들을 소집해 연행했다. 당시 이들이 연행된 죄목은 태극기에 배례를 하지 않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탁명환은 당시 검찰의 심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소개하고 있다.
시온산제국 간부들. 사진 제공 현대종교
[문] 태극기를 왜 반대하는가?
[답] 태극기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 창조론에 비추어 태극太極의 시조 '태호복희太昊伏羲'도 한낱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태극이 조판造版이라 하니, 첫째 성경 창조 교리에 배치되고, 둘째 성경은 하나님을 시조로 하고 역경易經은 태호복희로 하니 피차간 시조가 다르다.
[문] 기독교도로서 경배는 못할지언정 경례와 목례를 행함은 어떠한가?
[답]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십자가기라고 할지라도 숭배의 대상으로 예배 의식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그 자체를 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신도 중에 병역의무에 대하여 말하기를 "태극기를 폐지하고 십자가기를 세운다면 총검을 메고 백두산봉까지 솔선 돌진한다"고 했다는데 그 이유는?
[답] 그것은 그 신도가 우리 교리에 정통하지 못한 데서 한 말인데, 만약 경배의 대상물로 삼을 때는 태극기나 십자가인 경우에나 동일하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자작신自作神으로 신격화·우상화하기 때문이다.
[문] 의무교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어느 교육기관에서든지 우상숭배의 행사가 있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대구지방검찰청 의성지청 심문조서'(1949년 11월 14일) 중에서,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3~184쪽에서 재인용.]
시온산교회는 태극 사상이 성경의 창조론을 위배하는 것으로 봤으며, "주역과 태극 원리가 성경에 배치됨을 말씀으로 증거"하기 위해 태극기를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태극 문양 자체의 사상적·신학적 이질성 혹은 비기독교적 성격을 이유로 태극기 자체를 거부한 현상으로, 그동안 '국기배례'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저항해 온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의 주장과는 매우 차별화된 양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분단, 좌우 분열, 반공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용공'으로 치부됐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건축된 시온산예수교장로회 경주교회 주보(1987년 5월 21일 자). 주보의 한 면에는 시온산교회의 특징을 상세히 적어 놓았는데, 장로교회 정통성 계승,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 해방 후 하나님 말씀대로 전도, 음양신(태극) 문제를 지적하면서 수난과 옥고를 치른 유일한 교회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종교
시온산제국의 교주 박동기는 1950년 1월 5일 내무대신 정운권, 농무대신 징운훈과 함께 남대구서로 연행돼 10일 동안 전기 고문 등 가혹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결국 박동기는 사찰계원들의 회유에 타협해 <대구일보> 등 신문지상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 우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를 지지하고 대한민국 시책에 순응할 것.
2. 에스겔서, 다니엘서에 대한 과격한 해석을 중지할 것.
3. 정감록과 주역을 성경에 대조해 해석하지 말 것.
4. 국기 개정 운동을 합법적으로 전개할 것.
5. 세상 만국 교회가 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신부인즉, 박동기 1인만 신부라고 호칭하지 말 것.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3권 개정판>(국제종교문제연구소), 185쪽에서 재인용.]
이 성명은 그동안 강경하던 시온산제국 지도부의 항복 선언으로 읽혔다. 그 후로 시온산제국은 故 탁명환 소장의 말처럼 "교회사 속의 망각 지대"로 침잠해 갔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의 흐름 속에서 이순화를 정점으로 한 종교 혼합적 신흥종교의 확산세 속에서, 다른 종교와 대조되는 규범적·폐쇄적 신앙 논리로 태극기의 국기 채택 자체에 문제 제기하며 해방 이후 국가와 갈등을 빚은 기독교계 신흥종교라는 점에서, 시온산제국의 정체성과 신학적 논리 구조는 같은 시기 전개된 한국 기성 개신교회의 국기배례(경례) 거부 운동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해방·분단이라는 격변, 민족사의 환희와 비극 앞에서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태극기를 둘러싼 양분된 논리에 천착해 갔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혼종적 신흥종교의 득세가 현실화됐다. 아마도 민중들은 신비체험과 성경에 입각한 배타성 논리에 충실한 교주(시온산제국 박동기)보다, 민족적 정서와 타협하고 분단·전쟁의 비극 속에서 생존·번영을 약속한 매혹적인 메시아(통일교 문선명, 천부교 박태선 등)를 더 갈구하고 욕망했던 것 같다. 그렇게 태극기는 해방·분단·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역사 노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하는 푯대가 돼 가고 있었다.
첫댓글 또 지워지겠지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