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리아족의 인도 침입과 그 생활
- 아리아족의 본향(本鄕)
인도 역사의 주인공은 아리아족이다. 인도아리아족의 생활주준이 처음에는 전반적으로 인더스인들의 그것보다도 열등했었다는 강력한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아리아족이 만들어 놓은 사회제도와 정신문화 등은 현대 인도사회에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그들의 종교 철학은 세계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어족(印歐語族)으로 보통 일컬어지는 아리아족은 대체적으로 페르시아 북부를 중심으로 폴란드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늪지대에서 살았던 것으로 받아지고 있다. 카스피 해 유역과 남 러시아 늪지에서 살았던 이들이 목초지를 찾아 유럽, 소아시아,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퍼져 나갔다.
인도로 침입해 들어오는 인도아리아족은 페르시아 북부를 중심으로 생활했던 일파였던 것이 틀림없다. 두 지역에서 언어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인드라, 바루나, 미트라 등 인도 아리아족의 주신들이 "베다"와 페르시아의 경전인 "아베스타(Zend-Avesta)"에서 동시에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 아리아족의 침입
아리아족의 인도 침입 내지는 이주는 몇 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아마도 농사보다는 주로 유목생활을 영위해 왔던 그들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동쪽으로 이동해 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아리아족이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의 펀잡지방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1500년 경이었다. 처음에는 침략자로서가 아니라 가축과 가재(家財)를 가지고, 또 그들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평화적 이주민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곧 두 문명간의 충돌이 시작되고 드라비다족은 생존을 위하여 끈질기게 대항했다. "베다"에도 아리아족은 그들이 치룬 선주민과의 치열한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용감한 유목민으로서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던 아리아족이 승리함으로써 점차 인도의 광범한 지역은 그들에 의해 정복되어 갔다. 드라비다족은 항복하거나 남부지방으로 밀려나 피난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족의 인도 침입과 그후 그들의 생활상에 관해서는 그들의 문학작품인 '베다(Veda)를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므로 이 시대를 베다시대라고 부른다. "리그 베다"는 기원전 1500~1000년 경에 이루어졌으며, "우파니샤드(Upanishads)"는 기원전 800~6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베다 시대의 통치 형태
아리아족은 가축과 함께 시골에서 모여 생활하였다. 집은 대나무와 같은 튼튼하지 못한 목재로 지었으며, 벽돌을 굽지도 않았고 훌륭한 배수시설이나 목욕탕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리아족은 건실한 가족생활을 유지했으며, 여러 씨족이 모여 최고의 정치단위인 부족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수많은 부족과 정치집단으로 분열되었으며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베다시대의 통치형태는 대체로 군주제였으며 세습적으로 계승되거나 부족에 의해 선출되기도 하였다. 왕은 관례에 따라 부족회의나 원로회의와 협의해여 했는데 이들 기구는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왕권에 대한 견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왕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법(Dharma)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져야 했다. 이 법은 신의 의지와 우주의 질서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서 의무를 뜻하기도 하였다. 왕은 전쟁을 수행하고, 카스트의 규율을 유지하며, 도둑이나 다른 범죄자들을 처벌해야 했다. 형벌은 매우 무거워 반역, 강도, 간음 등의 범죄에는 대체로 사형을 규정하였으며 개인적인 복수를 인정하였다. 형벌은 계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기도 하여 사제계급은 극형에서 제외되었다.
후기 베다 시대(기원전 1000~600)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큰 세력을 갖춘 국가들이 출현하였다. 왕권이 크게 강화됨에 따라 부족회의 등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리그 베다" 시대의 왕들은 세습이나 선출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았으나, 후기의 왕들은 대체로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다툼을 거쳐 정통성을 보장받았다. 이 의식은 왕이 어느 누구의 도전도 용납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절차였다. 동시에 왕은 우주의 질서와 농사의 흉풍(凶風)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도 인식되었다.
- 베다 시대의 경제 사회 생활
아리아족은 유목민에서 농경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기름진 토양이지만 메말랐던 지역에 강물을 끌어들여 경작하기 시작였다. 밀림을 제거하는 일은 건조한 땅에 관개시설을 갖추어 경작하는 것보다 힘들어서 원주민들까지도 기피하였던 작업이었다. 그러나 아리아족은 철의 사용법을 이미 습득하고 있었으므로 이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쟁기를 사용하고 관개농업이 확대됨에 따라 아리아족 정착인들의 식량공급은 훨씬 원할해졌으며 이는 인도의 인구를 전체적으로 급격히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리그 베다"는 아직도 농업에 관해서는 불과 몇 번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며 특이한 것은 소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전쟁은 대체로 더 많은 소와 가축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 가축은 물물교환 시대에 있어서 최선의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 후대의 성우사상(聖牛思想)은 확립되지 않았다.
아리아족보다는 원주민이 장인으로서 높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직조공은 모직의 옷감을, 금속 세공인들은 구리와 귀금속으로 정교한 장신구를 만들었다. 목수는 비교적 높은 대우를 받았는데 그것은 쟁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농업이 발달하고 장인들의 일용품 생산이 증가하면서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상업은 처음에는 비아리아족들에 의해 행해졌으나 점차 아리아족이 독점적으로 영위하는 경향이 생겼다. 힌두의 사회 구조에서 상인은 결코 낮은 지위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아리아족의 사회에서는 가부장적 제도가 확립되어 갔으며 아버지의 처자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은 인도 가족관계의 정당한 규범이 되었고, 남성우위권과 연장자를 받드는 서열제도 또한 당연한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베다 시대에 여성의 지위는 인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비교적 높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결혼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신을 섬기는 제의식(祭儀式)에는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앞서의 인더스 문명이 아리아족의 그것보다 오히려 진보했던 것으로 주장한다. 인더스인들은 멀리 서남아시아에까지 걸쳐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 곳에서 발견된 유물로 증명되고 있지만, 아리아인들은 적어도 그 초기에 있어서는 원양무역에 관한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아리아인들은 인더스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철을 다루고 철제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잘 사는 '살찐 돼지'와 '굶주렸지만 핵을 가진 이웃'에 관한 생각이 떠오른다).
주:
이 글은 "인도사"(조길태, 민음사, 2006)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림자료: 책의 내용, 혹은 네이버 검색, 두산백과, 구글 등에서 가져왔습니다.
(*): 요약자가 곁들인 글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