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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8월21일(화)맑음
지금 이대로 자명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대로 모자라서 채워야 되거나, 넘쳐서 줄여야할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 있으라.
지금 이대로 더러워지거나 다시 더 깨끗해지길 바라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
지금 이대로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따지지 말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
이미 거기에 그대로 있음을 확인했다면, 다시 다른 무엇을 찾아서 어디로 돌아다니지 말라.
‘있는 그대로 있어라.’는 것은 지금 여기 다가오는 대로,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ditthadhamma이다.
<공작>이라는 영화를 보다. 국가정보원 요원이었던 박채서씨가 겪은 체험을 영화화한 것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 양파 한 뿌리의 우화가 나온다. 살아생전 선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죄 때문에 지옥불구덩이에 떨어진 한 노파를 가엾이 여긴 수호천사가 노파를 구해주려 한다. 천사는 노파가 눈곱만큼이라도 선행을 한 것이 있는지 그녀의 일생행적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언젠가 지나가는 거지에게 양파 한 뿌리를 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천사는 신에게 청원하기를 양파 한 뿌리를 보시한 공덕이 있으니 신이여, 구해주소서. 신은 노파를 구해주라고 했다. 천사는 노파가 보시했던 그 양파를 노파에게 내미니 양파 뿌리에서 싹이 나서 파란 줄기가 솟아났다. 노파가 양파줄기를 붙잡자 수호천사는 노파를 끌어올리기 위해 양파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살살 잡아당겼다. 노파가 지옥에서 반쯤 빠져 나오고 있을 때 지옥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그걸 보고 “나도! 나도!” 하며 매달린다. 노파는 자기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남들이 모두 달려드니깐 너무 화가 나서 “이건 내 양파야! 내 거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 순간 양파줄기가 뚝 부러져 모두 지옥불로 떨어졌다.
노파의 죄는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노파를 구원하기 위해 수호천사가 찾아낸 ‘양파 한 뿌리’는 미미한 선행이었다.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눈곱만한 선행이라도 마침내 놀라운 결과의 꽃을 피운다. 이것이 우주의 보편적인 법칙인 인과응보의 원리이다. 업인과보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냉담한 법칙이 아니다. 이번 생에 실수하고 타락하더라도 최선 아니면 차선, 또 다음다음의 기회, 그러고도 다함이 없는 기회는 끝없이 주어질 것이라는, 그래서 마침내 언젠가는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준다. 그래서 一切衆生畢竟成佛일체중생필경성불이라 말한다. 세상이 전부 악에 싸여있어 일점 善의 빛도 보이지 않을 때 수호천사는 우리 내면 어딘가에 구원의 씨앗이 숨어있지나 않는지 찾으러 다닌다. 수호천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내안에 있는 수호천사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선행의 기억, 선을 지향하려는 본질적인 경향, 完德완덕을 향하려는 타고난 성향이다. 내안의 천사(Angel in Us)가 나를 구원한다. 내안의 천사가 살아나와 활동할 때 자업자득이라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넘어서 연민과 자애라는 아름다운 경계가 펼쳐진다.
노파에게 주어졌던 양파 한 뿌리는 구원의 가능성이었을 뿐 구원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노파는 자신이 양파 한 뿌리로 천국행 표를 샀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다른 죄인들이 매달렸을 때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그들을 발로 걷어찼다. 노파의 죄는 살아생전 선행을 한 것이 하나도 없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옥 불에서 겨우 건져져 바야흐로 천국으로 향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쁜 습성이 도져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한 평생 선행에 무지했거나 냉담했던 습성이 다시 발동해서 나와 너를 구분하면서 ‘나만 구원받는 것이지, 너희들은 아니야’ 라고 내뱉는다. 나와 남을 ‘단절’시키는 습관이 죄이며, ‘나’만 앞세웠기에 교만하고 이기적이다. 그것은 결국 타인을 증오하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
삼독심에 휘둘려 사는 세상에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들이 산다. 이런 곳은 ‘죽음의 집’(dead house데드 하우스)이다. 사람이란 동물적 욕구가 없을 수 없을 테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나 양심, 성찰이 없이 본능만 추구한다면 그런 곳은 어디나 ‘지옥’이 된다. 지옥이 먼저 있고, 신이 지옥 보낼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갈 만한 짓을 한 사람이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자기 삶은 돌이켜보아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지옥을 만드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품은 미움과 원한을 빨리 풀수록 좋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희망은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 본능을 거슬러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도스토엡스키의 사랑 론은 이렇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미 ‘죽음의 집’에 처박힌 것이다. 그는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했다. 욕계가 처한 현재 상황이 지옥이며, 이 지옥은 사랑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2018년8월23일(목)흐리거나 비
구름이 낮게 끼었다. 태풍이 온다고 한다, 간헐적으로 비 내린다. 백종에 즈음한 독경기도 하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그리고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집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계를 두루 보고 들으며, 설산의 정상에 오르지 않고도 천지의 광활함에 경외를 느낀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다는 게 경이롭고 감사하다. 요는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절실하게 살아있는가가 문제다. 살아있다 함은 완전히 깨어있고 열려있어서 內外내외가 明徹명철하고 마음에 걸림이 없어 자재하다는 말이다. 活勃勃활발발이라는 표현이 거기에 대해 뭘 좀 맞힌 것 같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처마 끝에 흘러내리는 빗방울. 빗소리가 뇌를 뚫고 들어와 발바닥 밑으로 흘러간다. 내 몸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도화선이다. 태평양의 배속이 울렁거리니 거대한 氣團기단이 회오리 춤을 춘다. 구름이 긴 머리채를 풀어 제쳐 잡아 돌리고 수만리를 달려온 바람이 가쁜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정원의 해묵은 연못에 퐁당 뛰어든 개구리는 분명 백년의 근심거리를 깨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해묵은 연못에서 폴짝 뛰어나온 개구리는 백 년의 근심거리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연못에 뛰어들었건 연못에서 뛰어 나왔건 개구리는 활발발하게 살았을 뿐이다. 개구리는 개구리세계의 알파요 오메가다. 개구리의 눈은 개구리 우주를 보는 관점이다. 자기가 경험하는 세계를 보는 놈이 바로 그 세계를 펼치고 있는 당사자라는 걸 안다면 그는 깨달은 개구리다. 깨달은 개구리는 눈이 튀어나와 法眼법안이 열린다. 그에게는 연못 안에 있던 밖에 있던 근심거리가 도무지 없어 일체에서 자유다. 그러나 그런 개구리조차 저 잘났다는 식으로 혼자 힘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적당한 습기와 물, 먹을 것과 숨을 곳과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개구리는 곧 개구리를 떠받들어주는 환경이며, 개구리 환경이 곧 개구리 자신이다. 청개구리가 호박잎에서 폴짝 뛰어 채송화 밭으로 들어간다. 나는 개구리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을 노래를 조용히 부른다. 개구리가 염불한다. 개구리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아무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그저 살아갈 뿐이다. 인간을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 가운데 개구리 한 마리가 살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아직도 살만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개구리는 비를 사랑하고, 연못을 사랑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사랑한다. 눈에 잘 띄는 개구리는 곧 위험해지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인간의 시선에서 멀어지려 한다. 뭐가 됐던 여러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면 주목받고 간섭받아서 놀림을 당하다 이내 상처를 입고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다. 개구리는 개구리답게 개구리로서 살면 된다. 어떤 것이 불법의 요체입니까? 개구리 禪師선사 답하길 ‘개굴, 개굴.’ 그것은 개구리에게 해당되는 말이잖아요, 사람에게 해당되는 답을 해주셔야죠. ‘개굴, 개굴.’ 글을 파는 사람들은 ‘개굴皆屈’이라 넘겨짚을 수도 있으리라. 이런 수작들은 모두 굴욕적이다. 개굴, 개굴.
2018년8월24일(금)바람
바람이 창을 흔들고 문을 두드리며 대추나무를 뒤흔든다. 호박넝쿨이 바람에 날려 벌렁 벌렁거리고 차양이 덜컹거린다.
바람의 말
바위, 네가 꿋꿋하더냐? 내 보드라운 손길로 수억만 번 쓰다듬으면 넌 먼지가 되고 말걸
산, 네가 천하태평한 것처럼 보이지? 몇 만 년 동안 입김 불면 넌 가루되어 날아갈걸,
하늘, 네가 영원할 듯 대견스럽지? 내 없인 넌 제 구실 못할 걸,
비와 구름 실어 나를 수 없어 말라버린 하늘이 될 걸
별, 넌 언제까지나 반짝일 것 같지?
블랙홀의 바람에 휘말리면 네 존재는 없어지고 말걸
태양, 넌 천상의 황제처럼 의젓하구나. 시간의 폭풍 속에 든 넌 마침내 사라질 운명이지
바람, 넌 천상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듯 보이는구나,
바람, 넌 누구냐?
넌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에 있고
어디에도 없으면서 모든 곳에 나타나니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며, 남을 움직이게 한다,
움직임이 그치면 사라졌다가
그 사라짐 다시 움직이면 바람이 분다.
탐진치가 바람의 씨앗
우주는 바람의 한 마당 춤
인생은 바람속의 흔들리는 풀잎
생명은 바람에 펄럭이는 불꽃
숨은 바람이다
바람은 숨이다
2018년8월26일(일)흐리고 간간히 비 뿌리다
오전8:20 고속버스 타고 서울행, 아미화, 연경, 문정, 현정, 지월거사와 함께. 새벽부터 뿌리던 비 대전을 지나니 맑아져. 서울 날씨 나들이엔 그만이다. 12시경 서울도착. 지월거사는 귀가하고 우리는 안국동에서 경진, 만민, 학해스님 만나 점심 공양. 오후2시 조계사 맞은 편 2차선을 점유하여 벌어지는 <전국승려결의대회>에 참석. 200여명 스님들이 모였고 재가 불자들 300여명 될까 짐작. 현진스님(여의도 포교원장)께서 고불문을 낭독하면서 소회를 토로하시고, 원인스님(수도암 선원장)께서 대회사를 하면서 승려대회 개최 명분을 말씀하셨으며, 월암스님(수좌회 대표)께서는 기개 있게 개혁선언을 하시다. 2부에 등장하신 설조스님께서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셨으며, 이어 등단한 각명스님(법주사 스님)은 불교개혁을 위해서 자신소유의 부동산과 땅을 쾌척하시어 재가불자들의 수행처로 사용하라하시곤 적폐청산을 위한 모종의 결단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다. 이러히 두어 시간 앉았더니 2부 행사 끝나고, 이어서 3부 행사가 진행된다. 우리 일행은 자리를 떠나 섬머셋 팰리스 호텔 뒷길을 경유하여 경복궁 쪽으로 걷다. 호텔 뒷길은 조계사 후문으로 통하는 길목인데 전경 2소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아마도 승려대회 측이 조계사로 쳐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대비한 방책인 듯하다. 조계사 집행부 측에서 불러들였던, 경찰 쪽에서 치안업무용으로 배치되었던, 조계종단 내부에 갈등하는 두 세력이 대치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지월거사가 예약한 식당에서 보살님들에게 저녁 공양 대접한다. 경복궁 위 조각하늘에 저녁놀 걸리니 좀 볼만하다. 식사 끝나자 지월거사 흥에 겨워 자기 아파트로 우리들 초청하다. 거사님 거처에서 다과를 들고 여담을 나누다가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다. 오후10시 밤차 타다. 서울을 벗어나자 칠흑 같은 어둠에 억수 비가 쏟아진다. 야밤 우중을 뚫고 달리는 버스가 마치 풍랑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잠수함을 탄듯하다. 경기를 벗어나 중부지방을 달리자 구름에 휩싸인 산의 실루엣이 술렁술렁 나타났다 사라진다. 깜깜한 어둠 속에 빛나는 오렌지 불빛 가로등이 암흑 바다에 둥둥 뜬 연꽃 같아, 다시 보니 그건 연꽃이 아니라 화염에 휩싸여 고통 받는 지옥의 불길이다. 방방곡곡을 밝히는 가로등불이 사바세계에 피어난 연꽃인지, 지옥의 불길인지 누가 알겠는가? 한 번 꾸벅 졸고 눈을 떠니 덕유산 휴게소, 다시 염불하는 사이에 진주 도착. 새벽1:30. 긴 하루를 살았다.
2018넌8월27일(월)비
비온 덕에 남강 물이 불었다. 넘실넘실 흐르는 강물을 보면 마음이 넉넉해져 갑자기 풍요로워진 느낌이 든다. 남강댐 밑 강변 산책길 걸으러 나갔더니 불어난 물에 잠겼다. 늘어난 수량을 조절하느라 방류된 물이 강변길은 물론 가로등의 밑 둥까지 물에 잠기게 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니 우산을 펴락오므락 하다. 황토 빛 물든 강물을 황태물이라 한다. 거대한 물살이 밀려오는 걸 보면 도도하게 진군해오는 거인족 군대의 군화발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고대 인류의 집단 어깨춤이 보이기도 한다. 나뭇가지, 가시덤불, 쓰레기, 비닐조각, 생필품의 파편, 삶의 찌끄레기, 거품과 스치로폼, 온갖 잡동사니가 휩쓸려 떠내려간다. 이것은 탁류, 혼류, 잡류, 欲流욕류-욕의 흐름이다. 황황한 욕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중생을 보라. 칙칙한 탁류에 머리가 잠겼다가 떠올랐다가 반쯤 정신 나간 채 사지를 휘저으며 발버둥 치는구나. 삶이냐, 죽음이냐? 상승이냐, 하강이냐? 허무냐, 절망이냐? 숨 한번 얻어 쉬고 다시 물속으로 쳐 박힌다. 가라앉을 거면 다시 떠오르지나 말든가, 위로 솟았거든 영원히 가라앉지 말거나. 이도저도 아니니, 가라앉았다 솟아올랐다, 물 먹었다 뱉었다, 숨 쉬다가 막히다가, 살았다 죽었다, 오랑가랑 절망과 희망, 기대와 좌절이 파도처럼 출렁거려,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밀려가는 신세, 너 중생이 아닌가? 차라리 끝까지 떠밀려 내려가 바다에 이르러라. 이렇게 말할 자도 있겠지만, 떠내려가는 자는 영원히 바다에 이를 수 없다. 설령 바다에 도달했다 해도 바다 속을 강물처럼 흐르는 해류라는 게 있어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해류는 윤회한다. 세상의 모든 흐름이 윤회의 바다이다. 그리고 그건 고통의 바다, 苦海고해이다. 빗줄기 굵어진다.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다. 반쯤 젖으니 반쯤 인생이다. 허리까지 잠긴 채 고해를 건너간다. 반쯤 젖은 채 반쯤은 마른 채.
2018년8월28일(화)맑음
빌란치아에서 점심공양 청 받다. 강변으로 나가 물 구경하다. 여름은 꼬리를 끌며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가을은 저쪽 강안에서 머리를 쳐들어 슬며시 덤불속으로 숨어든다. 둘로 나뉘었다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애초부터 하나일 필요도 없고 둘로 나뉠 필요도 없다. 말을 하자면 벌써 둘로 나눠진다. 그렇다고 말 안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필요할 때 필요한 말만하면 된다. 쓸 말, 유익한 말, 친절한 말, 분명한 말, 다정한 말, 향상시키는 말, 심오한 말, 법다운 말을 하면 좋다. 그것뿐이다. 물방울무늬 강물 위에 번졌다 이내 사라진다. 말이란 흘러가는 강물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거와 같다. 쓰자마자 곧 바로 사라진다. 그러나 물위에 쓴 무늬글자는 쓰는 사람, 보는 사람이 동시에 본다. 동시에 함께 봄으로써 물무늬글씨는 그 효용을 다한 것이다. 그러면 사라져도 무방하다. 물무늬의 흔적은 사라져도 두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새겨진다. 흘러가는 강물은 두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은 따로 따로 나눠지기도 하고 통째이어서 나뉠 수 없기도 하다. 마음은 국소적(개별적)이면서 편재적(보편적)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적으로 말해서 비국소성non-locality이다. 이런 맥락으로 以心傳心이심전심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흘러가는 강물을 함께 본다. 강물은 흘러가고 오늘도 흘러가고 우리도 흘러간다. 모든 것이 흘러간다. 모다 흘러가면 여기에 남는 것은 전혀 없는가? 청산이 홀로 물위로 걸어가니 처처에서 그를 만난다. 가면 갈대로 오면 올대로 내버려둘 것이지 뭘 아쉬워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