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계에서 사이비 중으로 인기를 모았던 중광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를 일명 걸레스님이라 했습니다. 그도 자칭 걸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걸레는 더러운 것을 닦으므로 깨끗하게 하고 자신은 더러워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참으로 지저분한 짓을 많이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걸레주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걸레는 집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물건입니다. 가정마다 걸레 없는 집이 있습니까? 청소할 때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곳을 박박 문지르기도 하고, 쥐어짜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 쓰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걸레를 보물 모시듯이 얌전히 갖다 놓습니까? 대개는 구석에 뚝 집어 던져놓는 것입니다. 걸레는 이렇게 쓰임 받다가 구석진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러한 걸레처럼 필요할 때에 희생적으로 쓰임 받다가 자신의 일이 다 끝나면 걸레처럼 구석진 곳에 던져져야 합니다. 언제나 화려한 곳에 걸려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걸레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나는 걸레다’ 생각하고 섬기면 마음 편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섭섭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왕권을 얻게 될 때에 예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영광의 자리를 얻기 전에 먼저 고난의 자리에 내려가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
지난 주일에 이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야 많은 생명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한 알 그대로 있으면 결국은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자신의 고집을 겪고, 아집을 버리고, 자기 기질을 죽일 때에 주변 사람을 얻고, 생명을 낳고, 풍성한 열매와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숲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씨앗은 땅을 탓하지 않습니다. 씨앗은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그 속에 들어가서 싹을 내고,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숲을 이루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한 알의 씨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어둠을 경험하면서 죽어가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고, 나는 죽을 수 없다고 소리소리 치면서 빳빳하게 살았다고 하면 그 스스로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변의 사람이 괴롭습니다. 상처를 입습니다. 사람이 떠나갑니다. 결국 혼자인 나는 외롭습니다.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2. 반면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영원한 기념이 됩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
늘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만 생각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부터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한국의 야산에 가면 칡이 많습니다. 칡은 살기 위해서 다른 식물을 칭칭 감으며 올라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칡이 왕성하게 되면 주변의 다른 나무를 감아서 말라죽게 합니다. 칡은 다른 나무를 감아서 말라 죽이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숲을 관리하는 숲지기는 칡의 이런 습성을 알기에 칡이 자라지 못하도록 밑동을 잘라버립니다. 칡이 왕성하면 숲동산을 망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숲 동산을 이루려고 하면 서로를 인정하고 더불어 햇볕과 바람과 비를 나눕니다. 그때에 동산의 나무들은 숲을 이룹니다. 새로운 씨앗이 날라오면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어 그늘이 되어 주고 비바람을 막아 줍니다. 그렇게 푸른 숲 동산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숲에 많은 새와 동물들이 모여듭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숲동산을 이루는 한 알의 씨알이 되었으면 합니다.
3. 이제 마지막으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가는 모습과 결과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며 큰 기대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운집한 무리들을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26절에 아주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
여기서 주님은 ‘자기를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어떻게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냥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져야 어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어떤 청년은 말하기를 자신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 청년은 금으로 십자가 목거리를 만들어서 걸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목뒤로 해서 지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가로의 나무와 세로의 나무가 합해진 나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라면 내게 주신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자녀라면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을 어떻게 즐겁게 하고, 어떻게 공경할까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이는 육신의 부모님을 통하여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자녀된 자의 십자가입니다.
아내라면, 남편이라면 헤어지지 못해서 서로를 원수처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서로 간에 사랑하되 내 몸같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라면 맡은 바 직분을 충성되게 행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사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을 다니지만 늙어서는 남이 너를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앞으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르라”
이때에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따르는 것을 보고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요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 너는 나를 따르라 !' 하시더라”
주님이 요한 사도에게 주신 말이 무엇입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요한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에 신경 쓰지 맙시다.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지 간에 나는 주님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삶의 걸음을 가셨습니까?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바로 섬김의 걸음을 배워서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섬김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렸습니다. 섬김은 자기 목숨을 버리므로 우리를 섬겼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일어났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를 때에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1) 천국에서의 복락을 약속하셨습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영원한 삶,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2) 높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천국과 존귀함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편이나 다윗의 생애를 기록한 성경을 보면 아주 많이 되풀이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와 ‘종’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주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서 ‘종’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늘 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가운데 높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를 멸시하고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을 하고, 음란했습니다. 이때에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의 죄악을 알고 있었지만 단호하게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에게 책망하셨습니다.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존귀히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기신다”(삼상 2:30)
엘리 제사장 밑에서 수종을 들던 사무엘 제사장이 보았고, 사무엘의 영적 지도를 받았던 다윗 왕에게 이 신앙이 흘러갔습니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높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세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실 메시야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 웨일즈의 침례교 설교가로써 아주 훌륭한 사역을 했던 크리스마스 에반스라는 전도자가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죽기 일보 전에 측근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떠난다. 나는 주의 종으로 55년을 수고하였다. 나는 한번도 주님의 보혈을 의지 하지 않고 사역을 한 적이 없다. 형제들이여! 주님을 전파하여라. 나를 보아라. 나는 무너져 가지만 주님 안에서는 구원을 누리며 천국에 있단다. 안녕! 계속 전진하여라! (Goodbye! Drive on!).
그가 살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녹슬게 하느니보다는 태워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생의 두 가지 길 가운데 한길을 걷게 됩니다. 녹슬어서 못쓰게 되는 인생이든지, 아니면 닳아서 못쓰게 되는 인생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녹슬고 있습니까? 닳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길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주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게 해주십시오”
이때 다른 제자들이 듣고는 아주 분하게 여겼습니다. ‘잘났어 정말’ 하면서 시기 질투했습니다. 이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
낮은 자리로 내려가 겸손히 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어 영광의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속으로 들어가 자아를 죽이고 희생하며 말없이 조용히 섬길 때 알알히 맺히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열매 자체가 아름다운 영광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섬기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시고 높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죽어서 섬기는 자가 되면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는 집사님입니다. 이발을 하는 가운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 교회에 문제가 생겨서 교회가 나누어지고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동요하면서 좋다는 교회를 찾아 나가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따라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발사 집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교회를 만드는 사람이다”
저는 그 이발사 집사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먹었습니다. 성도는 좋은 교회를 찾아 이리저리 찾아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요 목회자인 워런 위어스비는 그의 목회학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숙하는 것이 떠나는 것보다 쉽다. 만일 도망 간다면 다음 장소에서도 같은 문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곳에서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가”
생태계를 연구하는 자연 과학자들은 쓰러진 나무의 단면(나무테)을 보면 그 나무의 일생과 그 숲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 어떤 계절에 어떤 일을 견디고 버티다가 쓰러졌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숲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알이 씨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가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열매를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공동체의 역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458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