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강가에서 있는
화려한 집에서/취한 술기운에 새 시를 지어보네.
창 밖에 무더위는 타는 듯하고/주렴 밖에 물구름은 나직이 떠도네.
華構臨江闊
新詩倚醉題 窓前炎暑隔 廉外水雲低
베개를 높이 베고 돌아가는 배를 복/난간에 기대서니 홰치는 갈매기 소리 듣네.
짚신 신고
죽장 짚고/마음내키는 대로 긴 뚝을 거니네
高枕看歸舫 憑軒聽浴鷖 芒鞋與竹杖 隨意步長堤
나주의 대강 영산포 강변
높은 언덕에 '시원한 그 무엇을 들인다'는 뜻의 조선시대 선조대 이전에 있었다는 정자 납상정(納爽亭)에서 석촌 임서(林壻)가 들려
그윽한
강촌에서의 유유자적한 풍경을 그다.'들일 납( 納)', '호쾌할 상(
爽)' 이다.
그 곳 풍광이 시원호쾌하다는 것이다.
나주의 사라진
또다른 정자 납상정(納爽亭),나주시 송월동 신월마을(구 신촌면)에 임진왜란 당시 무안, 사창 등에서 전공을 세워 감정(監正)의 직책을 지냈던
인물 파주인
염희(廉喜)가 초당을 짓고 영산강을 내려다 보며 지나다 세상을 떴다.
지금의 영상고등학교와 나주종합스포츠파그 사이 영상강변
구릉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사후 찰방(察訪 종 6품 역참관리)의 벼슬을 지냈던 염진국(廉振國)이 중수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926년 일제강점기 때 구영서(具榮書)가 지은 호남 철도가 한 대목에서 납상정이
나온다.
금성산(錦城山)을 바라보며 삼리(三里)만
가면/염상목물(簾商木物) 유명(有名)한 나주역(羅州驛)이라.
흥룡사(興龍寺)의 유허지(遺墟地)를 돌아보면서 영산강(榮山江)에 빗긴
월출(月出) 바라보면서
납상정(納爽亭)을 찾으려고 영상포(榮山浦)왔네 천어환등(穿魚煥燈) 저 어부(漁夫)는 몽탄(夢灘)에 왔네
일대는 40여년 전에는 황돗단배가 다녔다.
그래서 영산포에 등대가 있었으나, 육상교통의 발달과 하상의 변동으로 현재는 운행되지
않는
영산강의 옛 이름은 금천(錦川)·금강·금강진(錦江津)이었는데, 신안군 영산도(永山島) 사람들이 왜구를 피하여
나주 근처의 포구에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라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주의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하나는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창평(昌平)의 무등산 서봉학(瑞鳳壑)에서 나오고,
하나는 광주의 무등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칠천(漆川)이
되며, 하나는 장성의 백암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노령 남쪽에서 나오는데 흘러가다가 합해서 선암도(仙巖渡)가 되며,
하나는 능주(綾州)의
여참(呂岾) 북쪽에서 나와서 화순의 물과 합해서 흐르다가 다시 남평(南平)을 둘러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영광 수연산(隨緣山)에서 나와서
작천(鵲川)이 되고,하나는 나주 북쪽 도야산(都野山)에서 나와서 장성천이 되는데, 합해서 흐르다가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다시 서쪽으로 흘러 회진강(會津江)이 되고 무안에 이르러 대굴포(大掘浦)가 되고
덕보포(德甫浦)가 되며,
남쪽으로 흘러 두령량(頭靈梁)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영암해로 들어간다. 고려 때에 이 물을 거슬러 흐르는
3대강(三大江)의 하나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
납상정(納爽亭)에서는 훈구파와 신진 사림의 교체기에
사림운동에 전력한 선비이자 관료로서,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켜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열었던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서울시장) 등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청백리에 녹선됐었던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과 석촌(石村)
임서(任㥠1570~ 1624), 홍처량(洪處亮), 홍우서(洪禹瑞) 등의 시가 남아 있어 조선 중기에 지어진 정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나주 왕곡면 출신 박순이 살았을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영산포 강변 송월동 일대 강변은 그 어느곳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은
풍치를 자랑했다. 그도 이곳에서 그윽한 시를 읊어내며 술잔 꽤나 비었다.
강가의 이 정자가 죽림(竹林)속에 자리하니/대문 앞의 넓은 들이 하늘가에 닿아 있네. 평생동안 별일 없는 나그네는/맑은 술 있으며 마냥 즐거운 것을 江上亭依竹 門前野接天 百年無事客 有酒卽陶然 또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서암(西巖) 홍우서(洪禹瑞 1662 현종 3∼1716 숙종 42)가 무안으로 귀양왔을 때 들렸을 법한 이곳에서 한 폭의 그림같은 시를 아련히 풀어 낸다. 술은 당연히 먹었을 것이다.
평평한 모래밭은 환하여 눈과 같고/저멀리 강물은 하늘보다 푸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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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홀(草名)이 아침에 오므리고 있더니/시원한 바람이 펄럭이게 하네.
平沙明以雪 遠水碧於天 축笏常朝合 靑風爲飄然
그래고 뭐니 뭐니해도 풍치의 절정은 12경에 있다. 12폭 동양화 그림을 시로 그리는 것이다. 납상정에 대한 운치의 절정에 이른다.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재임중에 이곳에 들렸을 북정(北汀) 홍처랑(洪處亮 1607 선조
40∼1683 숙종 9)이 이곳에서 12경을 읊는다.
12경 정도 읊을 정도였다면 아예 눌러 앉아 오래 머물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홍처랑은
남구만 (1629~1711)이 홍처랑의 시도비문에서
그 인품을 평하기를 "화합하되 한통속이 되지는 않았고(和而不流), 부드러우나 물러터지지도
않았다.(柔而不絿)"고 했다. 이곳 풍치의 감상해 보면
줄줄 흘러가는 강물이 여러 갈래로 이어지니/남녘 고을의 명승지는 바로 이
정자로다.
익히 베마냥 깨끗한 시가 더욱 웅장해지니/문득 사람을 놀라게 하던 사조(당인)의 재주를 생각하네.
滾滾江流百道來南川形勝此亭臺淨如練處詩能壯却憶驚人謝眺才
홍룡사 가에 완사천이 있는데/이상한 일 일찍이 옛 노인이
전했네.
물가에 오색 구름은 흩어질 줄 모르는데/어디에 누선(樓船)을 대었는지
모르겠네.
興龍寺畔浣紗泉異事曾聞古老傳洲渚五雲不知散不知何處艤樓船
물에 잠긴 산빛이 푸르니 흐르러 하고/학이 그 위에 집을 지으니
아래로는 용추(龍湫)가 있네.
철적을 비껴부니 붉은 언덕에 흩어지고/달빛은 맑고 강물이 푸르니
가을이로다.
蘸水山光翠欲流鶴巢其上下龍湫橫吹鐵笛丹崖裂月白江淸入月秋
옥처럼 깎인 부용봉이 병풍처럼 늘어서고/풍운의 변태에 낮 빛이
어둑하네.
주옹은 산들바람 가랑비 속에 있는데/강공은 도롱이 입고 이 정자를 마주하고
있다.
玉削美蓉列作屛風雲變態日暝暝主■斜風細兩綠簑衣江客人對此看無厭軒浚松牕不用扃 生涯一釣磯點點疏星 明極浦也知漁火夜深歸
영산포는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시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일대는 한 폭의 언어로 그림을 그렸다. 홍처랑의 운치는 강물에 비춘 산이 떠내려 왔다고 기찬 표현으로 운치의
맛을 더하고 있다.
강물 위에 비추인 산은 어디에서 떠내려 왔나/작은 영주가 두 줄기 사이에
모였네.
백사장 요초(瑤草)가 참으로 볼만하여 /배 한 척이 왔다 갔다
하네
何處浮來江上山小瀛洲在二流間白沙瑤草眞堪賞一棹飄然去復還
산자락이 남으로 달려 지세가 끝나고/벽이 섰던 물결 속엔 형세가
비어있네
가장 강이 평평하고 기이한 절경은 /지는 강이 평평하고 기이한 절경은 /지는 노을 조각들이 석양 속에
비추네.
山形南走地維窮壁立波心面勢空最是江千奇絶處落霞千片夕陽中
아무리 감상해도 물리지 않는 것이 우리네 선비들의 시였다.
토장국의 두부 건져 먹는 것 처럼. 그의 시상을 계속된다.
십리 긴 뚝에 장마비 개이니/하늘에 연한 풀빛이 평평하게
바라보이네.
하늘가의 저문 빛 아스라이 가니/소치는 목동의 피리소리 돌아가며 쌍쌍으로
비꼈네.
十里長堤積雨晴連空草色一望平天邊暝色蒼茫到牧笛歸歸兩兩橫
천길 긴 강이 큰 황하(黃河)도 마실 듯하니/길가던 사람 그
누구라도 거너기를 근심하네
말을 겨우 고비를 나란히 하고 수레는 하나의 쌍이 갈 만하니/아래에 배 돛이 있으나 건널 수가
없네.
千丈長虹飮大河路人誰病涉蒼波騎能井轡車方軌下有舤檣不得過
한줄기 푸른 산 백로주(白露酒)에 /물구름 나직한 곳에 산봉우리 떠도네.
옆 사람은 시가 어우러지기 어렵다 하지
마소/경물(景物)이 가이 없어 막연히 거둘 수 없네.
一抹靑山白鷺洲水雲低處䯻鬟浮傍人莫笑詩難就景物無过浩不收
깜박이는 저녘별 푸른
물결 일렁이니/강물 가득 풍색이 뱃길에 많이 걸리네.
통당(通塘)과 섬곡(剡曲 곡강)을 어찌 좋다고 하리요/이곳 승경(勝景)이 거기에
비하면 어떠한가.
明滅斜輝漾碧波滿江風色掛舤多通塘剡曲爭稱勝勝槪方他定如何
영산포(榮山浦)의 풍경이 회진(會津)과 이어졌으니/깊어
가는 가을 연못에 기러기가 처음으로 날아드네.
남으로 얼마나 형양(衡陽)의 동류가 오느냐/갈대꽃 다 떨어진 얕은
물가에.
榮浦風烟接會津 秋深澤國廨初賓 南來多少衡陽侶 落盡蘆花淺水濱
이곳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사간(司諫) 부제학(副提學 대사헌 좌참찬(左參賛)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이름을 떨쳐 많은
비문(碑文)을 남겼던 광산김씨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 1684 숙종 10 ∼1755 영조 31)도 머물며
시를 남겼다.
昨夜榮湖雪 虛明上下天 高亭增爽氣 披納一洽然
또 영조 때의 문신 오달운(吳達運 , 1700 ~ 1747)도
이곳에 올라
납상정 십이경의
시운(納爽亭十二景韻 )을 남겨 정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錦江淸波 금강의 맑은
파도
紗泉古跡 사천의 고적
伽倻秀色 가야산의 수려한 경색
月出晴巒 청만에 뜨는 달
磯頭釣火 기두에 낚시질 하는 불
浦口瀛島 포구의 영도
郎山晩霞 낭산의 저녁 노을
牧野平蕪 질펀한 목야
百尺橫橋 빗겨 있는 백 척의 다리
一眉鷺峰 일미로봉
夕陽風帆 석양의 풍범
蘆洲落鴈 노주에 내려앉은 기러기
이후에도 회헌(晦軒) 김기주(金基周 1772~1836) 등이
다녀가며 시(過納爽亭吟)를 남겼다.
'확금자불견인(攫金者不見人)'이란 말이 있다. 돈을 움켜쥐려는 자에게는 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한다, 물욕에 가리우면 의리나 염치를 모르는 것을 뜻으로 요즘의 세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돈의 권한이
인생에서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음을 매일 느끼는 장면들이 스쳐간다. 우리에게 그 무엇도 원하지 않고 속까지 다 내어주는 정자, 한번쯤 주변의
정자를 둘러보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정자기행은 무제한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夜宿西巖汲湘燃竹, 밤에는
서암에서 자고 상수를 길러와 마시고,
不知世外風波. 대나무로 불을 지피니 세상밖의 풍파는 알 수가 없구나./澹屋觀
홍처랑(洪處亮)이 납상정에서 바라보는 영산강변 겨울풍경의 운치를 뇌리에 각인하며 마무리한다.
에젯밤
영산호수에 눈 내리니 / 위 아래 하늘 빛이 휑하고
높은 정자에 상쾌한 기운이 더하여/옷깃을 젖히고 받아 들이니 한결
흐뭇하네
강물은 대지를 조개어 가고 / 가을 빛은 긴 하늘에 가득하네
술을 들다가 다시 휘바람 부니/바람 연기에 흥치(興致)가 묘연하네
江流割大地 秋色滿長天 把酒還舒嘯 風烟興査然
참고문헌=나주목향문화연구회. 고전번역서/古典譯
문화.오인교
첫댓글 저는 영산강변 나주다목적체육관 뒤편 송월동 신월마을(새월마을) 집성촌의 파주염씨입니다. 납상정의 위치는 영산강변도로에서 바라보면 나주다목적체육관 뒤쪽 언덕에 있는 파주염씨 사당 금강사 왼편 대밭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광복 직후에 퇴락된 상태에 있다가 없어졌다는 것을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제 선조 염희가 세우고 염희의 손자 염진국(제 선조의 형님)이 중수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유지해왔던 납상정 제영시를 정성들여 쓴 글에 감사드립니다..
안녕 하세요?
선조 유고집에 파주염씨와 교류한 詩들이 많습니다.
몇년 前 세지 친정 가는길에 영산포 파주염씨 사당도 돌아보았고, 맞은편에 건재 김천일( 1537~1593)장군 묘소에도 인사 올렸네요..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저희 염가 집성촌이었던 새월마을(신월마을)의 염가 사당 금강사까지 찾아주신 성의에 감사드립니다.
5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염가 집성촌이었던 새월마을(신월마을)과 염가 사당 금강사가 아파트 건설 단지에 포함되어 없어집니다.
근래에 분양 공고가 나왔습니다.
귀 선조 유고집에 우리 새월마을(신월마을) 염가와 교류한 시들을 열람할 수 있을까
해서 문의 드립니다.
저의 선조 좌랑 염진명 형님 교관 염진국 후손 분이 선조 교관공파 자손 대상 홍보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찾고 있어서 입니다.
저도 선조의 역시 좌랑 염진명 시문이 있으면 자손에게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어떤 연유인지 저의 새월마을 선대의 시문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ᆢ
@나씨아줌마 ,,南磵派 ,서울 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