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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다.
먼저, 22-26절까지 읽자.
예수님과 요한이 각각 유대 땅과 애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사역하고 있었다(22-23).
<유대 땅>은 요단강 하류지역을 가리킨다.
<애논>? 아람어로 "샘들"이라는 뜻.
물이 많았던 오아시스 지역으로 요단강 상류지역이었다.
예수님은 요단강 하류에서, 세례요한은 요단강 상류지역에서 각각 사역을 진행했다.
유대땅과 애논지역 간의 거리는 약 40킬로미터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심각한 얼굴로 현재 판세를 보고했다(26).
"선생님, 요단 강 하류지역에서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그분이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몰려갑니다!"
아침 조회시간에 직원들이 오너에게 보고했다.
"사장님 가게 매출이 반토막 났습니다. 우리 고객들이 새로 생긴 가게로 다 몰려갔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등장이 마치 세례 요한의 인기를 빼앗아 가는 위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제가 이 장면에서 얼마전 성도들에게 논란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어느 대형교회 목회자의 동영상 이야기가 생각났다.
"VIP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당신들은 무얼 했느냐?"라고 부교역자들을 다그치는 어느 담임목사의 동영상.
그 담임목사가 세례요한이었다면 "우리 고객들이 이웃교회로 다 몰려갈 때 당신들은 무얼 했는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27-30절까지 읽자.
그러나 세례 요한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27)
"인간이 제아무리 욕심을 부리고 발버둥을 치며 빼앗으려 해도, 하나님이 태초부터 그의 몫으로 결정하여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단 1%도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없다"
지금 일어난 현상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 있고 우리 손을 이미 벗어난 사안이 있다.
세례요한은 지금 일어난 현상은 자신이 통제할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자 질투하며 요한에게 불평했다.
요한의 사역이 이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가는 현상을 '인기 경쟁'이나 '마케팅의 실패'로 분석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는 모습을 ‘교인을 빼앗기는 일’이나 ‘인기 경쟁에서 지는 것’처럼 인간적인 시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를 '신적 배치의 이동'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시간표에 따라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께 사람이 몰리는 것도 하늘이 주신 것이요, 자기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과거의 영광도 하늘이 허락하셨던 것이다는 해석이다.
그러면서 세례요한은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을 들러리라고 명확하게 규정짓었다(28-29)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자신은 신랑이 아니다"
즉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에 섭섭해하거나 슬퍼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잘 나갈때 주인공 신드롬에 빠지기 쉽다.
세례요한도 한때 잘나갔던 사람이었다.
유대지역 유명 인물루언스였고 셀럽이었다.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이 주목하는 영적지도자였다(1:19)
하지만 세례요한은 주인공 신드롬을 극복했던 인물이었다.
주인공 증후군을 " 리딩 액트 신드롬"이라고 명명한다.
리딩 액트 증후군(Leading Act Syndrome, 일명 '주인공 증후군')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상황의 '주연'이어야 한다고 믿는 심리 상태이다.
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카메라가 24시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착각한다.
일종의 관종에 해당하는 부류들이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를 완벽한 주인공으로 포장하려 든다.
많은 현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반드시 '주인공(Leading Actor)'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살아간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작용?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쉽게 낙심하고, 다른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질투와 비교 의식에 빠지게 된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극복비결을?
① 자신의 자리(Position)를 정확히 인식해야한다(28).
자신의 포지션을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규정한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상황 파악이 안돼"
"상황 파악이 안 돼"라는 일상적인 표현을 영적으로 재해석하면, 단순히 '주변 분위기를 모른다'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정해주신 내 몫의 자리(Position)와 분량을 망각하고, 주연이 아님에도 주연처럼 행동하려는 영적 월권행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바로 이 "상황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그들은 지금의 무대가 '예수님이 주연이 되셔야 하는 무대'라는 영적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승인 요한을 끝까지 주연 자리에 앉혀두려 했고, 진짜 주연이신 예수님을 '경쟁 상대'로 오해했다.
반면 세례 요한은 상황 파악, 즉 자신의 포지션(위치)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주연이 아니라 '조연(신랑의 친구)'이자 '안내자(광야의 소리)'임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요한은 28절에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포지션을 재확인시킨다.
조연이라는 포지션은 주연의 자리를 탐내지 않아야 하고, 주연이 돋보일 때 비로소 자신의 임무가 성공작임을 알아야 한다.
빈번히 자주 상황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조연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주연은 하나님이신데, 자신이 주연이 되어 자신 뜻대로 무대를 이끌어가려고 할 때 우리는 영적 상황 파악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많은 영적 갈등과 시험은 자신의 포지션을 벗어날 때 생긴다.
주연이 아닌데 주연처럼 행세하려 하고, 조연임에도 주연급의 대접을 받으려 할 때 갈등상황이 발생한다.
세례 요한처럼 '나는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다'라는 명확한 자기 포지션을 지킬 때, 자신의 내면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가 평안해진다. 이것이 영적 질서이다.
교회와 인생의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은 조연이다.
조연이 우리 포지션이다.
스포트라이트를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킬 때 주인공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다.
② 신랑의 음성(Voice)에 집중해야 한다(29)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히) "쇼쉬벤"? 신랑의 친구, 들러리라는 의미.
유대의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 동안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이때 '신랑의 친구'는 단순한 들러리가 아니었다.
그는 결혼식의 실무 총책임자로서 약혼부터 결혼식까지의 모든 과정을 주관하고, 신랑과 신부의 사이를 중재하며, 잔치의 흥을 돋우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쇼쉬벤으로 지목된 신랑친구는 결혼식 기간 중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당당했다.
결혼식의 절정은 신랑과 신부의 입장이다.
이에 신랑이 신부집에 들러 신부를 데리고 식장에 도착해야 한다.
고대 유대 풍습에서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이동하는 행렬은 주로 캄캄한 밤이나 자정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역사적·문화적 배경 때문에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여인들)' 이야기가 소개된 것이다. 신부는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린다.
당시에는 가로등이나 통신 수단이 없었고, 치안이 불안하여 미모의 신부를 가로채려는 강도나 사기꾼(가짜 신랑)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신랑의 친구(쇼쉬벤)는 먼저 신부의 집에 도착하여 무장을 한 채 파수꾼처럼 신부대기실 문 앞을 지키며 신부를 보호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28)
쇼쉬벤은 신랑보다도 앞서 가서 신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밤이 깊어지면 저 멀리서 횃불을 든 신랑의 행렬이 신부집으로 다가온다.
신부집 정문 앞에서 신랑이나 그 일행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마중 나오라"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이때 신랑의 친구는 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랑의 음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해야 한다.
진짜 신랑의 음성이라면 신랑의 목소리가 확인되는 바로 그 순간, 쇼쉬벤은 모든 긴장감을 내려놓고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쇼쉬벤은 기쁘게 소리치며 문을 열고, 신랑을 신부가 기다리는 처소(혹은 가마)로 안전하게 인도한다.
이렇게 신랑 친구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신랑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을 신랑 친구에 비유했다.
세례요한 자신도 자신이 신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신랑이 아니다 신랑 친구이다.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직상 안에서 자신의 뜻과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매 순간 기도와 말씀으로 내 안의 신랑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밖에서도 우리는 신랑 친구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성도 여러분,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를 기억하실 겁니다.
전 세계의 시선은 달 표면에 첫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에게 쏠렸다.
그는 역사적인 주인공이 되었고, 전 세계는 그의 이름에 환호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숨겨진 숫자를 잘 모른다.
암스트롱이 달에 무사히 내릴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밤낮으로 우주선의 동선을 계산하고 우주선을 설계하고 제작했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무려 40만 명이었다고 한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던 그 순간, 관제탑에 있던 수많은 연구원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셨을 것이다.
그들은 화면에 자기 얼굴이 나오지 않아도, 자기 이름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도, 암스트롱이 발을 딛는 순간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환호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그들이 꿈꾸던 거대한 우주 계획이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 벅찬 기쁨을 누린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의 마음이 바로 이 관제탑 연구원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는 자리를 빼앗긴 패배자요, 조연으로 밀려난 비참한 루저였다.
그러나 요한은 분노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인공 증후군'은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나를 비추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영적인 질병이다.
모름지기 성도는 내가 주인공이 되는 기쁨보다,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드러날 때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내 이름은 지워져도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다면, 내 자존심은 내려놓아도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축제의 관제탑 연구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하며 자신이 주인공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조급함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던 삶에서, 일상과 사역의 모든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