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과 윤리
생명과학연구의 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생명과학 연구자들의 책임도 그만큼 커졌다.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절차를 준수하고, 정확하게 공정하게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연구 성과를 공평하게 배분하고, 또한 연구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늘 숙고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와 관련된 모든 논의를 포함하는 분야가 ‘연구윤리’이다. 다른 어느 누가 먼저 지적하기 전에 우리 연구자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의견을 교환하여 함께 책임 있는 연구 태도에 대한 원칙과 실천방안을 수립할 때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는 연구윤리 뿐만 아니라 생명과학 연구와 관련된 생명의료윤리 및 환경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생명의료윤리와 환경윤리는 여러 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학제적 분야이다. 이들 분야는 생명과학의 연구 성과에 크게 의존하는 동시에 사회철학, 법철학, 도덕철학 등 철학의 여러 분야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사회학, 법학, 행정학 등의 사회과학 역시 이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아기를 낳을 때부터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발전소나 도로를 건설할 때에도 생명의료윤리나 환경윤리의 논의가 곧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논의가 과학적 합리성과 구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과학 연구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논의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료윤리란?
윤리학의 한 분야인 생명의료윤리의 위치를 알기 위해, 먼저 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의 본성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윤리학은 ‘도덕에 관해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정의된다.
응용규범윤리학으로서의 생명의료윤리
철학자들은 흔히 윤리학을 규범윤리학(normative ethics)과 메타윤리학(meta ethics)으로 나눈다. 규범윤리학을 통해서 철학자들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인간행위와 관련하여 결정하려고 한다. 한편 메타윤리학에서 철학자들은 도덕 판단들의 본성을 분석하거나 특정한 도덕 판단의 정당화를 위한 방법 등을 규정한다.
규범윤리학은 다시 이론규범윤리학(theorectical normative ethics)과 응용규범윤리학(applied normative ethics)으로 나뉜다. 이론규범윤리학의 과제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를 통해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하나의 이론을 세우는 것이다. 반면에 응용규범윤리학은 특정한 도덕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가 응용 규범윤리학의 대상이 된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 그리고 만약 정당화된다면, 어떤 조건들 아래서 그렇게 되는가?’
위의 구분에 따르면, 생명의료윤리는 응용규범윤리학의 한 분야이다. 생명의료윤리의 과제는 의료행위나 생명의료적 연구와 관련해서 생기는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응용윤리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논의의 성격이 규범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 응용윤리학의 관심은 사람들이 가진 도덕관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인 일이다.
생명의료윤리 문헌을 접할 때는 규범적인 논의, 사실적인 논의, 개념적인 논의 등으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방법이 도움이 된다.
생명의료윤리의 규범적 논의
생명의료윤리학에서 전형적으로 제기되는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ᄀ) 의사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는가?
(ᄂ) 환자의 개인 의료 기밀을 유출하는 것이 도대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ᄃ) 안락사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
(ᄅ) 대리모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가?
위의 규범윤리학적 질문들이 특정한 개별 행위와 관행에 관한 것인 데 반해, 다음 물음들은 생명의료윤리학이 법률의 도덕적 정당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
(a) 한 사회가 낙태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때 그 사회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b) 우리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해야 하는가?
(c) 한 개인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들에 의해 정신 병원에 수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법률로 정해야 하는가?
두 번째 유형의 물음들은 생명의료윤리 논의가 이론 규범 윤리학뿐만 아니라 사회 철학, 정치 철학, 법철학의 논의들과도 한데 얽혀 있음을 보여 준다.
생명의료윤리의 경험적 논의
생명의료윤리 논의가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것이지만, 개념적 논의와 사실적(경험적) 논의의 도움 없이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교리에 따라 수혈을 거부하다가 죽었다고 하자. 그의 죽음을 자살로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는 개념적 문제의 복잡성 외에도 경험적 문제가 존재한다. 즉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죽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의 진상이 밝혀지려면 아마도 심리학자나 사회학자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생명의료윤리에서 사실적 논의가 특별히 중요한 경우들이 있다. 어린이를 피험자로 사용하는 임상시험(clinical trial)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규범적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적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를 피험자로 이용하지 않는다면, 문제의 치료 기술이 어느 수준까지 개발될 수 있는가?’
생명의료윤리의 개념적 논의
생명의료윤리의 사례 가운데는 연관된 개념에 대한 논의가 특별히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뇌사자로부터 심장, 장, 뇌, 폐 등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관을 이식받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규범적으로 논의하려면,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세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료윤리 논의가 등장한 배경은?
그 배경으로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현대 생명의료기술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생명 의료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둘째, 의료시술 환경이 예전에 비해 훨씬 까다로워졌으며 날이 갈수록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생명의료기술의 발달
최근의 생명의료연구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생명의료연구의 놀라운 성과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도덕 문제들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해묵은 윤리학 문제들에 관해서도 새로운 차원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체외수정(IVF), 인간복제 같은 인간 생식에 관련된 의료 기술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윤리적인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한편에서는 생명의료연구가 진보함에 따라 해묵은 문제들은 더욱 복잡해졌다. 안락사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심하게 손상된 신생아들의 경우, 예전 같으면 사망했겠지만 오늘날에는 살려낼 수 있다.
뇌사에 빠진 환자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에는 이들의 생명이 유지될 수 없었지만, 발달된 의료 기술 덕분에 오늘날에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차원의 문제들이 생겨났고 아울러 이런 문제들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예로 낙태 문제를 들 수 있다. 비록 낙태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오늘날 산전 진단이 가능한 의료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유전성 질환이 발견되면 태아를 낙태시키는 경우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끝으로, 현대 생명 의료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인간을 피험자로 삼는 생명의료 연구들의 가치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의 윤리적 책임 한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의료환경의 변화
오늘날 생명의료윤리가 활발히 논의되는 두번째 이유는 병원의 의료 시술 환경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데 있다. 과거의 의료 시술이란 대개 의사와 환자 개인 간의 관계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료 시술에는 병원, 의사 그리고 다양한 보건의료 종사자들이 긴밀한 협조 속에 공동으로 참여한다. 또한 환자의 소비자 권리가 신장됨으로써, 의사들은 의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쩌면 자신들이 지게 될지도 모르는 법률적 책임의 한계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병원과 의사들은 자신들이 의학적․법률적․윤리적 문제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관해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여기에 더하여 사회 정의에 관한 자각이 더욱 뚜렷해짐에 따라 서구 선진국에서는 생명의료 문제들을 분배적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한 부분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보건권(right to healthcare)이나 부족한 의료 자원의 할당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생명의료윤리 분야의 성장
생명의료윤리의 영역에 속하는 도덕적 논쟁거리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생명의료윤리가 철학 내에서 어엿한 한 분야로 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국에서는 1970년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 의료 윤리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 곳이 뉴욕 주에 있는 헤이스팅스 센터(Hastings Center) 와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 부설 케네디 윤리 연구소(Kennedy Institute of Ethics) 이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는 수십 종에 이르는 생명의료윤리 학술지가 발간되고 있으며, 생명의료윤리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세계 전역에서 끊이지 않는다. 1978년에는 『생명 윤리학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of Bioethics』 초판이 간행되었다. 이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생명 의료 윤리를 전공하는 철학자, 신학자, 의사, 간호사와 다른 전문 직종 종사자들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국제적으로는 1993년 국제생명윤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ioethics, IAB)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1995년 아시아생명윤리학회(Asian Bioethics Association, ABA)가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11월 한국의료윤리교육학회를 시작으로, 1998년 2월 한국생명윤리학회, 2002년 3월 한국임상연구심의기구협의회(KAIRB) 등이 창립하여 학회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등 이 분야에서 활동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