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167)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46) - 디모데전서 강론(8)
디모데전서 강론(8) - 5장 3절 ~ 16절
사도 바울의 분석과 판단과 해법 제시 - ①과부에 대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행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판단은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과부를 존중하라고 하는데 특히 홀로 되어 의지할 곳 없는 과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약 어떤 과부에게 자손이 있으면 먼저 그 가족이 책임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성으로 채워진 클레로모스로서의 과부의 기도 내용은 다른 데 관심이 없고 당연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클레로스의 형성과 확산이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제각각 다른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싸르크스를 따라 사는 향락을 쫓는 과부는 굳이 존재할 당위성이 없는 존재로서 살아 있으나 죽어 있으나 별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당시 사회상은 과부가 되면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말고 구원을 얻어 성숙한 클레로노모스로 살 수 있도록 해주라고 이 모든 것을 디모데에게 가르치는 것이다.(7절)
클레로노모스들이 자기 친척이나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신실하지 못한 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면서, 에클레시아의 과부 명부에 올릴 사람은 순결한 결혼 생활을 했어야 하고, 나이가 60이 넘어야 하고 선한 일을 실천까지 하고 있는 것이 검증이 되어야 올릴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명부에 올린다는 것은 클레로스를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혜택만이 아니라 헌신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명부에 올리는 것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고, 또는 올리지 않는 것도 아직 준비가 안 된 그 사람에게 맞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육의 사랑이다. 따라서 양쪽을 다 보호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11절부터 13절까지 기독교의 성경 번역본들을 보면 마치 젊은 과부를 인격 파탄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독해하고 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보듯이 구원은 인간의 도리를 따라 사는 자들이 여호와의 도리를 따라 사는 자들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성경 말씀이 인간의 도리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젊은 과부들은 자기 목숨만큼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젊은 과부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과 해법을 제시하는 것인데 저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를 비난하고 헐뜯는 것으로 독해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에 대한 비판과 헤아림은 악한 열매를 맺으니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네 눈에 있는 들보가 빠져야 네 형제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보인다는 것이다.(마7:1-4) 그래서 눈에서 들보가 빠진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증언한 것이다.(고전2:15-16)
젊은 과부들을 아끼는 사도 바울의 심정과 목적으로 볼 때 젊은 과부들을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욕에 휩싸여 그리스도를 위한 과부로서의 사명을 포기하고 결혼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에 처음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저버리게 되고 따라서 판단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 과부들이 처한 객관적인 실제 상황이 자기 가정사에 바쁜 일이 없고 한가한 상황에서 집집을 방문하는 과부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흥미 거리를 찾아 수다와 참견을 하게 되고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하는 말까지 하는 일도 생기니 젊은 과부들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기 가정을 잘 꾸려나감으로써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적이란 사탄과, 에클레이시아를 험담하는 외부 사람의 조롱이나 손가락질을 포함한다.
젊은 과부들이 정욕에 휩싸인다는 말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정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 정욕으로 간음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가 클레로스 안에서 재혼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에 대해서 그들을 위해서 정확하게 분석하고 판단하고 해법을 제시한 것이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경쟁상대로 보고 비난하고 헐뜯는 인간의 실존 하에서는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를 비난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 필연이다.
에클레시아는 홀로 되어 의지할 곳 없는 참 과부를 돌보아야 하니 신실한 형제 또는 자매에게 과부 친척들이 있으면 자신들 스스로 돌보게 함으로써 성회가 부담을 떠안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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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기도는 최윤주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