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복 받고 스스로 극락간다 (2)
부처님은 그런 다생의 여러 중생들이 각자의 근기에 따라 성불의 길을 헤아려 걸을 수 있도록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말씀으로 성불의 방편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나 참선수행 염불수행을 하는 것이나 다 성불로 이르는 길을 스스로 헤아려 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자신을 구제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미 방편은 수없이 제시되어 있으되 중생이 그 방편을 믿지 않거나 못본채 하거나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은 그 방편에 의지하려는 습이 익고 익어서 그 방편에 끄달려 다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방편에 끄달려 본업(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망치는 것은 차라리 그 방편의 행적을 모르는 것보다 못한 일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방편에 끄달려 버리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염불을 열심히 하면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다고 합시다.
잘못된 믿음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잘못된 것이기도 하고 잘된 믿음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시(是)와 비(非)는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믿음에서 부처님이 누구냐에 달려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각을 얻어 일체중생이 불성을 잘 갖추고 있음을 보셨다고 했는데 자기 스스로가 갖추고 있는 불성이 소원을 들어 준다고 믿으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이나 여러 보살들이 소원을 들어 주신다고 믿으면 틀린 것입니다.
제불보살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디 다른곳에 대상으로 존재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상에 넋을 잃고 대상으로서의 부처님께 자신을 맡기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불교는 자각의 가르침이고 자각의 완성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종교입니다.
그 길은 자기 스스로 갈 뿐입니다.
자기의 인연에 따라 스스로 가는 그 길의 끝에서 대열반을 얻으면 그 법신으로서 여러 중생에게도 성불의 아름다운 인연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자력회향(自力廻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팔정도나 육바라밀 등의 도를 잘 닦고 그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닦는다는 대목에 주의해야 합니다.
남의 등을 긁으면 내가 시원해 지지 않는 것처럼 나의 불성은 내가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그 닦음의 공덕을 이웃에 회향함으로 아직 닦지 못한 중생에게 사표가 되고 그런 과정을 거치고 거치면서 중생계가 더 빨리 극락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소망을 빌더라도 대상의 부처를 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갖춰진 여래의 성품, 바로 자신의 불성에 의지해 소망을 빌고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기가 낮은 까닭에 불상이나 보살상을 보고 예불하고 기도하지만 실상 그 형상이 곧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경전들을 보면 대개가 '이 경전의 이름만 한번 들어도 무량의 복을 얻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경전의 내용을 잘 간파하여 자신의 불성을 밝히라고 강조한 것이지 그 이름에 끄달리거나 문자나 의미에 집착하라는 의미는 추호도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강을 건너는 배와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이라는 배는 강을 건너면 버리는 것이지 강을 건너서도 떠메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수행이 다 강을 건너는 배입니다.
오직 강을 건너는 일이 중요할뿐 배의 생김새나 크기 같은 것에 집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배를 타고 어떤 강을 건너고 있습니까. 배는 잘 나갑니까.
더러 노나 삿대가 부러지거나 썩지 않는지 배 밑창이 새지나 않는지 잘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 배를 젓는 사공은 자신입니다.
부처님은 노를 잘 젓는 방법과 노를 놓치지 않는 방법을 일러 주시고 저 건너에 피안의 언덕이 있음을 일러주신 스승입니다.
스승의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피안의 언덕을 보고 일심으로 노를 저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말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복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복을 준다는 다소 과격스러운 말의 의미를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자신을 구제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생각해 볼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모두가 자신을 구제하는 방편이니 따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그저 실천수행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바로 사는 것만도 자기를 구제하는 큰 방편입니다.
하물며 경전을 공부하고 참선 수행하여 마음을 닦는 것은 얼마나 큰 방편이겠습니까.
그 방편에 끄달리지 말고 부지런히 닦아 나가면 스스로 성불의 길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8정도가 있잖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의 바른 실천 여덟가지가 팔정도 입니다.
그걸 잘 지키는 삶이 이미 스스로를 유랑의 중생계에서 제도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잘들 아시는 말로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이다'라 했습니다.
참선수행으로 부처님의 마음 곧 불성을 꿰뚫어 보고 교학참구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마하는 것은 하나같이 중요한 일입니다.
결국에는 문자도 여의고 화두도 여의고 적정열반의 대도를 증득하려면 이런 수행방편이 다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하는 사람이 교를 몰라서도 안되고 교를 하는 사람이 선을 무시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불교의 특징이자 자랑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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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중생 자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에게 있어 우주법계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크신 스승이십니다.
그 스승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일체중생의 이고득락 해탈성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 끄달려 스스로 혼미하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밝혀 보이신 길을 통해 우리는 모두 해탈성불의 대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팔만대장경이 일러주는 진리의 소식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자기 스스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못믿는 사람이라면 경전을 봐도 경이 아닌 문자를 탐닉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참선을 한다해도 공안이 없는 앉은뱅이 흉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천길 낭떠러지 끝에 선 마음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구제하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믿고 정진하는 사람은 속이지 않습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곧 부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다 부처인데 어찌 부처를 속이고 부처가 되겠느냐 그말입니다.
여러 가르침의 방편을 따라 자기를 구제하기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속이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 곧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자기를 속이는 것은 부처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신은 구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구제해 주지 못하는 자기 한몸을 스스로 속이는데 어찌 구제의 인연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원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량할 수 없는 윤회의 고통 속에서 중생의 몸을 벗고 절대 자유 절대진리의 몸을 얻기위한 원력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인연을 지어야 하고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제불보살의 위신력에 의지하는 것은 방편이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방편을 방편으로 잘 다스리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스스로 원을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그 지혜는 스스로 갖춰지는 것입니다.
굳은 신심을 흐트리지 말고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진의 열매는 반드시 열립니다.
아주 실하게 열려서 온 중생계에 그 복락을 회향할 것입니다.
#야옹스님 #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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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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