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왕」
198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골딩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 복무했다. 전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 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파리 대왕」은 1954년에 출간되는데, 당시 핵분열의 파괴력을 알게 된 인류가 과연 영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던 시기인지라 「파리 대왕」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간략한 줄거리>
핵전쟁이 벌어져 한 무리의 영국 소년들이 비행기로 후송되는 과정에 적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고 소년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랠프와 피기는 소라를 이용하여 흩어져 있던 소년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지도자를 선출한다. 랠프가 지도자로 선출되고, 회의 시 소라를 쥔 사람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며 누구나 발언의 기회가 있으나 반드시 소라를 쥔 사람만이 발언하기로 정한다. 랠프는 구조신호로 불을 피울 것을 제안하고 이에 성가대의 연장자이자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강한 잭이 불을 관리하겠다고 자청한다. 랠프는 오두막 짓기와 구조 요청을 위한 불 피우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잭은 현실적으로 고기를 먹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냥을 강조해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된다. 어느 날 해안가에 배가 나타나 구조신호를 보내야 했지만 잭이 멧돼지 사냥을 하느라 불 피우는 일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구조요청이 무산된다. 이에 랠프와 잭의 감정이 격화되자 랠프의 의견을 지지하며 잭을 책망하던 피기가 잭에게 맞게 되고 그 과정에서 피기의 안경 렌즈 하나가 깨진다. 안경은 피기에게도 중요한 물건이지만 불을 피우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도구이다. 랠프는 소라를 불어 다시 회의를 소집해 불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이때 어린 소년 하나가 발언권을 얻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랠프는 결국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명확히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잭은 소라를 갖지 않고도 마음대로 발언하며 회의의 규칙을 무시하게 되고 랠프는 이를 강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짐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하면서도 내적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던 소년들은 죽은 낙하산병의 실루엣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풀렸다 줄어들었다 하는 모습을 보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짐승에 대한 공포감을 키운다. 랠프와 줄곧 의견 대립이 있었던 잭은 사냥부대를 이끌고 무리에서 이탈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다. 잭은 멧돼지 사냥을 해서 짐승을 달래기 위한 제물로 멧돼지 머리를 바친다. 랠프와 남은 소년들에게도 원하면 축제에 참여하라는 말을 전한다. 사이먼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짐승이 있는 곳에 다가가 짐승의 실체를 파악하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축제를 벌이는 잭의 무리에게 달려간다. 천둥번개가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사냥의 열기로 가득 차 달려가던 잭의 무리 앞에, 진실을 알려주려던 사이먼이 숲에서 뛰쳐나오자 잭의 무리는 짐승으로 착각해 죽인다.
잭과 사냥부대는 자신들의 사냥감을 요리하기 위해 불이 필요하자 피기의 안경을 빼앗아간다. 안경이 없어 불을 피울 수 없게 된 랠프와 피기, 쌍둥이는 잭의 근거지인 성채 바위를 찾아가 안경을 돌려 달라고 호소하지만 거부당한다. 랠프와 잭이 다투는 사이 행동대장 로저는 지렛대에 걸쳐둔 바위를 굴려 피기를 죽게 한다. 함께 간 쌍둥이도 포로로 잡아 자신들의 무리에 강제로 합류시킨다. 혼자 남은 랠프는 도망쳐서 숨어버린다. 잭과 사냥부대는 랠프를 사로잡기 위해 수색에 나서고 포위망을 좁히려고 숲에 불을 지른다. 랠프는 위험한 고비를 맞아 거의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가까스로 바닷가로 뛰쳐나온다. 이때 연기를 보고 섬에 들른 영국 해군 장교를 보게 된다.
<윌리엄 골딩의 생애와 문학 발췌>
작가가 한 떼의 소년들을 무인도에 올려놓고 제기하는 의문은 내면화된 문명의 가치가 어느 정도의 견고성과 효용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짐승 얘기에 암시되어 있는 공포를 극복하고 하루빨리 구조를 받는 것이 초급한 당면과제이다. 처음 얼마동안 그들은 소라에 상징되어 있는 동의의 관습을 존중하며 섬 생활에 적응해 간다. 그러나 곧 그들은 몸에 색칠을 하고 멧돼지머리를 막대에 꽂아놓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짐승을 위해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사냥을 자축하는 피의 제전을 벌이고 짐승이라고 착각하여 사이먼을 죽이고 또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더 캐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압렵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문명의 겉치레를 모두 던져버리는 것이다. 구제의 가망이 멀어지고두려움이 커짐에 따라 그들의 타락도 심화해 간다. 랠프를 살해하려 들고 돼지라는 별명의 동료를 죽이고 꼬마 쌍둥이들을 고문한다. 인간 본성은 어둠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파리대왕」의 우의적 차원은 주요 등장인물을 검토해 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첫장에서부터 등장하는 랠프는 타고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잭의 저항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만한 냉혹함이나 자기 고집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는 꼬마들의 복지를 근심하는 따뜻함과 사이먼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구조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식을 대표하며 잭과는 대조적으로 문명의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대조되는 잭은 검은 제복을 입고 있으며 늘 그림자나 어둠과 연결되어 있다. 신체적인 다부짐, 도덕적 파렴치, 권력지향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그는 꼬마들에 대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한다. 학교에서 성가대 반장이었고 샤프조로 노래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 지도권을 요구한다.
요컨대 그는 야만으로의 복귀를 대표하는 어둠의 인물이다. 유독 돼지라는 별명으로 등장하는 근시 소년은 말투로 보아 받은 교육도 빈약한 편이고 집안도 어려운 것 같다. 그는 천식이 있고 눈이 나쁘다. 몸이 민첩하지 못하고 안경을 쓴 그는 지혜와 점잖음을 갖춘 꼬마지식인이다. 그는 랠프의 브레인이며 또 창의성이 있는 두뇌의 소유자이다. 잭과 랠프의 대결에서 그가 먼저 희생되고 만다는 것은 지식인의 운명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도 시사하는 바 많다. 두려워하는 짐승이 사실은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려 내려왔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이먼은 성자이며 예언자다. 그는 섬에서의 공포가 실은 소년들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각성자이다. 잭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나오는 로저는 소설 속에서 얘기를 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는 두뇌보다는 체력을 바탕으로 언제나 말없이 잔혹하게 행동하는 사디스트이며 고문 담당자이다.
우리는 또 이 작품 속에서 소라, 연기, 안경과 같은 비근한 사물이 기능적인 상징의 소도구로 활용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가령 소라가 회의 진행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고 그 소유가 랠프에게 자연스레 어떤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도 인간이 상징적 구속력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라의 무시와 파괴는 양식과 합법성의 파기를 상징한다. 돼지라는 별명의 소년이 쓰고 있는 안경은 지식과 문명을 상징한다. 돼지의 안경은 불의 근원이 된다는 점에서 문명의 상징이다. 그것이 부분적으로 망가지고 깨어지는 과정은 소년들에게 있어서의 문명의 점진적인 퇴조를 시사한다.
악마를 뜻하는 「파리대왕」을 통해서 인간 본성의 어둠을 암시하는 이 작품은 도덕적 우화나 정치적 우의소설이란 차원을 넘어서도 가령 종교의 기원이라든가 성 충동과 폭력의 충동에 있어서의 연관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내용 발췌>
p30.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 - 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
P102.
“배가 보였었어. 저기, 넌 봉화를 줄곧 올리겠다고 해놓고는 꺼뜨리고 말았어!”
그는 잭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잭도 고개를 돌려 랠프를 바라보았다. ……
“우리에게 고기가 필요했어.”
이 말과 동시에 피 묻은 창칼을 손에 들고 잭은 벌떡 일어섰다. 두 소년은 얼굴을 맞바라보았다. 한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 잭은 창칼을 왼손으로 옮겨 잡고 찰싹 늘어붙은 머리칼을 내려서 이마에 피를 묻혔다.
p113.
돼지는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 퉁퉁한 머릿속에서 한 걸음씩 착실하게 사고를 진행시킬 수가 있는 위인이다. 그저 대장이 못 되었을 뿐. 그러나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집에도 불구하고 돼지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
p130.
랠프는 소리쳤다.
“사이먼의 말을 들어! 그가 소라를 잡고 있으니까!”
“내 말은 …… 짐승은 아마 우리들 자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p138.
“어른들은 사리에 밝아” 돼지의 말이었다. “어른들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아. 모여서 차를 마시고 토론을 하지. 그러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돼-”
“어른들 같으면 섬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지. 혹은 ……”
“어른들 같으면 배를 만들 거야 - ”
세 소년은 캄캄한 속에 서서 어른들의 세계가 얼마나 당당한가 하는 것을 알리려고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p214.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하고 그 돼지머리는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 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p235.
“우린 마지막 판에 가서야 끼어들었어. 그들은 캄캄해서 보질 못했어. 어쨌든 네 말대로 나는 그저 바깥쪽에만 있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랠프는 중얼거렸다. “나도 바깥쪽에만 있었어.” 돼지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았어. 우린 바깥쪽에 있었어. 우린 아무 짓도 안 했어. 우린 아무 것도 보질 못했고”
p259.
얼굴을 가리는 색칠이 얼마나 사람의 야만성을 풀어놓아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발제>
1. 소라를 가진 사람이 발언권을 갖는 것은 정당한가?
규칙상, 누구나 소라를 가지면 말할 수 있으므로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꼬마들은 나서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조리 있게 말하기 어려워 소라를 드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소라는 말을 잘하거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무리를 이끌 능력을 가진 사람, 이미 권력을 쥔 사람에게 유리하다. 랠프는 가장 먼저 소라를 점유했고, 돼지는 적절한 판단을 잘했기 때문에 소라를 가지는데 적극적이었다.
2. 누가 짐승을 이용할까? 현대 사회의 짐승은 무엇인가?
잭은 공포를 이용해서 아이들 마음을 통제했다. 제물을 바치면 짐승이 공격하지 않을 거라며 멧돼지를 잡을 때마다 막대기에 멧돼지머리를 꽂아 짐승에게 바쳤다. 제물을 제공하려면 멧돼지를 잡아야 하고, 멧돼지를 잡으려면 잭의 탁월한 지도력이 따라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에게 제물을 바쳐 위안 받기를 원한다. 멧돼지머리를 바치면서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이 극에 달하자 이를 계기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냉전 시대의 지도자들은 전쟁 공포심을 자극해서 권력을 유지했다. 나쁜 지도자들은 평소에는 소라를 불어 권력을 지키려 하고, 급할 때는 짐승을 내세워 사람들을 통제했다.
3. 소년들은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어른’을 갈구한다. 과연 ‘어른’이 있었다 면 더 나은 세계가 펼쳐졌을까?
4. 작품의 맥락으로 보아 작가는 성선설보다 성악설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이에 동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