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산행이라는 말에는 유감이 없을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뭔가 초조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왠지 주는 느낌이 짠하다.
“머리의 백발도 긁을수록 빠져/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할 지경이구나”(두보: 春望)라는
한탄이 남의 일 같지 않아져서가 아니다. 차라리 “서리맞은 단풍잎이 이월 봄꽃보다
더 붉도다”(두목; 山行)라는 호기가 오히려 내 속으로도 허풍처럼 들려서 이다.
금년 송년산행은 내 개인적으로나 우리 오지팀으로나 특히 호젓하고 허허롭다.
더구나 날은 금년 들어 최고로 춥다고 하고 온기를 보태줄 동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빠져 차안이 휑하다. 금년도 마지막 산행을 동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무리해서 나왔다는
버들님이 고맙다.
무박은 대문을 나설 때의 심리적 저항만 극복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완성하게 되어 있다.
오히려 들머리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이라든가 어느 정도 올라섰을 때 발아래 보이는
마을의 가로등이 전해주는 인간세상의 향기 같은 것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 동안은 절대로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별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 같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어느 집마당 안으로 들어 무조건 올라서니 포장 도로가
나온다. 아마 미사리 계곡으로 들어가는 도로인 듯 싶다. 도로를 건너 다시 오른다.
헤드랜턴에 의지하는 산행은 주위풍광을 못 보는 장님산행이라는 비판적 견해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묘미가 있다. 나무도 산도 잠들어 있지만 나는 걷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어두움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 움직이며 묵상이
가능한 시간, 생명의 활기를 증명하면서도 내 안의 나에게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좌선을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날 너무 길게 그어 중간에 이쪽 저쪽으로 자르고 내려온 적이 몇 번 있을 뿐 미사리계곡 입구에
서 오르는 것은 처음이다. 요즘 줄긋기 달인의 경지에 오른 상고대님이 적어도 10회 정도는 찾아야
명산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사람도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까지는 보아야 어느 정도 용모를 파악했다고 할 수 있을 진대, 산도 명산이라면 그 정도의
예의는 갖추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산의 품격으로 치더라도 동네 뒷산보다 명산이 아무래도
낳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눈도 적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지 더 미끄러운 것도 같다. 초장이지만 줄곧
가파르고 가끔 칠흑 같은 어둠속에 우람한 바위덩어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회하면 다 지나갈 수
있다. 희끄므레 여명이 밝아오고 경사가 숨을 죽인 곳에서 잠시 좌판을 편다. 예의 메표 과메기가
미처 배낭 밖으로 나오기 전에 도자가 선수를 친다.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메대장과 도자가
손수 김에 미역에 실파에 초고추장까지 넣고 과메기를 얹어 정성스레 건네준다. 이 맛에 산다.
오지산행에 이 맛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건 그냥 달리고 정복하고 기록하는 기계적인 행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흰소리가 정신건강에 얼마나 좋은지 과학적으로 알 순 없지만 그러나
나는 무조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뒤끝없는 웃음에 곁들여 막걸리 한잔 걸친 뒤 서둘러
길을 나선다. 바람이 안 불어도 배낭을 벋어놓으니 등짝이 서늘하게 시려오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이제 각자의 산행에 들어간다. 달리는 사람은 달리고 거시기를 찾는 사람은 거시기를
찾는다. 물론 제 맘이다. 제 각자의 취향이다. 그러나 겨울 단체산행에서는 유의할 점이 있다.
결국은 후미가 와야 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레이스 운영을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정상에
가장 먼저 당도했다는 기쁨도 잠시뿐 산 아래쪽을 바라보며 개 떨듯이 떨어야 한다. 그리고는
맨 나중에 오른 동료를 향해 ‘왜 이렇게 안 왔느냐’고 볼멘 소리를 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 수도 있고, 유독 거시기에 눈이 팔려서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든 얼굴에 대고 더 이상 뭐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자는
불렀을 때 대답을 하면 ‘아, 오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냥 갈까 봐 대답을 안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애교다. 귀엽지 않은가. 귀엽게 봐 주어야 할 귀여움이다. 그건 도자가 대의를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여운 도자, 만수무강해다오!
내년에도 활약을 기대하마.
시루봉이라는 비닐코팅이 붙은 938.3봉을 지나자 지도에 없는 새로 닦은 임도가 나타난다.
시간도 얼추 되고 해서 점심 자리를 편다. 라면에 오뎅을 넣어 배불리 먹는다. 내 버너는 열심히
일하고도 언제나 처럼 시끄럽다고 한마디 듣는다. 그러나 그래도 좋단다. 그나마 없었다면
뼛속까지 떨리는 수많은 날들을 어떻게 지낼 수 있었겠는가. 아는 사람은 알아준다.
지난날 괘관산에서 짜파게티에 눌려 체면이 구긴 적도 있지만 가이버 처럼 남들이 알아 주지 않아도
묵묵히 봉사하는 친구도 있는데 뭐가 대수랴. 앞으로도 계속 간다. 걱정하지 마시라. 오빠가 있다.
디저트로 해마가 가이버가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커피는 역시 신마담 커피야’라고 추임새를 넣는다.
뭔가 의미심장한 얘기 같은데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힌다. 메아리 대장님은 그 이유를 아는지 지긋이
웃는다.
어래산이 바라보이는 봉우리는 그어진 선에 의하면 다시 백을 해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12시 남짓하므로 일단 어래산에 오른 뒤, 오른쪽 능선을 따라 진행하다가 무조건 계곡쪽으로 떨어졌
다가 옆 사면을 따라 복귀하도록 계획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곳과 어래산 사이의 거대한 면적을 벌
목을 해놔서 완전히 운동장처럼 변해있다. 더욱이 정오의 햇살이 눈에 반사되어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있다. 실눈을 뜨고 고개를 숙인 채 시동을 건다. 눈이 상당히 깊지만 가이버가 발자국을 내 준 덕분
에 따라 가는데 어렵지 않다. 삼십분 정도 힘을 쓰니 헬기장처럼 평평한 정상이다. 한쪽 켠엔 조그만
정상석이 있고, 사방으로 두위봉, 태백산, 장산, 함백산, 소백산 등등이 조망된다. 특히 꼭대기가
아예 하얗게 변한 소백산이 장관이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땀 흘리며 고생한 보람이 있다.
어래산은 우리나라에 몇 군데가 있다. 특히 영월의 이곳 어래산은 공민왕이 난을 피해 머물다 갔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공민왕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다. 최근 ‘쌍화점’이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공민왕을 지칭하는 듯한 인물을 그리면서 나약한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왕비와 호위무사
를 합궁하게 하는 이상행동자로 묘사한 적이 있는데 이는 부당한 평가라고 본다. 공민왕은 실제로는
민족정신이 강한 왕으로서 원나라의 간섭기관인 정동행성을 철폐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으며 각종 개혁에 나서는 등 실천력과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아기를 낳다 죽자 그때부터 정사에 관심을 잃어 부정적으로 변하였다.
당명황(당현종)이 아들의 첩인 양귀비를 사랑한 것에 대해서는 백거이 같은 시인이
장한가(長恨歌)에서 아름답고도 애절하게 묘사한 바 있거니와, 그와는 아예 질적으로 다르며 훨씬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고 절절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통한에 대해서는 한마디 위로도 없이
성격파탄자로 폄하한다는 것은매우 슬픈 일이다. 제 아내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어찌 예술이
아니겠는가. 이 땅 시인들의 부족한 시적 감각과 상상력을 아쉬워할 뿐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외롭지 않다. 무속인들 중 공민왕을 주신(主神)으로모시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백성들 마음속의 금선에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먼 후세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다면, 공민왕의 슬픔은 아름다운 우리 말로 절절하고 고귀하게
피어나리라.
계획한 대로 어래산 오른쪽을 내리다가 계곡을 건넌 뒤 올려 쳐서 백하기로 했던 봉우리로
복귀하였다. 이제껏 간간이 산악회 표시기도 있었지만 어래산에서 내리는 길은 그야말로 오지다운
오지가 되겠다. 다만 한가지, 중간에서 새로 난 임도를 만났다. 아까 점심 먹던 임도에서 연장이
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임도를 만나면 우선 당장 오르는 것보다 도로가 가는 대로 능선을
돌아서면 낮은 안부나 내려갈 능선에 편하게 붙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틀렸다. 굽이굽이 돌다가 중간에 임도가 끊겼다. 개설하다 만 것이다.
사면을 트레버스하여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할 수 없이 현위치에서 능선으로 기어 올라간다.
제대로 죽을 맛이다. 한계령님은 세번이나 밑으로 주르르 미끄러져 아주 탈진상태이다.
있는 힘 없는 힘 다 빼고 능선에 올라서니 바람까지 분다.
해는 넘어가고 갈 길은 멀고 겨울 산의 매서움을 다시 한번 맛본다.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는 상고대, 해마, 더산님 등과 합류한 다음 하산하는 작업에 일로 매진한다.
대단한 경사다. 눈이 있어 미끄럽긴 하지만 편한 점도 있다. 쭉쭉 내린다. 이 능선 저 능선 갈아타고
두 시간여의 고투끝에 계곡에 다다른다. 계류를 따라 소로가 나있다. 이제 고생끝이라고 쾌재를
부르며 내달리지만 곧 길이 없어진다. 이곳 저곳 탐색해 본 결과 반대편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계곡에 수량이 많아 건너기 어렵다. 얼음이 두껍게 언 곳을 골라 조심조심 건넌다.
계곡 입구를 막은 철조망 펜스를 넘어 얼마간 나가자 어둠이 밀려오는 도로변에 우리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송년산행 제대로 짭짤하게 한 것이다. 어쨌든 보람찬 기분이 든다.
산행끝은 언제나 즐겁다. 영월로 가는 버스안에서는 서로에게 전하는 덕담이 난무한다.
송년산행에 참가한 동료나 오지 못한 동료나 모두 금년 한해 덕분에 즐거웠으며, 내년에도
변함없이 오지산행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소원성취 만사형통.
첫댓글 오지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새해에도 님들과 함께할 수 있음을 소원하며
모두 가내평안&만사형통을 기원드립니다.
내년에두 잼난 산행기 많이 올려주세욤
오지의 여러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위하여사랑합니다,,,여러분 계속 사랑해 주세요
오지를
오지를
ㅎㅎ, 도자님의 사진을 빌려오셨군요, 내년에도 즐거운 산행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