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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을 만한 때 고후 6:1-2절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대부분은 솔로몬이라고 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더불어 부까지 허락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지 그가 쓴 말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젊은 시절에 쓴 아가(Song of Songs)를 보시면 - 참으로 아름다운 연애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과 시골처녀 술라미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를 얼마나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장년기에는 잠언를 기록했습니다. 잠언서를 읽어보면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노년기에 기록한 말씀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에는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려본 그가 인생이란 이렇더라고 하면서 정의를 내린 내용들이 나오고 젊은이들에게 부탁할 말씀이 나옵니다.
그중에 3장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멀 리 할 때가 있으며.....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때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지혜로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지금 현재 내가 무엇을 해야 할 때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대부분 성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매 순간 매 순간 주어지는 기회를 잘 활용한 사람들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공부를 할 때임을 알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에는 직장선택을 잘 했습니다. 결혼할 때에는 배우자를 잘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매 순간 매 순간 그 시간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았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공자의 모습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공부해야 할 때는 공부를 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했습니다. 직업을 선택해야 할 때 그 때야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되지만 결국은 실패한 인생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똑 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져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똑 같이 하루 1440분의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똑 같이 하루 86,400초의 시간이 주어져있습니다.
문제는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살아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1년도 중요하고, 한 달도 중요하고, 하루도, 한 시간도, 일 분 일초도 중요성을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떤 글에 보니 시간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년의 가치를 알고 싶으시다면,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 물어보세요.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세요.
한 주의 가치는 주간신문 편집자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시간의 가치가 궁금하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일분의 가치는, 열차를 놓친 사람에게, 일초의 가치는 목숨과 바꿀지도 모를 아찔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 었던 사람에게, 천분의 일초의 소중함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문 그 육상선수에게 물어보세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의 시간은 하나님의 크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살아가면서 그 선물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낭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시작한 후에 한 달 두 달 지나가고 1년 2년이 지나가면 신앙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흑자를 보이면서 은혜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큰 은혜를 받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열심히 전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처음 고린도에 갔을 때에는 신앙의 슬럼프를 만나서 힘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브리스길라 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을 받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환상가운데 나타나셔서 힘을 주셔서 능력 있게 사역한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전도해 세운 교회 성도들이 신앙이 흔들린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권면하기 위해 편지를 보낸 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기는 고린도전서, 후서 이렇게 두 번 바울이 편지를 써 보낸 것 같지만, 집중해서 연구해보면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두 번의 편지가 더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개 중에 하나는 <어떤 편지>라고 불려지고, 또 하나는 <눈물의 편지>라고 이름을 붙여져서 연구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쓴 이유가? 그들이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앙이 흔들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고린도 전도 후에 바른 목회자가 뒤를 이어 들어가서 신앙지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른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들어가서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끼리 파당이 만들어 졌습니다. 성도들끼리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아시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말은 바울의 사도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자신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화해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한 것은 --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이 등장해서 잘못된 교훈을 줄 때 거기에 빠지지 말고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본질 그 대로 받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진리가 단순해 보여도 있는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받은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내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그것을 원한 것입니다. 순수한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2절에 뭐라고 합니까?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합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 있는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 너를 도왔다>라는 말은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놓여 회복될 것인데 그때에 이사야 선지자에게 능력을 주어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주역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울이 사용한 의도는 -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로 말미암아 인류를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말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있는 말씀은 이사야 49장 8절에 대한 사도바울의 주해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에서 <지금>이란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크게 생각할 때는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신 때로부 터 최후 심판의 때 전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우리 개인이 이 땅에서 생존하여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고, 더 작게는 --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지금 현재 <이 순간> 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란 말을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도 가장 작게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오늘 이시간이 <은혜를 받을 때고, 구원의 날>이라고 믿고 그대로만 된다면 더 이상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오늘 대로 은혜 받고, 내일은 내일대로 은혜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큰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본문처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는 심정으로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역사는 여러분이 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말씀드릴 텐데 집중해서 들어주시고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어서 침이 꿀꺽 꿀꺽 넘어가야 합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 <아멘, 아멘>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가이사랴에 살던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부흥회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욥바에 있던 베드로사도였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가고 싶지 않았지만 성령님께서 환상가운데 갈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욥바를 떠나 가이샤라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오게 됩니다. 그때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으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했습니다.
고넬료와 그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로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있는 심정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모한 심령 속에 말씀의 큰 은혜가 주어질 줄 믿습니다.
둘째, 간구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도가 R..A. 토레이 목사님(1900년대 미국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무디와 함께 사역)에게 찾아와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화끈하게 믿고 싶습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고 살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부흥회도 참석해보고, 여러 집회를 참석해 보았지만 도무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까? 가르쳐 주세요.> 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 말을 토레이 목사님이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물었다.
그러자 그 여 성도님이 “기도제목이야 많지요”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기도제목을 나열했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예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제목을 다 아실 테니까 이제는 한 가지만 기도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세요. 나 자신을 똑 바로 알게 해 주세요.. 나 자신을 정직하게 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 성도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다 보니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자기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하고 터지고, 성한 구석이 하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집사님은 너무 부끄러워 토레이 목사님을 찾아가서 자신이 본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지금 부터는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기도 중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더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이 체험을 한 집사님은 흔들리지 않고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구체적인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맛을 알게 하옵소서! / 은혜를 충만히 받기 원합니다. / 성령 충만하기 원합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셋째, 은혜 받으려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다섯 번의 집회를 꼭 참석하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은데 방해 된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결단하셔서 시간 시간 나와 보세요..
넷째, 겸손해야 합니다.
부흥회를 임하면서 꼭 필요한 것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교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정도면 잘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기도도, 말씀생활도, 봉사생활도 -- 그러나 다른 성도가 볼 때나 , 혹은 목회자가 보면 아닙니다.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담으려고 하면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억수같은 비가 내려도 뚜껑을 열어놓지 않으면 다른 데로 흘러가고 자신의 항아리에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기 바랍니다.
결론짓습니다.
이제 새 출발과 영성회복을 위한 성회가> 준비되었고 시작됩니다. 이 귀한 기회를 여러분 모두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은혜 충만히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동역 롬16: 3-4절
빌 클린턴이 미국대통령으로 재임시절 노동부장관으로 <로버트 라이시>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라이시 장관이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성공의 5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이것을 ‘라이시 5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꼭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법칙 : 컴퓨터를 배워라. 어느 직종, 그 누구라도 상관없이 성공하려고 하면 컴퓨터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면 당장 배우라고 합니다.
제2법칙 : 경쟁력 마인드를 가져라.
자신에게 있는 장점을 갈고 닦아서 경쟁력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제3법칙 : 사다리를 버리고 거미줄을 잡아라. 과거 산업사회는 사다리형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성공하려고 하면 남의 자리 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했지만 정보사회에서는 거미줄 모양으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제4법칙 :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라.
자신의 몸담고 있는 전 분야에 걸쳐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회는 정보화시대이기에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적극적이 며 광범위하게 사람들과 연결하여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라는 것입니다.
제5법칙 : 팀워크의 중요성을 잊지 말라. 지금 시대는 나 홀로 시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팀을 이루어 일하는 시대 이기에 팀워크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라이스 장관이 말한 다섯 가지 성공법칙은 우리가 사회 생활하는 데는 물론이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유익한 조언입니다. 그 가운데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다섯 번째 조언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목회자나 성도 모두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팀워크 동역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훌륭한 믿음의 인물일수록 혼자서 사역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팀워크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도 혼자서 사역한 것 같지만 그를 곁에서 철저히 도운 아론과 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 부장, 백부장, 오십 부장, 십 부장들이 있어서 함께 출애굽을 이끌었습니다.
예수님도 사역하실 때 혼자서 하신 것이 아니라 12명의 제자들과 동역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혼자서 잘난 척하며 전도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의 전도여행길에 의사였던 누가가 그림자처럼 동역했습니다. 간호사인 뵈뵈 자매가 동역을 했습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동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동역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인물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동역 자가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목회>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동역 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목회를 했으니 행복한 목회가 아닙니까?
저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행복한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즈음은 신앙생활을 하기 쉬운 것 같지만 많은 유혹들 때문에 어려운 시대입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목회가 참으로 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목회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를 하다가 힘들어서 포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저는 어떤 곳이던 말씀을 증거 할 기회가 있으면 <우리교회를 자랑합니다.> 어떤 자랑을 하는지 아십니까? 건물 자랑은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교회자랑하면 - 장로님 자랑, 성도님 자랑, 헌신하는 여러분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처럼 행복한 목회자같이 더욱 팀웍을 이루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고 싶어서 오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에게 <나의 동역자>란 호칭으로 불렸던 한 가정이 나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를 보편적으로 부를 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호칭합니다. 제가 호칭할 때도 <브리스길라 아굴라/ 혹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이 부부를 한 사람씩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남편 아굴라는 어떤 인물입니까? 아굴라는 지금의 터키 동북부 지역인 당시로 보면 본도 주(州) 출신 유대인입니다. <아굴라 뜻은 - 독수리>입니다. 아내 브리스길라는 - 교양이 높은 로마의 명문가문 출신이라고 보여 집니다. 이름의 뜻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암사슴>입니다. 이름 참 좋지요 이름으로 보아서 로마시대의 귀부인이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부부의 이름이 신약성경에는 여섯 번 나오는데 재미난 것은 세 번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하면서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세 번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하면서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 이름을 통해서도 많은 의미를 던지고 있지만 이름에서 이 두 사람의 신앙과 주님을 향한 열정이 얼마다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열정으로 사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결혼을 해서 로마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을 때, 큰 핍박이 임했습니다. 서기 50년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이 부부는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오고 거기에서 텐트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도 고린도에 오게 되는데 - 성공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덴에서 전도를 하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최초로 실패를 한 것입니다. 실패자 바울은 먼저 온 이 부부로 통해서 위로함을 받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바울도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에 함께 장막을 만들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한 것입니다. 바울은 주중에는 장막을 만들고 주일에만 회당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장막을 만들면서 이 부부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복음을 영접 합니다. 물론 후에 바울은 환상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1년 6개월간 헌신적인 사역을 합니다.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역시 사도바울을 도우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로 변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의 사역을 부부는 철저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어떻게 바울의 사역에 동역했는지 살펴보십시다.
첫째, 이 부부는 바울을 돕는 사역이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임을 알았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하고 있는데 이 말에서 동역자란 헬라어 “순엘코스”로서 <함께 일하는 자, 일하는 친구 즉 서로 돕고 위해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사실 사도바울과 이 부부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또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또 방금 고린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고, 직업이 장막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은 육신의 동역 관계를 넘어서 <복음 사역을 위한 동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섬기면 누가 빛을 보겠습니까? 사도바울이겠지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동역을 해도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주님을 위한 일이기에 아름답게 동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동역 관계가 한국교회 안에서는 잘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서는 평신도로서 사역을 하다가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서 목회자의 자리로 가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구마 전도왕 하면 누가 생각이 납니까? <김기동 집사>아닙니까? 기적적인 은혜를 체험하고 전도하기 시작하여 <고구마 전도법>으로 한국교회에 알려졌습니다. 많은 교회에 간증집회를 하면서 전도의 마음을 불어넣었습니다. 고구마 전도법 내용도 대충 아실 것입니다. 우선 불신자를 만나면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엎고 있는 아이가 아무리 못생겼다고 해도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원칙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제시하고> <거절을 하더라도 마지막 맨트 “그래도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구마 전도 왕으로 알려진 김기동 집사가 어느 날 보니 김기동 목사라고 호칭이 바꿔졌습니다. 집사에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경주에서 가정사역으로 알려진 안수집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계시면서 현대 무너져 가는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가정 사역에 관한 책을 섭렵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의를 나가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장로님 한 분을 만났는데 - 그 집사님이 교편을 포기하고 4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가 조금 잘한다, 인기 있다 싶으면 그동안 하던 생업을 포기하고 자신이 목회자가 되어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 받으면 모두 선교사로 나가야 합니까? 은혜 받으면 모두가 목회자를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일선에서 하지 않아도 그 사역을 잘 하실 분들이 많습니다. 그때에는 나는 내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사역하시는 분들을 후원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열심히 사업해서 - 물질로서 목회를 도우면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음악을 하시는 분들은 음악으로 목회를 도와주면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 입니다. 기술이 있으신 분들은 기술로서 목회자를 도우면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사도바울을 돕는 것이 곧 주님을 사역을 돕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서 도왔습니다. 우리 모든 제직들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자신의 달란트에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것이 주님을 위한 사역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서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부부는 - 평생토록 변치 않고 바울의 사역에 동역했습니다.
종교부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신 한경직 목사님께서 - 다른 교회 장로 임직식에 가서 이렇게 권면했다고 합니다.
<장로님! - 장로님은 진짜 진짜 진짜 장로님이 되십시오! 임직 받고 3개월은 누구나 잘합니다. 3년 동안 변치 않고 잘하시면 좋은 장로님이십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30년이 되어도 변함없이 충성하면 그분은 진짜, 진짜, 진짜 장로님이십니다.> 라고 했다오늘 본문에 소개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만 바울과 동역한 인물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그만두고 그 다음에 에베소로 사역지를 옮겼을 때 이 부부도 고린도의 삶을 정리하고 바울을 따라서 에베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에베소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 이 부부는 바울이 로마에 곧 올 줄 알고, 로마로 앞질러 이사를 합니다. 거기에서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왔을 때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바울은 그들을 다시 에베소로 보냅니다. 이렇게 그들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고 복음을 중심으로 살았고, 복음을 중심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섬겼습니까? 여러분 바울 주위에는 이렇지 못한 인물도 많았습니다. 바울이 좋다고 따라다녔다가 나중에는 세상의 삶에 빠져서 바울을 배신한 인물들도 소개합니다. 하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일평생을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교회를 함께 섬기는 저와 여러분의 관계도 이런 일평생 동역하시는 관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이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동역자였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주님을 만난 후에 주의 사업을 위해서 많은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하면 <건물로서 교회>를 생각합니다. 주후 300년까지 교회라고 한 것은 일반 가정을 일컬어서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일반 성도의 가정에서 성도들이 모이면 그것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에베소에 있으면 <에베소교회> 서머나에 있으면 <서머나 교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가정에서 성도들이 모이려고 하면 누군가가 집을 제공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즈음도 대 심방을 하고, 구역예배를 하다보면 자신의 집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분은 예배처소가 얼마나 복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집에서 예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예배 안 드리려고 합니까? 자기 집에 교인들이 오면 자신의 집을 보여줘야 합니다. 오픈해야 하니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사람들이 오면 청소도 해야 하고, 차라도 한 잔 대접해야 하니 귀찮아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런 성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에도, 바울을 따라서 에베소에 갔을 때에도, 로마에 머물렀을 때에도 이 부부의 집은 항상 열려있었습니다. 그 집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부부는 바울을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 놓았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남을 위해서 <생명>을 내 놓는 다는 것은 말이 쉽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도 심지어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힘든 일, 이 큰 사랑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실천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했을 때라고 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사역을 할 때를 배경으로 쓰고 있습니다. 간략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을 할 때 - 복음이 놀랍게 확장되었습니다. 문제는 복음이 확장되자 우상을 만들어서 팔던 사람들이 장사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장이었던 <데메드리오>가 사람을 동원해서 사도바울과 믿는 사람들을 싹 쓸어버리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절대 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목숨을 걸고 바울을 구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부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로마서를 쓰고 로마 교인들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로마에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꼭 찾아보고 문안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 요 4:23-24절
몽골에서 사역하시는 이용규선교사님의 사역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번은 베르흐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일 예배시간이 되어서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벌러르라는 소녀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교회 안으로 뛰어 들어 왔습니다. 평소 깨끗하게 교회에 오던 아이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예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녀가 잃어버린 소를 찾기위해서 소를 찾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습니다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소를 찾다가, 시간을 보니 주일예배를 드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소 찾기를 포기하고 땀에 젖은 채로 에배당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몽골에서 소는 아주 귀하게 대접받고 비싸게 거래되기 때문에 큰 재산입니다. 우리나라도 못 살 때 소한 마리가 있느냐? 없느냐?가 부의 척도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소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놀랍고 마음이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나 소녀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배드리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이용규선교사님은 설교를 마치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소가 아닌 예배를 선택한 벌러르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잃은 소를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고 예배순서에 따라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쳤을 때 바깥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였습니다. 도망간 소가 제 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몽골에서 직접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도였다고 하면 <소와 예배>를 선택하려고 했을 때 어떤 것을 선택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떤 것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은 삶의 환경이 어떠하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로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의 예를 든다고 하면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을 들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중에 유일하게 자연수명을 다한 사람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연수명을 다했기에 참으로 복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믿음으로 살다가 자연수명을 다한 것은 우리 생각과는 상황이 틀립니다.
당시는 황제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로마치하에 사는 사람들이 황배숭배를 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의 밥이 되고 무참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황제가 그렇게 핍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들이는 예배때문 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배로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찬식을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핍박을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신앙생활을 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핍박속에서도 예배하기 위해서 카타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카타콤은 지하에 있는 공동묘지입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여러개 있는데 지하 시신을 매장하는 곳인 그곳에 들어가서 박해를 피해가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시절에 사도요한은 평신도가 아니라 <사도로서> 주님을 섬겼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끓는 가마솥에에도 들어가는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에 유배도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도요한에게 놀라운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당시 신앙생활이 박해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언제 받았는지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날에 계시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임하였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주의 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절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요즈음 문 가운데 자동문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문은 버턴을 눌려야 열리는 문이 있습니다. 또 어떤 문은 센서가 작동이 되어서 사람이 온 것만 센서가 감지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게 되지 않습니까? 만약 옛날 사람들이 오늘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되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자동문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드려지는 예배가 이 자동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 자가 되어서 주님 앞에 예배하기위해서 나오기만 하면 우리앞에 막혀있는 천국의 문, 은혜의 문, 축복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마리아 수가성여인도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의 여인은 그 당시로 보면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사랑에 갈급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유대인에게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이 여인은 남편 다섯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남편 다섯명이 있었다는 사실은 사랑을 얻고자 별별 노력을 다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사는 여섯 번째 사는 남자는 자신의 남편도 아닙니다. 비참할 대로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이 여인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통 여인네들은 저녁에 물을 길으려고 다녔는데 이 여인은 정오에 혼자 물을 길르기 위해서 우물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오셨고 이 여인과 대화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성안으로 음식을 사오라고 보냈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시켜놓았을 때 주님은 그 여인과 대화를 합니다. <물을 좀 달라>고 말입니다.
사마리아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 예배라는 관점에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수가성 여인이 그동안 가졌던 모든 문제들이 한 순간에 풀였습니다. 물 문제에서 출발해서 - 영생의 문제로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통해서 완전히 자신의 문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있게 성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면서 와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힘입니다.
여러분 몽골의 소녀 벌러르도 예배로 통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주일날 예배로 통해서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체험했고, 귀한 계시록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는 예배로 통해서 자신의 모든 답답한 문제를 해결받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예배를 드릴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느냐 말입니다. <어떤 분은 있습니다. 라고 하시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지금 시대는 불가능합니다.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시대에도 예배로 통해서 하늘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예배의 감격이 있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예배하는 우리들이 지금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예배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예배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만 잘 아시면 됩니다. 우리장로교 교리를 담은 요리문답을 보면 우리의 믿음을 107개의 문항으로 묻고 답하는 식으로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
그중에 제일 첫 번째 물음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 때문에 즐거워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곳곳에서도 우리의 존재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 43: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1장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 12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A.W. 토저는 그의 책 <이것이 예배이다>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들을 당장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하고 더 영원한 것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첫 번째가 <예배하기 위함>이기에 예배는 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예배하면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존재의 이유이기에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그럼 조금 더 크게 교회의 존재이유를 생각해보십시다. 왜 우리교회를 이 자리에 세워주셨을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론적으로 보았을 때 교회의 존재목적은 크게 다섯 가지 입니다.
첫째가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둘째가 교육하기 위해서 셋째가 친교하기 위해서 넷째가 봉사하기 위해서 다섯째가 선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 를 교회의 다섯가지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 사명 가운데 첫째가 <예배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나의존재이유가 되고, 교회의 존재이유가> 됩니다. 사실을 바로 알면 우리가 하는 예배행위가 얼마나 귀한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감격이 있으려고 하면 -- 예배가 우리와 교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2. 예배를 누구에게 드리는지 바로 알고 드려야 합니다.
본문 앞 부분에 있는 22절에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 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당시 사마리아여인을 포함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예배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어디에 예배하는지 잘 모른채 - 예배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예배합니다. 해가 바뀌니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신에게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동해에 뜨는 태양을 보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위를 보고 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절에 있는 부처상에게 절을 하고 예배합니다. 어떤 곳에 보니 돌로 만든 부처상의 배를 만지면 복을 받는다고 배을 만지면서 빕니다. 얼마나 만졌던지 - 손 기름이 반질반질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 참으로 기가막힙니다. 왜요 어디에 예배할지를 모르면서 나름대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예배해야 합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21장에 2조에 보면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또한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 천사에게나 그 밖에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예배드려서는 안 된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 또는 무슨 다른 중보자를 통해서 예배드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려야 한다.”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23절 하반절에 “........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고 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시면서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끼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예배의 자세가 틀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3. 예배의 감격이 있으려고 하면 -- 예배자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지난해 이 본문을 가지고 할렐루야 찬양대 헌신예배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드린 말씀은 예배하는 우리가 <영으로 드려야 하고, 진리로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참으로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려고 하면 목사혼자 예배를 잘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3:3:3:1로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생각나시지요?
설교 3 / 기도 3/ 찬양 3/ 기타(안내, 봉사) 1 - 이렇게 준비하면 100% 온전한 예배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각성하시고 각자 분야에서 잘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님들도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두드러진 특징 요7:37-39절
<오두막>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윌리엄 폴 영이라는 분입니다.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도 힘든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여섯 아이들을 위해서 책을 써서 선물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책이 <오두막>입니다. 이 소설을 써서 15부를 복사해 가까이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 밖에 반응이 온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었던 사람들이 읽고서는 정식으로 책을 출판하라고 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몇 분의 도움으로 글의 내용을 수정하여, 책을 내기 위하여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종교적인 내용이 들어있다고 해서 거절당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앉아 평소 친분이 있던 목사님 두 분과 함께 직접 책을 발간했습니다. 광고도 하지 못하였는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웹사이트로 간단한 광고를 했을 뿐인데 책이 팔리기 시작했는데 한해 600만부 이상이 팔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38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맥스라는 아버지는 자녀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야외로 캠핑을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막내 딸아이(미시)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아들 둘은 구명조끼를 입고 카누를 타고 놀게 됩니다.
사내아이들이 카누를 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흐뭇해하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도 아버지에게 화답하려고 젓고 있던 노를 드는데 그만 카누가 균형을 잃고 뒤집혔습니다. 두 아들이 물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다행히 아버지가 과거 구조하는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옷을 벗고 아이들을 구조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한 아이를 구조하고, 또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합니다. 모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어서 머물던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딸아이가 없어졌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실종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도시에 어린이 연세 유괴범에 의해서 납치되고,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죄책감에 시달려 살게 됩니다. 그 후 폭풍우가 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집에 하나님께서 딸아이가 죽은 오두막집으로 오라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 초청장을 받은 아버지는 가족이 없는 틈을 타서, 그 오두막집으로 갑니다. 딸아이가 죽은 집, 으스스 한 그 오두막집으로 갑니다. -그 오두막집에서 그는 놀라운 경험을 한 주일 동안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믿어왔고 생각한 삼위하나님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성부하나님은 - 흑인의 모습으로, 성자 예수님은 목수의 모습으로 / 성령하나님은 또 다른 모습으로) 그러면서 삼위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얼마나 치밀하게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소설의 내용이지만, 너무나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물론 소설이기에 소설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하여간 삼위하나님을 만남으로 통해서 그의 마음이 치유되고, 상처 된 마음이 회복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는 딸아이가 죽은 장소를 알아서 시신을 묻어 주고, 연세 유괴범은 잡지만, 그를 용서해줌으로서 가정의 회복되는 내용입니다.
사실 삼위하나님은 우리가 말로서 설명하는 순간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해하기 힘들다고 무조건 모른 채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알고,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령하나님의 두드러진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성령하나님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1. 성령하나님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37절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말씀하시면서 성령님은 물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물 부족 국가가 되어서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물과는 많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40년 동안 물이 얼마나 귀한지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지금이야 성지답사를 가보면 이집트 쪽에도 광야를 개발하고, 나무를 심어놓았고, 이스라엘 쪽에도 엄청나게 개발을 해 놓아서 스프링클러로 물이 시원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할 때에는 광야는 물 한 방울 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주심으로 식수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물은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갈증해소는 물론이요, 생명유지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 더러운 것을 씻는 데는 물이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정착한 그들은 <정착하면서 올리브와 포도를 수확하고 나서, 광야 40년 동안 지켜주신 은혜를 감하하며,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8일 동안 지키면서 감사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명절 끝 날>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마다 금으로 만든 물 단지를 가지고 가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러와 제단에 부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의미는 <① 광야생활을 하면서 반석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 ② 장막절을 지난 후 밀과 보리를 파종할 때 비를 내려달라는 의미, /③ 메시야가 오실 때 성령님을 부어달라는 세 가지 의미>입니다. 이렇게 7일 동안 제사의식을 행하고, 8일째는 텐트를 접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처럼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장막절 제일 마지막 날 이제 백성이 의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이날은 제사장이 물을 뜨는 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성령의 특징>을 하나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하나님은 성령님을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보편성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왕, 제사장, 선지자)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절부터는 남녀노소 누구나 성령님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요엘서 2장28-29절에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모인 120명의 마음이 한결같이 성령님의 임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때 그들 모두에게 성령님의 놀라운 강림역사가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성령하나님은 남녀노소, 유 무식,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성령님을 주십니다. 목마른 심정으로 성령님을 찾고 간구하기만 하면 지금도 성령님이 임재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님은 <내재성>이 특징입니다.
삼위하나님의 역사를 엄격히 분리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성경을 기준으로 분리를 해 보면 구약시대는 - 성부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셨기 때문에 성부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해 역사하신 시대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기는 했지만 멀찍이서 사역했다. 멀찍이서 그들을 보호하셨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유다를 먼 바벨론으로 포로를 보내시기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는 - 성자시대라고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계신 시대(임마누엘)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의 상황에 가까이 오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후 부터는 - 성령시대라고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하나님이 우리 깊숙이 계시게 됩니다.
본문 38절에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성령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했습니다. 우리의 중심에, 성령하님이 내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인이라고 하면> 분명 여러분 속에는 성령님이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를 한 번 보세요.. 제가 오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워낙 모조품을 만들다보니 오이와 같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제가 들고 있는 이 오이는 진짜 오이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것을 믹서로 갈아보겠습니다. 지금은 딱딱하고 겉은 야물어 보이지만 이것을 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세요... 갈아보니 주스가 되었습니다. 오이 속에 물이 들어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 70%가 물로 되었다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물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배 속에, 우리의 몸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가 기도하실 때, 성령님의 체험이 없는 분들은 성령님이 임재 하도록 기도하시지만, 성령 받은 분들은 <내주하고 있는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의 두드러진 특징은 <충만성입니다.>
38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란 말은 <성령님의 충만성>을 말합니다. 세상의 물은 쓰면 쓸수록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물을 아껴서 써야 합니다. 지난해부터 금년 봄까지 얼마나 가물었습니까? 가뭄이 임하니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었습니다. 댐의 수위가 많이 줄어 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큰 댐도, 퍼내고 퍼내면 줍니다. 저수지도 그렇습니다. 지하수도 퍼내고 퍼내면 고갈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강은 마르지 않습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놀라운 환상을 경험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는데, 성전문지방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흐르던 물이, 흘러갈수록 많아졌습니다. (발목, 무릎, 허리, 건너지 못할 강) 그리고 그 강주위에 어촌이 만들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물은 바로 성령님의 물을 가리킵니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충만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하나님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에게만 성령님을 주실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만 성령님을 충만히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누구나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내재성을 가지고 있고, 충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성령님의 역사를 누가 체험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사람에게나 무작위로 주십니까? 오순절 성령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했을 때 성령님이 강림했는지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때도 오순절이어서 예루살렘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성령님을 체험한 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120명이었습니다. <성령 받은 120명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 그들은 주님을 따랐던 자들입니다.
-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 그들은 그 약속대로 성령님을 받기 위해서 열흘 동안 간절히 기도에 전무했 던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령님이 강림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받을 자를 39절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보세요.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성령님을 받을 자의 조건을 말씀하실 때 <그를 믿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는 성령님이 임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진지하게 생각하시고 답변해보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 하신 줄 확실히 믿습니까? (아멘) /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 주님이 제대로 믿기지도 않고, 성령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은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통해서 성령님께서 놀랍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 지면> 어떤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다.
첫째, 성령님이 충만하면 <성령님이 나의 지성의 영역을 매만지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임재하면 하나님을 알고 싶어집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하면 하나님을 알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갈증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알고 싶고 사모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읽고, 듣다가 그 갈증을 해소할 때 오는 기쁨과 영적인 맛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 충만하면 <성령 충만한 감성을 낳게 됩니다.>
이 감성은 한 마디로 말하면 <신비스러운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오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처럼 조건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항상 동일합니다. 환란 중에서도, 근심 중에서도,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셋째, 성령 충만하면 <의지에도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에 힘쓰고,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물론이요, 성도들이 모이는 시간과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반대로 성령이 시들어지면 소극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그냥 형식적으로 대하지 말고, 성령님의 두드러진 특징을 잘 알고 성령 충만의 역사를 늘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지성, 감성, 의지를 변화시켜 나가는 경험들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갈멜산 결투 왕상18:36-40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진출을 결정하는 한국과 일본과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해 볼 때는 모든 면에서 일본이 앞서있었고, 우리나라는 열등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 수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일본선수들이 받고 있는 연봉도 전체를 계산해 보니 우리나라 선수들 보다 16배를 더 받고 있었습니다. 팀의 전력을 분석하는 요원도 우리나라는 2명에 불과한데, 일본은 26명으로서 13배가 많습니다. 이런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대표 선수들이 일본과의 경기를 해서 4:1로 승리를 하고 4강행을 결정지었습니다. 놀라운 일을 해 낸 것입니다. 아마 지난 수요일에는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긴 경기를 뉴스로 보고 또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경기를 한문으로 표현한다고 하면 <대첩>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첩이라는 말은 <크게 이김, 큰 승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도 살펴보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싸워서 승리한 대첩이 여러 번 있었다.
<1018년에는 - 고려에 침입한 거란 군을 이듬해 2월 강감찬 장군이 지휘관이 되어서 크게 무찌른 귀주대첩이 있었습니다.>
<1592년에는 -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일본함정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한 <한산대첩>>이 있었습니다.
<1597년에는 -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의 함정을 맞아서 31척을 파괴한 <명랑대첩>이 있습니다.> 이런 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도 보면 놀라운 한 판 싸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싸움에 관점에서 이름 붙이면 <갈멜대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멜대첩은 - 주전 850년경 아합이 이스라엘 왕으로 재임해 있을 때, 살림이 우거진 갈멜 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한 명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벌인 목숨을 건 한 판 승부였습니다. 이 싸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주전 870년경 이스라엘 왕이었던 오므리 왕이 죽고 그 아들 아합이 북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강대국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북쪽에 있던 <시돈>이란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레바논을 말합니다.
아합이 왕위에 올라서 어떻게 하면 시돈의 침략을 받지 않고, 시돈과 평안한 관계를 유지할까? 궁리하다가 시돈나라와 정략적인 결혼을 맺게 됩니다.
시돈 왕이었던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엣 바알은 <바알과 함께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의 아버지는 바알을 절대적으로 숭배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세벨이 결혼조건으로 <이스라엘 왕궁과 이스라엘 곳곳에 자신들이 믿는 바알산당을 짓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을 받은 아합 왕은 나라만 평안하다면야 그것이 무제냐는 식으로 허락을 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곳곳에는 하나님을 섬기던 곳이 허물어지고, 바알을 섬기는 산당들이 궁중과, 이스라엘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신을 앞장서 섬기는 선지자들을 이세벨이 경제적인 지원도 해 줄뿐더러 법적으로 보호해 줍니다. 그러니 얼마 있지 않아서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순진했던 백성들은 보이는 바알과 아세라가 하나님인지, 그동안 자신들이 조상이 섬기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갈멜대첩이 있기 3년 반전부터는 이스라엘 전역에 임한 지독한 가뭄으로 인해서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들의 눈에 보이는 <풍요의 신, 비를 내려주신다고 생각한 바알 신>이 들어왔습니다.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이름의 뜻은 <내 하나님은 여호와시다>입니다. 그 이름 뜻대로 엘리야는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백성이 바알과 아세라가 하나님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알지 못할 때 그는 담대하게 아합 왕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가뭄이 임한 것은 왕 당신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당신이 십계명을 어기어, 우상을 섬기니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을 온 나라에 보내어서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에게 녹을 먹는 바알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모아달라고 했습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의 요구대로 응해주었다. 백성들도 갈멜 산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영적으로 혼란케 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도 갈멜 산으로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였을 때 엘리야는 백성들을 꾸짖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왕상 18:21)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그 한 마디의 따끔한 질책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다음 단계로 들어갑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의 예언자는 나 한 사람이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는 850명인데 내기를 해서 어떤 신이 참 신인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내기 방법은 - 소 한 마리씩 잡아서 각을 뜨고 제물을 준비하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서 불로서 그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 신인 것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 놀라운 제안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객관적으로 보아서 지금 이 싸움은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850대 1입니다. / 그 850명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왕후였던 이세벨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백이 든든합니다. / 백성들의 대다수도 아직 그들의 편에 가까웠습니다. 반대로 엘리야는 그를 도와줄 동료도, 지원세력도, 후원자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으로는 <주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목숨을 담보로 내기를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신음소리, 개인의 신음소리, 한탄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기도로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멜대첩이 있었던 열왕기상 18장의 말씀만 보시고 엘리야의 기도를 전부라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18장 본문을 전후한 17장에도, 그리고 19장에도 나옵니다. 17장, 18장, 19장 전체에서 엘리야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17장에 보면 - 엘리야는 굶주려 죽기 직전에 있었던 사르밧 과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 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8장에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야훼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삶은 어떤 순간에도, 우리의 신음소리까지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기도하면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1982에 등산을 좋아하던 마크 웰만이란 청년이 등산을 하다가 산에서 추락해서,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을 좋아한 그가 이제는 영원히 산에 오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등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등산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비록 상반신만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 상반신으로라도 조금씩 오르면 어떤 산이라도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훈련이 힘들었지만 인내하면서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훈련한지 7년 후, 1989년 7월 18일 마크 웰만은 암벽으로 된 미국 캘리포니아의 엘 가피탕이란 1000미터 높이의 암벽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섭씨 39도의 더운 여름 날씨에서, 하반신 장애를 가진 자가 어떻게 1000미터의 암벽을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가 암벽 꼭 대기에 걸어준 로프에 자신의 몸을 맞기고 한 번에 15센티미터씩, 끌어올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장장 그는 9일 동안에 로프를 7000번 이상 당겼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 1000미터 암벽 등반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가 암벽등반을 성공하자 기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느냐?> 그러자 그는 <한 번에 15센티미터씩>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똑 같은 15센티미터를 7천 번 이상 반복함으로써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크 웰만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오직 내가 실천할 때만이 이루어집니다. 앉아 있지 말고, 지금 나가 시작하십시오. 15센티미터만 앞으로 나가겠다고 결심한다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이렇게 담대하게 기도로서 승부를 요청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동안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조금씩 당겨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기도하는 것도 한꺼번에 하려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한꺼번에 15센티미터씩 당기듯이, 주님과의 사이를 15센티미터씩 당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은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서 또 생각해 보십시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신청해서, 이제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숫자가 많았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 소 한 마리를 잡아 각을 떠서 나무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신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아침부터 그들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 8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 목소리가 얼마나 웅장했고, 쩌렁쩌렁했겠습니까? 백성들의 생각에 금방이라도 응답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응답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2시가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립니다. <너희 신이 지금 묵상하고 있는지, 자고 있는지, 어디 갔는지 모르니, 더 큰 소리로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고는 그들이 더 열광적으로 소리 지르며 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에 피를 내면서 부릅니다. 그렇게 하기를 3시간, 오후 세시가 되었을 때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후 3시 쯤 되자 그 동안 기다렸던 엘리야가 기도를 준비합니다.
그리고는 기도를 합니다. 본문을 보세요. 36절 이하에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는 것.
둘째,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백성들로 통해서 알게 해 달라는 것.
셋째, 자신의 행위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것이라는 것 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단한 기도가 아닙니까? 지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기도를 하였는데 엘리야가 한 기도는 무척 간결했고, 짧았다. 이렇게 짧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엘리야는 평소의 15cm씩의 기도로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 세상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도, 세상 사람들이 지금 대다수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도 - 참 신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까지 꿰뚫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엘리야는 간결하게 세 가지의 기도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38절에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불이 내려서 모든 것을 태워서 재가 되게 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임을 분명히 알려준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본 백성들은 드디어 신앙고백을 합니다.
39절에 “모든 백성이 보고 엎으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제야 흔들렸던 신앙을 가졌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진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진실하다는 것을 40절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백성들이 기손 시내에 가서 모조리 죽여 버린 것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한 사람과 : 바알과 아세라 850의 싸움이 엘리야의 승리로 끝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갈멜대첩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줍니다. 저는 이 갈멜대첩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이 두 가지 교훈만이라도 바르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신앙생활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의 환경이라도 주님 앞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작은 어떤 것을 달라는 요구에서 본질적인 기도를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를 보면 아합이 통치했던 그 시대와 비슷하다.
1) 영적인 타락의 시대입니다. 어떤 신이 참신인지 모르게 된 시대입니다.
2) 3년 반의 가뭄으로 힘들어 했던 그 시대처럼, 지금은 경제적인 한파로 인해서 경제적인 가뭄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우리의 기도는 왜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 원인을 바르게 분석해서
- 엘리야의 심정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온 국민들이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도 늘 갈멜대첩과 같은 승리의 역사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대한 자부심 고전1:18-25절
어떤분 간증입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부터 안경을 썼습니다. 처음 안경을 쓸 때는 지금처럼 눈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안경을 쓰다 보니 점차적으로 눈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씩은 안경의 도수를 높여야했습니다. 40이 넘어서자 눈앞에 뭔가 어른어른 거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 비문증이라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일명 날파리 증이라고도 하는데 눈앞에 어떤 글자처럼 생긴 물체가 왔다 갔다 하는 병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그냥 참고 살라는 것입니다. 비참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런 눈을 가지고 안경이 없는 시대에 살았다고 하면 저는 살아가는데 엄청나게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한 것은 지금 시대는 안경을 하나만 착용하면 조금의 불편은 있지만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안경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초등학생은 27,9%가 안경을 착용하고, 중학생은 49.1%, 고등학생은 58.9%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력이 나빠져서 여고생의 경우에는 61.6%가 안경을 착용한다고 합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44.7% 가 착용한다고 하니 - 이제 거의 인구의 절반정도가 안경을 착용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수이상이 안경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을 것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 놓고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시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시력을 잃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대대적인 영적인 개안수술을 했습니다. 그 수술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함으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렸던 죄와 죽음, 슬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인해서 - 인류는 영적으로 어두웠던 눈을 새롭게 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을 믿음으로 인해 영적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십자가의 사역을 믿는 사람도 있고, 그 십자가의 사역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잘 보이십니까? 아마 잘 보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보이시는 분 중에서, 안경을 쓰시고 있는 분일 경우에는 -- 안경을 한 번만 벗어서 보세요, 잘 보이십니까? 아마 안 보이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희미하게 보이실 것이고, 어떤 분은 아예 형체조차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 십자가는 분명히 똑 같은 십자가인데 여러분의 눈에 문제가 있기에 십자가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에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여기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지금 어떻게 마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어떤 분은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에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인해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믿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 또 어떤 분은 십자가를 보면서 아직도 믿기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 또 어떤 분은 십자가의 역사를 믿어보려고 노력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를 대하는 나의 영적상태가 어떤가에 따라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틀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했을 당시에도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1. 먼저 유대인들의 생각을 살펴보십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달리셨다는 십자가는 기분 나쁜 것이었습니다.
왜 기분 나쁜 것이 되었을까요? 성경대로 말하면 거리끼는 것이 되었을까요? 원래 유대 사람들은 <표적, 초자연적인 이적>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출애굽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 10가지 이적으로 통해서 해방시켜주었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도록 해 주셨습니다. 광야생활을 할 때는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어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표적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 구원자도 이런 표적을 행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한 청년이 나타나더니만,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해서 혹시나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큰 표적은커녕 중한 죄인만이 달려서 죽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신명기 21:22-23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합니다. 나무에 달려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를 보신 분은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영화 이상으로 그 형벌이 심했을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그 형벌이 심하여 마지막 십자에 달기 위해서 손과 발에 못을 밖을 때는 다 고개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 만큼 처절한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그 형벌을 주님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유대인들은 자신의 생각하는 메시야와 같지 않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을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2. 그럼 이방사람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방사람들의 대표로 본문에서는 헬라인을 들었습니다. 헬라하면 그리스들 말하지요? 그리스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파르테논 신전>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는 철학자들이 철학을 논하고 토론했던 아레오바고 언덕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토론 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이성적인 지식으로 어떤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랐고, 어떤 사건도 이성적으로 풀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그들의 철학적인 지식으로 보면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처럼 그들은 <미련한 것으로>치부해 버렸습니다.
3. 하지만 똑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 그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분 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을 얻는 성도들>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지금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입니다.
바울도 원래는 표적을 원하였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철두철미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련한 그들을 그냥 두지 않고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깁니다. 그것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사울이 주동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일을 추진해서 예루살렘과 거리가 먼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믿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울의 생각에 예수님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은 분이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주여 뉘시오니이까?>
예수님이 <나는 내가 핍박하는 예수라> 지금 사울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만났을 뿐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라는 귀한 직책을 허락받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기분 나쁘게(거리끼게) 생각했던 예수님이, 그가 그토록 기분 나빠했던 십자가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강한 빛으로 인해서 육신적인 눈은 좋지 않게 되었지만, 그 시간에 어두웠던 영의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보면서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했습니다.
2장 2절로 넘어가서 보세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이제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알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한 마음으로 전도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떤 실패를 합니까? <아테네>에서 전도여행에서 실패를 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보면 뵈레아에서 아덴(아테네)에 전도를 하려고 갔습니다. 아테네에 가보니 기라성과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을 보는 순간, 바울은 철학적으로 이들을 전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쏙 빼고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종교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종교성이 많기에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는데, 여러분이 섬기는 신들 중에 제일 마지막에 보니 <알지 못하는 신> 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으로는 명 설교를 했는것 같은데 -- 나타난 반응은 그의 기대와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놀립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입니다. 바울 나름대로는 철학적으로 멋지게 설교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너무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십자가에 대한 자부심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자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그들도 모르는 신들 중에 제일 끝에 있는 신,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런 신에 예수님을 비유해서 설명했으니 어떻게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철저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도착한 곳이 고린도입니다. 실패했던 바울이 고린도에서 실의에 빠져있을 때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납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힘이 되는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이제부터는 나는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전도해서 이룬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대단하였습니다. 앞부분의 말씀을 보세요. 1장 5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합니다. 지식적으로 대단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도 대단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적인 지식도 대단했을 뿐 아니라 - 하나님께 받은 은사도 대단했으니 얼마나 그들이 교만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이 섬기는 교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네 파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이 마음이 네 가지로 갈라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바울이 개척했으니 당연히 개척자를 따라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아볼로가 목회를 했으니 목회자를 따라야지 생각했습니다.
어떤 성도는 베드로가 수제자이니 베드로를 따라야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니 예수님을 따라야지 합니다. 네 부류 다 똑똑합니다. 네 부류 다 받은 은사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시끄러웠겠습니까?
이런 현상은 비단 고린도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변의 교회에도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한 주님을 섬기면서, 한 교회를 다니면서 - 우리는 원로목사님을 따른다, 우리는 담임목사님을 따른다, 우리는 장로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교회를 분쟁을 일으킵니다. 왜 이런 문제가 닥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지고 그 자리에 인간의 교만이 들어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럼 교회에는 누구만 드러나면 됩니까?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주님의 십자가>만 나타나면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주님의 십자가>의 눈으로만 교회를 보면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의 눈으로 교회를 보지 않고, 개척자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목회자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장로님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 <십자가의 안경을 쓰시고 - 주님의 눈으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누가 교만하십니까? 왜 교만합니까? --자신의 눈으로 보니 교만합니다. 그런 분은 십자가의 눈으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눈으로가 아니라 세상의 물질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바울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부터 멀었던 영적인 눈을, 이제는 십자가란 안경을 쓰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만 바로 알면 이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성도여러분 이제 여러분! 이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시려고 하십니까? - 유대인처럼 -- 기분 나쁜 것으로 보시렵니까?
- 이방인처럼 -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보시려고 합니까?
<십자가만이 나의 능력이요, 십자가만 이 나의 자부심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벧전2:18-25절
하나님은 인간들을 고난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고난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행복하기를 원하지 고난을 받고 싶어 하는 성도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저자인 베드로는 성도는 고난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고난으로의 초대가 여러분의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신다면 이 땅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한 사람 들어보십시다. 한국이 낳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서혜경씨가 있습니다. 1960년 생인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다. 피아노를 칠 때면 항상 어머니가 옆에 계셨다. 마당에서는 동생들이 그네를 타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달려가서 같이 놀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내게는 피아노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놀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고 사생활도 없었다. 오직 피아노, 피아노뿐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인 아이.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였다.
난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가 엄마가 소리 지르기 전까지는 나오지를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그 시간이 내게는 피아노 아닌 다른 것에 한눈을 팔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콩쿠르. 하지만 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열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부욕. 나 자신의 열망이 문제였다. 난 항상 인정받고 싶고 특출나게 살고 싶었다. 최고가,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다. >
그녀는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하여 88개의 건반을 치는 고난의 삶을 다섯 살 때부터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1980년 부조니 콩쿠르 사상 최연소 우승(20세). 그러나 이 해 손가락 마비로 연주불가 판정받습니다.
하지만 3년 뒤 독일 뮌헨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수상하며 재기 성공.
1988년 카네기홀 세계3대 피아니스트 선정됩니다. 그 후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음악의 꽃을 활짝 피우던 중 2006년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아서 이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2008년 1월 암흙의 시간을 을 딛고 예술의전당 재기무대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했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서혜경씨는 매일 하루에 여덟 시간씩 맹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 사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세계 3대 피아니스트인 그의 삶을 돌아보니 영광의 삶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다섯 살부터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하거나 이루려고 하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운동선수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피나는 훈련의 삶이 필요할 것 입니다. 사랑하는 남여의 경우에도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주님 앞에 쓰임 받았던 인물들은 한결 같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기 위해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약속에 땅 가나안까지 오기까지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편안하게 비행기를 태워서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정들었던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수 천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로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10가지 재앙으로 바로가 항복하고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40년이라는 혹독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사도는 그 사실을 알고 초대교회당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고난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종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쓴 말씀입니다.
18절에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 말씀을 쓸 당시 종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종의제도가 있었습니다. 국가기관에 소속된 관노비가 있었고, 일반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노비의 가격이 1398년의 기록으로 보면 <말 한 마리 값으로 노비 두 세 사람을 샀다>고 합니다. 말 한 마리의 값이 지금 제주도에서 사육하는 조랑말이 약 2-3백만에 거래되고, 경주마는 약 4천 만 원에서 그 이상으로 천차만별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말의 가격으로 계산했을 때 보면 노비는 요즈음 돈으로 약 100만 원 정도로 거래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종도 남자냐, 여자냐, 늙었느냐? 젊었느냐? 에 따라서 약간의 차등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럴 무렵 노비가 인격적으로 사람 대접받는다는 것은 기적이지요. 그때는 그저 노비는 집이나, 땅, 짐승과 같은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노비는 주인의 마음대로 상속할 수 있었고, 저당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청의 허락만 받으면 종을 죽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1398년 무렵 종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보다 1300년도 전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어떤 취급받았는지 알지 않겠습니까?
그런 시절에 종 가운데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해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고, 교회 공동체에 함께 모여서 예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신분이 종이니 얼마나 많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종으로서 힘든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사도는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해라 - 좋은 주인에게도 순종하고 복종하지만, 까다로운 주인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도 역시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합니다. - 죄를 지어서 매를 맞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는데도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거든 참 으라고 했습니다.>
19-20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즉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떤 고난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을 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합니다.
예수님도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고난을 받으셨고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합니다.
그 다음 보세요.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간사스러운 거짓)도 없으시며” 이 말은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어떤 거짓이나 잘못을 찾을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3절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이 말은 <예수님은 계속 자극과 도전을 받으면서도 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고 침묵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비난 받으면서도 되돌려 비난하지 않으시며 고난당하는 중에도 그들에 대해서 공격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았고, 또한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계셨지만 그는 오직 공평하게 심판하실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는 이야기다.>
24절에 “친히 나무에(십자가 형틀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였으니(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같이 살게 함이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맞은 채찍으로 인해서 -- 우리들의 영적인 상처가 나았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왔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기 전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종살이를 하면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어도 고난의 삶을 사셨다. 그 고난의 삶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하면서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참을 수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장차 주님 나라에 갔을 때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참고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십시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성도님들 마다 나름대로 <나는 이런 고난이 있다> 라고 이야기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은 - 경제적인 고난으로 힘들어하실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해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로 인해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인관계로 인해서 힘들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면서 공부 때문에 고난당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고난 문제를 여러분은 어떻게 극복해 나가시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내 방식대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서울 신길교회 이신웅목사님이 말라기서 3장 10절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와 헌물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아프리카에 있는 카메룬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카메룬에 처음 선교하려고 갔는데 얼마나 가난한지 지금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루 세끼를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를 먹더라는 것입니다. 또 더 못사는 사람들은 이틀에 한 끼를 먹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전도를 하고 그들이 교회에 주일에 나오는데 교회에 도착하면 그들이 먼저 하는 일은 물로 배를 채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고 나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 형제가 나오는데 한 주일은 형이 나오고, 한 주일은 동생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화가 나서 그들에게 야단을 치는데 <너희들은 하나님이 격주로 계시냐? 왜 주일마다 같이 나오지 않고 한 주씩 번갈아 나오느냐?>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형제들이 하는 말이 <자기 집에는 바지가 하나 밖에 없어서 형이 교회에 올 때는 동생이 바지를 벗어주고, 동생이 교회에 올 때는 형이 벗어주고 그렇게 해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선교사님이 어떻게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이 선교사님이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저도 아마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사는 곳이 아니라도 십일조설교는 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선교를 한지 10여년 세월이 흘렀는데 그들의 생활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선교사로 처음 갔을 때보다 훨씬 못살더라는 것입니다. 그 무렵 성령님께서 선교사님에게 책망을 하신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합니다. 네가 진짜 목사냐? 네가 진짜 선교사 맞냐? 왜 축복의 통로인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서 너는 그들에게 설교를 하지 않느냐?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면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선교사님이 왜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상황이 어렵다 보니 설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선교사님이 그때부터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무려 24번에 걸쳐서 계속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장 6개월에 걸쳐서 계속해서 십일조와 헌물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이 설교를 6개월 하고나니 성도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하는데 -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에 보니 평상시 그들의 수익보다 10배의 수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년을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60배의 수익이 있더라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삶에서 고난이 닥친다고 그저 힘들어 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사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환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살아가면서 -- 힘들고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 때 - 우리는 두 번째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생각한대로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면서, 철저하게 인내하면서 십자가를 수용했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주님은 그 어려움을 수용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우리를 구원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음 안에서 받은 어려움은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욥이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욥기 23: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지금의 고통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 고통 너머에는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이 주어지는 줄 믿고 믿음으로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이나 성공한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역경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고 견뎠을 때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고, 성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들도 현실의 삶이 어렵다고 해도, 여기에서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말씀 안에서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에도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복을 받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