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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2) 참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선한 의지’의 중요성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이 원하는 ‘보편적인 선’과 일치해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세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을 인간의 ‘참행복’(至福)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를 통해서 참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이 질문을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이에 대해 단계적으로 다루어보겠다. 우리는 앞선 글(제5회)에서 성 토마스가 반사적인 행동들을 포함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했음(I-II,1,1)을 살펴보았다. 토마스는 행복의 다양한 후보에 대한 고찰이 끝나자마자, 이 인간적 행위를 각자가 지닌 지성을 통해 “목적을 인식하면서 전개되는 의지적 행위”(I-II,6,1)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완전한 목적을 인식하고 또 그 목적을 향해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 규칙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의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려 15문제(I-II,qq.6-21)에 걸쳐 의지의 대상, 원인, 움직이는 방식 등을 토대로 ‘의지적 행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룬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행위를 통해 참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지에 관해 「신학대전」 제II부 전체에서 방대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신학대전」을 들어 보이는 성 토마스의 모습을 묘사한 베노초 고촐리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중 일부. 출처 위키미디어
지성적 욕구인 ‘의지’의 선함은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
성 토마스는 독특하게 ‘의지’를 욕구(appetitus)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욕구’란 자신과 유사한 것 또는 자신에게 편리한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傾向)을 뜻한다. 짐승들은 감각적 본성에 따라 오직 물질적이고 개별적인 선을 향한 ‘감각적 욕구’만을 지닌다. 이와는 달리 인간은 감각을 넘어서는 인식 능력인 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성적 욕구’도 지니며 토마스는 이를 ‘의지’(voluntas)라고 부른다.(I,80,2) 이 의지는 단순히 개별적 선들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또는 적어도 ‘선처럼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I-II,2,8)이러한 표현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외부적인 대상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의지가 종속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의지 자체가 발동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저지당할 수 없고, 원하자마자 즉시 실행된다. 물론 의지가 명령한 외부적인 행동들은 여러 요건에 따라서 저지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I-II,6,4)
토마스는 한편으로 의지를 강조하지만, 윤리적 고려에서 행위의 결과들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행위자가 악한 결과들에 대해 책임이 있기 위해서는 그가 자기 행위의 악한 결과들을 미리 내다보고 의도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거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 거지가 나중에 그 돈을 비윤리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기부행위는 윤리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 청부업자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원수를 죽이도록 교사했다면, 그의 행위는 분명히 비윤리적이다. 앞의 예처럼 자기 탓 없이 무지(ignorantia)에서 행하는 행동은 의지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의지’ 개념이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려해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가 이성을 이용해서 구체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에 ‘의도’(intentio, 지향)라는 별도의 명칭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이와 같이 토마스에 따르면,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우선, 주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intentio bona)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인간이 지닌 ‘선한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아직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지와 지성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렇다면 의도가 선하다는 판정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선을 그 대상으로 삼을 때 선한 것이며, 의지가 작용하는 상황이란 선악의 판정에서 부차적이다.(I-II,19,1&2) 그런데 의지의 선성은 지성에 종속되어 있다. 지성이야말로 의지가 자신의 선택 능력을 실행해야 할 대상을 의지에게 제안하기 때문이다. 지성이 올바르다고 판정한 대상을 의지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는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악한 행위가 된다.(I-II,19,3)
반대로, 최고로 자유로우며 인간의 모든 능력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갖는 한에서, 의지는 “지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절대적으로 말해, 우위는 지성에 속한다고(I,82,3) 주장했기 때문에, 종종 ‘주지주의자’로 분류됐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의지를 무시하고 지성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인간을 지성이 관련된 관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도하며 그를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다. 의지는 욕구하는 대상, 즉 목적을 향해 인간을 밀어붙이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한다. 욕구하는 인간은 목적에 이를 때까지 이 목적을 향한 역동적인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의지는 또한 인간을 최종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 셈이다.(I,82,1)
따라서 인간적 행위는 그것이 인간의 참행복을 보장하는 최종 목적에 얼마나 상응해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 이렇게 의지의 선성이나 올바름(rectitudo)은 근원적 규범인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의지는 세상에 있는 개별적인 선들보다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보편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의지가 최종 목적인 지복 직관 또는 신적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간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의지의 고유한 특성은 자기 행위들의 주인이라는 데 있다. 즉, 의지는 자유롭다. 의지의 어떠한 행위도 필연에 의해 부과되지 않는다. 토마스에 따르면, 의지는, 비록 이러저러한 결정된 대상이 아니라 행복을 자연적으로 욕구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해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대상 앞에서 자유롭다.(I,82,2)
그렇다면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느님을 원해야 하는 의지와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다음 회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1)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인간의 여정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구스타브 도레, <천국을 바라보는 단테와 베아트리체> 「신곡」에 판화, 1892년. 출처 위키미디어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0)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선’ 안에서 발견될까?
인간의 최종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 가능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후보들에 대해 하나씩 검토해 왔다. 토마스가 받아들이는 인간의 세 가지 선에 대한 구분, 즉 외부적인 선, 육체와 관련된 선, 영혼의 선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재물 등의 외적인 선이나 건강 등의 육체의 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영혼의 선, 달리 말하면 인간성 자체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건강한 육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라틴어 속담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은 건강한 정신이라는 영혼의 선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욕구 이론을 대표하는 매슬로(A. Maslow)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를 넘어서는 ‘자아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영혼의 선에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는, 바로 토마스가 행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출처 위키미디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한계와 극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 행복을 찾기 위해 ‘좋은’ 또는 ‘잘’(eu)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분석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혹은 해야 할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바로 그 평가 대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됐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즉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 주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로 대표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잘 이루어지는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저자나 독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과 태도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가짐만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한다. 실제로는 불평등과 차별 등 사회 구조의 문제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모든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른 방식으로 돌보려는 시도도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종종 매스컴에서도 소개된 ‘멍 때리기 대회’나 템플스테이 등과 연계된 ‘명상에 대한 열풍’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시도는 외적인 선, 육체의 선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직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능력을 과연 인간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검토가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이 삶에서 가능한 관조(contemplatio)에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모든 인간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조건, 곧 감각들의 영역에 묶여 있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I,83,‘머리말’)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II,3,6)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자기실현’은 결코 인간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개방성 덕분에 인간 영혼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세의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그렇지만 토마스는 ‘영혼의 선’이 진정한 행복과 관련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임을 지적하면서, 최종 목적으로서 ‘욕구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 자체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작용’의 측면을 구별한다. 그 안에 인간의 최종 행복이 있는 대상은 영혼 자체도 아니고 영혼의 어떤 한 능력도 아니라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이나 사용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영혼의 선’과 직접 관련된다.(I-II,2,8)
최종 행복에 대한 강력한 후보들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서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은 잃어버릴 수 없어야 하고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 삶에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이나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으며, 이 삶에서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덕적인 결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무위와 휴식의 단계가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개인이 이룩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다시 파괴되어 버린다.(ScG III,48)
따라서 토마스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명상, 영혼의 선한 활동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진리와의 완전한 합일 없이는 이런 만족은 지속될 수 없다. 선을, 창조된 선과 창조되지 않은 선으로 이등분한 것은 이제까지의 행복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토마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시했던 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욕구를 전적으로 쉬게 해야 하는 완전한 선”인 최종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된다.”(I-II,3,3)
그렇다면 오직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9)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육체적 쾌락은 불완전한 선(善)...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건강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신체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다’(집회 30,16)고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5복’ 안에 건강과 치아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프로필 사진 촬영, 식스팩 만들기’ 등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아직 젊은이들은 건강 자체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매우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된다.(욥 2,1-10 참조) 그렇다면 건강이나 쾌락과 같은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 크리스티안 사르트만의 <욥과 그의 친구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을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되듯 육체의 건강은 재물 이상의 선이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
성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에 있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을 능가해야 한다.(I-II,2,5) 그러나 육체의 선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많은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결코 사자의 용맹함이나 코끼리의 힘, 치타의 빠름을 능가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조차 나약한 인간들끼리 경쟁해서 얻은 성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선에만 인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살아가며 인간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생명 유지, 즉 인간 육체의 보존일 수는 없다. 성 토마스가 존경하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이미 “살아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보다 좋고, 인식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보다 좋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강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목적이 있다.
더욱이 성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게서 육체의 존재가 영혼에 의존할지라도 인간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 자체는 영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부자들조차 중병에 걸리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여기서 재물과 같은 외적 선들은 건강과 같은 육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자체는 ‘지나가 버리는’ 본성을 지닌다.
“삶 자체는 지나가 버리고 […]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이다.”(I-II,5,3)
이렇게 육체적 삶의 유한성은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완전한 쾌락에 대한 성찰
그렇지만 육체의 선에는 건강만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최종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움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그러나 쾌락을 이렇게 간단히 행복의 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욕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즐긴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의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한 피한다.”(키케로, 「최고선악론」)
그런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가 누명을 쓰게 된데에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들의 오해와 달리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쾌락이란 결코 육체적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념에 사로잡힌 극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에서 찾았다. 따라서 쾌락은 그에게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성 토마스는 육체적 쾌락을 인간이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삼켜버려 다른 모든 선을 경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이 곧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은 행복을 따라오거나 행복의 어떤 부분을 따라오는 하나의 고유한 우유(偶有)”, 즉 행복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I-II,2,6) 더욱이 그는 즐거움은 선(善) 때문에 욕구될 만한 것이며, 이런 경우 선은 즐거움의 근원이며 그것에 형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토마스는 만일에 인간이 자기에게 적합한 어떤 ‘완전한 선’을, 실제로 혹은 희망으로 혹은 적어도 기억 안에 가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불완전한 선’이라면, 그 쾌락이란 진정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만을 가진 것(分有)이나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완전한 선을 따라오는 즐거움 그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고 우유로서 행복의 본질에 따라오는 어떤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말하는 완전한 쾌락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선, 또는 정신적인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8) 권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어울리지 않는 권력 탐하는 욕심이야말로 불행이다
‘부’도 ‘명예’도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재벌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 모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재물을 ‘권력’을 얻기 위해서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재벌이야 자신에게 남는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치더라도, 여유가 없는 이들조차 자신의 전 재산을 탕진하며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들곤 한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자들 일부는 자신의 지위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권력을 잃고 난 다음에도 자신과 가족들이 평생 호사를 누릴 만한 재물을 어렵지 않게 축적하기도 한다. 이런 부정을 저지르고도 대형 로펌 등을 활용하여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벗어나거나 ‘사면’이란 이름으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이해되기 힘든 현상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권력이야말로 인생의 ‘최종 목적’, 즉 행복의 가장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선과 악 모두에 관련된 권력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논박되어야 할 이론 중에 하나로, “행복은 완전한 선인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완전한 선이며 이런 것은 권좌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는 주장을 소개한다.(I-II,2,4,obj.2)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치는 목표가 불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거나, 타락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과 관련해서 토마스는 ‘권력은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I-II,2,4) 권력을 잘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만일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면 최악이므로 권력은 선과 악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이다.(ibid.,ad2)
우리는 우리나라의 길지 않은 민주주의의 역사 동안에, 심지어 최근에 벌어진 계엄 사태를 통해서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쉽게 공동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해 왔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해 왔다. 심지어 「사피엔스」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민주주의 사회에선 제한된 시간 내에서만 권력을 누릴 수 있기에 인물이나 정당이 권력을 돌려주기 싫으면 빈번히 법을 파괴하곤 한다”고 말했다. 권력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불법행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다 보면 권력이 선으로 기울기보다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악으로 기우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 보에티우스는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저술한 「철학의 위안」을 통해 권력의 허망함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철학의 위안」의 장면을 묘사한 마티아 프레티의 <보에티우스와 철학>
권력의 무상함을 직접 보여준 보에티우스
추상적으로 들리는 성 토마스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예가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권력을 가져봤고, 이를 모함으로 허무하게 빼앗긴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는 자신의 삶을 통해 권력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인격’ 개념의 정의로 유명한 보에티우스는 로마 최고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아테네 유학 등을 통해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는 그를 발탁해 가장 큰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바른 정치를 펼치려 하자, 반대세력이 ‘보에티우스가 동로마 제국과 내통했다’고 모함하며 그를 반란죄 혐의로 고발했다. 보에티우스는 제대로 변론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로 파비아의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이란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그 책 안에서 그는 자신을 신뢰하는 척했다가 권력을 잃을까 봐 두려워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왕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즉, 권력의 허망함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근심의 괴로움과 공포의 아픔도 물리치지 못하는 이 권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신하들을 두렵게 만들면서도 신하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신하들을 두려워하여 항상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그리하여 그의 권력에 대한 권리가 그를 섬기는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을 너는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철학의 위안」, 제3권, 산문5)
최고선에 따라야 하는 권력
성 토마스도 권력과 행복이 관련성이 있다면, 어떤 행복은 권력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권력을 덕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력을 지닌 자는 공동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시민들의 덕스러운 삶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II-II,47,10)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이렇게 권력이란 최종 목적이라기보다는 올바로 사용되어야 하는 ‘행위의 시원’(principium)이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성 토마스는 특히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진정한 권력을 인간이 자기 스스로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 이웃 위에 군림하고 예속시키려는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여기서 ‘원죄’의 본질이 어떤 계명의 위반이나 육체의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 독립과 자율이란 이름으로 ‘권력’을 소유하려 함에 있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 없이,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고자 하는 ‘무질서한 의지’(disordinata voluntas)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권력을 탐하려는 인간의 욕심이야말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죄로 떨어지기 쉽고, 이는 불행을 예약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행복과 연관해서 살펴본 재물, 명예나 명성, 권력 등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 자신의 바깥에 놓여 있는 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성 토마스는 인간이 이성과 의지를 통해 행복에 이를 채비를 갖추기 때문에 그의 행복은 외부적 원인에 좌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이란 우리 자신을 이루는 육체와 영혼에게 좋은 선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음 회부터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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