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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슬한 「가을바람(秋風)」,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가을바람 한시(漢詩)편>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얼굴을 스르륵 스치며 살랑살랑 가볍게 불던 가을바람이 이젠 제법 싸늘한 무거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강렬한 한여름이 지나가고 조석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마침내 성숙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을은 센티멘탈한 낭만의 계절이자, 가을철 쌀쌀한 기운인 숙살지기(肅殺之氣)다. 나무도 단풍 든 잎을 떨어뜨려 자신이 입었던 갑옷을 벗어버리게 되니 탐욕을 내려놓고 자신을 성찰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첫서리가 내리고 온 산하에 단풍이 들면 문득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감상에 빠져들곤 한다. 상쾌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와서, 이러한 사색과 성찰, 회한 그리고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음을 직접 깨달으며 자연의 이치와 순리, 지혜를 깨닫게 된다. 근데 갑자기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윤동주(尹東柱)의 「서시(序詩)」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다.’ 가을은 괜스레 남자의 마음을 센티하게 만든다. 쓸쓸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흩날리면 과거의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사랑을 갈구한다. 가을의 색상은 그야말로 낭만적인 남성의 분위기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성을,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의 계절이다. 반면 화려한 봄꽃에 벌 나비가 춤추는 산야(山野)에는 초록빛 가득한데, 따스한 햇살에 새싹을 틔우고, 달콤한 향기를 연신 뿜어대는 봄날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계절이다. 그래서 감성적이고 화려한 여성의 계절인 것이다.
◉ 지금부터는 중국의 시인들의 「가을바람(秋風)에 관한 시구들」을 감상해 보자.
먼저 중국 한 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에서, “가을바람에 뉘우치는 마음이 싹트다(秋風悔心萌)”라 하였고, 두보(杜甫)의 詩 ‘강한(江漢)’에 나오는 구절에서, “지는 해에 마음 되레 비장해지고, 가을바람에 병이 나으려 하네.(落日心猶壯 秋風病欲蘇)” 하였다. 예로부터 가을은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절이다.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도 “가을바람 시원도 하고, 가을달 밝기도 하여라. 낙엽은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갈가마귀는 나무에 앉았다 다시 놀래어 날도다. 서로 생각하니 어느 날에나 만나 볼까? 이때 이 밤 심정 가누기 어렵네.[秋風淸 秋月明 落葉聚還散 寒鴉棲復驚 相思知見知何日 此時此夜難爲情]” 하였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지은 추성부(秋聲賦)에는, 각종 가을 소리를 듣고 가을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인생을 돌아본다는 내용이 있다. 어느 날 구양수가 밤 창밖에서 나는 수상한 소리를 듣고 동자에게 내다 보랬더니 "별과 달은 밝고, 은하수는 하늘에 걸렸는데,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소리가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라고 대답한다. 구양수가 "아! 가을의 소리로구나.“라며, 나무나 풀 등 사물도 성대한 시절이 지나면 늙고 죽는다는 하늘의 이치를 되돌아본다. 시 속의 가을 소리는 작가 자신의 심경을 비유한 것으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도 변해가는 것이니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들어 은연중에 순응자연(順應自然)의 이치를 드러내고 있다.
○ 더하여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산행(山行)」이란 시에서 “서리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란 시구는 후세에 길이길이 회자되는 명구이다.
또한 중국 중당(中唐)의 시인 류우석(劉禹錫 772∼842)의 「가을 노래(秋詞)」에서 “예로부터 가을이 되면 적막하고 쓸쓸하다. 슬퍼지지만, 난 가을이 봄보다 낫다 말하리. 맑은 하늘 학 하나가 구름 뚫고 날아오르니, 내 시심도 곁따라 창공으로 오르네.(自古逢秋悲寂廖 我言秋日勝春朝 晴空一鶴排雲上 便引詩情到碧霄)”라고 읊었다. 시인이 봄날과의 대비를 통해 가을을 예찬하는데 분위기가 꽤 호쾌하고 낙관적이다.
● 다음 3장(三章)의 고시(古詩) 사(詞) 「가을바람의 노래(秋風詞)」는 조선후기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작품이다. 첫장(章)은 ‘灰’ 운목(韻目)이고 둘째 장은 ‘庚’ 운목(韻目)이며 셋째 장은 ‘微’ 운목(韻目)이다. 이 글은 3장(三章) 모두 각 4구(句) 끝 글자인 압운자를 통일하여 운율을 최대화했다. 또한 3장(三章) 모두 첫구(句)는 ‘秋風’으로 시작하고 바로 이어서 ‘淅淅’, ‘瑟瑟’, ‘凄凄’ 등의 의성어나 의태어를 사용했고, 12구(句) 모두 감탄문(感歎文)이 끝날 때 쓰는 어조사 ‘兮’ 자를 사용해 운율과 라임은 물론 율격까지 극대화한 노래 가사다. 이 글은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처럼 한문 문체 사(詞)는 운문(韻文)의 한 형식(形式)으로, 민간 가곡(歌曲)에서 발달하여 당나라 이후 오대(五代)를 거쳐 송나라에서 크게 성행한 노래 가사였다. 시형(詩形)에 장단구(長短句)가 섞여 장단구(長短句)라고도 하며, 시여(詩餘)ㆍ의성(倚聲)ㆍ전사(塡詞)라고도 한다.
* 내용은 이러하다. 가을바람 산들산들, 오동잎 떨어지고 국화꽃 피었으니 내 마음 한가하다. 가을바람 소슬하고 강물은 해맑다. 풀벌레 울어대니 내 마음 서글프다. 가을바람 쓸쓸하고 한 해도 저물어 간다. 나뭇잎은 성깃성깃, 내 마음 유유하다.
1) 「가을바람의 노래(秋風詞)」* 3장(三章) / 이덕무(李德懋)
秋風淅淅兮雁巳來 가을바람 산들산들 기러기 벌써 왔나
天濶雲淨兮梧葉摧 구름 걷혀 하늘 넓고 오동잎 떨어지네.
節屆高秋兮黃華開 하늘 높은 가을 절기에 국화꽃 피었으니
我心卽閒兮登彼臺 내 마음 한가해라, 저 대에 오르련다.
秋風瑟瑟兮雁南征 가을바람 소슬하고 기러기 남으로 나네.
瞻望天涯兮水澄淸 하늘 가를 바라보니 강물은 해맑구나
草虫喓喓兮入戶鳴 풀벌레 찌르르 창에 들어 울어대니
我心無聊兮薄遊城 내 마음 서글퍼라, 잠깐 밖을 노니련다.
秋風凄凄兮鴻雁飛 가을바람 쓸쓸하며 기러기 훨훨 날고
歲聿其暮兮已授衣 이 해도 저물었나 솜옷 벌써 갈아입네.
蒲柳驚秋兮木葉稀 갯버들은 시들고 나뭇잎은 성깃성깃
我心悠悠兮陟崔巍 내 마음 유유해라, 높은 산에 올라보자.
● 다음 사(詞) 「가을바람(秋風) 3첩(三疊)」은 조선중기 문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유배작품이다. 그리고 이 글처럼 구법의 장단이 일정하지 않은 장단구(長短句) 사(詞)는 고대 시가의 일종이며, 운문(韻文)이자, 노래를 부르던 가사였다. 이 글은 그의 문집 『동악집(東岳集)』에 수록되어 있다. 첫첩(疊)은 ‘遇’ 운목(韻目)이고 둘째 첩은 ‘陽’ 운목(韻目)이며 셋째 첩도 ‘陽’ 운목(韻目)이다.
이 글은 1624년 3월,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가 특명으로 함경도 경성부(鏡城府)로 유배(流配)되었을 때, 한양의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이후 3년 후에 해배되어 돌아왔다.
내용은 이러하다. 가을바람 불어오고 해는 저물고 바닷물에 어룡이 노하는 듯, 나랏님은 저 멀리서 뭐 하시나? 걱정에 마음이 괴롭다. 가을바람에 날씨마저 서늘한데 서리 내려 단풍이 든다. 나랏님 그리워 눈물이 쏟아진다. 가을바람 부는데 밤은 길고 뜬구름이 달빛을 가린다. 나랏님 생각에 밤새 잠 못 이룬다.
2) 「가을바람(秋風) 3첩(三疊)」* / 이안눌(李安訥 1571~1637)
秋風起兮白日暮 가을바람이 일어나니 밝은 해가 저물고
海水波兮魚龍怒 바닷물의 파도는 어룡(魚龍)이 노하는 듯.
美人邁兮何處 미인(나랏님)은 저 멀리 어디에 있나?
心𢥞𢥞兮愁苦 근심 걱정에 마음이 애달프네.
秋風凄兮天氣涼 가을바람 쓸쓸하고 날씨마저 서늘한데
白露爲霜兮木葉黃 흰 이슬이 서리 되니 나뭇잎 단풍 드네.
望美人兮天一方 하늘 멀리 계신(天一方) 나랏님이 그리워
悵延佇兮雙淚滂 손꼽아 기다리니 두 줄기 눈물이 쏟아진다.
秋風高兮秋夜長 가을바람 높이 불고 가을밤은 길어라.
浮雲曖兮蔽月光 희미한 뜬구름이 달빛을 가리네.
懷美人兮不能忘 나랏님을 생각함이여, 잊을 수가 없도다.
獨轉輾兮私自傷 홀로 잠 못 이루니 내 몸이 절로 상하네.
[주1] 천일방(天一方) : 천각일방(天各一方). 서로 멀리 떨어져서 만나기 힘들다.
[주2] 연저(延佇) :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다
● 다음 장단구(長短句) 사(詞) 「가을바람 맑고나(秋風淸)」 2수(二首)는 조선후기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진 한문학의 대가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의 작품이다. 이 시편은 그의 문집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책25(冊二十五)≫의 <성구고(聖九藁)>에 실려 있다. 이 책은 1833년 3월부터 8월 사이(癸巳三月 至八月)에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묵죽화가이면서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였다. 그래서 그는 서너 번의 유배와 파직으로 일생 동안 부침이 많았던 대단한 선비였다.
이 글은 쌍조(雙調) 전단(前段) 6구(句) 6․7․7․7․6․7 40자(字) ‘養’ 운목(韻目) / 후단(後段) 6구(句) 6․7․7․7․6․7 40자(字) ‘庚’ 운목(韻目)으로 구성된 쌍조 80자체(字體)이다.
이 사(詞)의 내용은 이러하다. 전단(前段)에선 가을의 바람 달 구른 산 모두 밝고 역력하고 호쾌하다. 밤중에 종소리 울리니 잠 못 이루는데 자꾸 울어대는 벌레 소리에 근심만 생겨난다. 후단(後段)에선 가을의 달은 밝고 바람 맑아 하늘이 교결하다. 까치와 까마귀가 은하수 메워도 메워지지 않아도 견우와 직녀의 정(情)은 의구하니 인간의 정(情)보다 더 낫다네.
3) 「가을바람 맑고나(秋風淸)」* 2수(二首) / 신위(申緯 1769~1845)
秋風淸秋月朗 가을바람 맑고 가을 달 밝구다.
秋雲歷歷秋山爽 가을 구름 역력하고 가을 산 호쾌하다.
夜如何其夜五更 밤이 얼마나 되었던고. 그날 밤 오경 즈음에
鍾街鍾聲撼書幌 종로 거리에서 종소리 울려 서재 휘장을 흔드네.
撼書幌人未眠 서재 휘장을 흔드니 사람들 잠들지 못하는데
一段新愁百虫響 한 조각 새로운 근심에 온갖 벌레가 울어대네.
其二
秋月朗秋風淸 가을 달 밝고 가을바람 맑구나.
秋天皎潔秋河傾 가을 하늘 교결하고 가을 은하수 기울었다.
烏鵲塡河塡不得 까치와 까마귀가 강을 메워도 메워지질 않아도
依舊牛郞織女情 견우(목동)와 직녀의 정(情)은 의구하네.
織女情又一年 직녀의 정(情) 또한 1년이라 하니
猶勝人間恨死生 외려 죽음과 삶을 슬퍼하는 인간보다 낫구나.
● 다음 ‘侵’ 운목(韻目)의 오언절구 「가을바람(秋風)」은 조선중기 소백산에서 은거한 선비 단곡(丹谷) 곽진(郭진(山+晋) 1568~1633)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의 문집 『단곡집(丹谷集)』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가을밤에 갈바람이 불어와 수풀을 흔들어 댄다. 은자(隱者)인 시인의 베갯머리까지 울어대니 괜히 백발노인의 마음만 슬퍼진다고 읊었다.
4) *「가을바람(秋風)」* / 곽진(郭(山+晋) 1568~1633)
秋風吹不歇 가을바람이 끝없이 불어와
中夜動千林 한밤중에 수풀을 뒤흔들다가
響入幽人枕 은자(隱者)의 베갯머리까지 울리니
空悲白首心 백발노인의 마음이 괜히 슬퍼지누나.
● 다음 장단구(長短句) 사(詞) 「추풍문답(秋風問答)」은 조선후기 주화파 명재상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작품이다. 이 사(詞)는 쌍조(雙調) 전단(前段) 5구(句) 3․5․7․5․5 25자(字) ‘御’ 운목(韻目) / 후단(後段) 7구(句) 3․5․5․5․5․7.7 37자(字) ‘灰’ 운목(韻目)으로 구성된 쌍조 62자체(字體)이다. 전단(前段)에선 화자가 가을바람에게 묻는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근심이 함께 찾아온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근심도 사라지는 이유가 궁금하다. 후단(後段)에선 가을바람이 답한다. 나는 어디든 무심히 오고 간다. 사람들이 괜히 심장과 간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바라건대 술독의 술을 호탕하게 맛보고 싶을 뿐이라고 읊었다.
5) *「추풍문답(秋風問答)」* / 이경석(李景奭 1595~1671)
가을바람에게 묻노니, 소슬한 바람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세간의 박정함이 그 누가 너 같으랴. 다만 바람이 불어오니 근심이 찾아오더니 불지 않으니 근심이 가버리네.(問秋風 蕭瑟自何處 世間薄情誰似汝 但解吹愁來 不解吹愁去)
가을바람이 답하길, 나는 본디 무심하거늘 따라 왔다가 어디든 돌아간다. 세상 사람들아, 어떠신가? (사람들이)괜스레 심장과 간이 끊어질 듯 아프다고 말한다. 내가 불어간다고 하더라도 또한 이르지 못하는 곳도 있다. 바라건대 황금 술독의 술을 (호탕하게) 맛보고 싶다.(秋風答 我自本無心 來從來處來 如何世上人 空使心肝摧 吾行且有不到處 請君試酌黃金罍)
● 다음 ‘先’ 운목(韻目)의 오언율시 「가을바람(秋風)」은 조선 중기 문신 수색(水色) 허적(許 1563~1640)의 측기식 한시다. 그는 영천군수, 형조정랑, 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 허담(許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위(許渭)이고, 아버지는 참봉 허방(許昉)이며, 어머니는 윤암(尹巖)의 딸이다.
내용은 이러하다. 세월은 탄환이 굴러가듯 덧없고 가을바람 또한 끝없이 분다. 차가운 산은 맑은 비취색 같고 연한 버들은 성긴 잎새만 남았어라. 이미 공명은 저물고 백발의 귀밑털에 놀란다. 바닷가에서 흥취 두터우면 돛을 높이 달고 달리리라.
6) 「가을바람(秋風)」 / 허적(許 1563~1640)
歲月如丸轉 세월은 둥근 탄환이 구르듯 한데
秋風又䬃然 가을바람 또한 빙빙 도는 듯하네.
山寒初淡翠 차가운 산이 곧장 맑고 푸르니
柳脆已疏煙 연한 버들에 이미 성긴 안개 덮어서라.
坐覺功名晩 앉아 생각하니 공명은 저물어 가고
還驚鬢髮鮮 게다가 흰 귀밑털에 절로 놀라지만
滄洲饒逸趣 바닷가에는 뛰어난 흥취가 두터우니
明日一帆懸 내일은 돛을 높이 달고 달리리라.
● 다음 ‘冬’ 운의 칠언절구 「추풍탄(秋風歎)」은 조선 선조(宣祖) 왕의 손자 규창(葵窓) 이건(李健 1614~1662)의 측기식 한시다. 이 글은 억울한 귀양살이를 하면서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탄식하다가 지었으며 그의 문집 규창집(葵窓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인조(仁祖) 때인 1628년 부친 인성군이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 의심을 받아, 아들인 이건은 두 형 등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35년 제주도에서 울진으로 이건의 유배지가 바뀌었고, 1637년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종친으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오직 예술 분야에 매진하여 詩, 書, 畫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節)이라 칭송된다.
7) 「추풍탄(秋風歎)」 가을바람에 탄식하다 / 이건(李健 1614∼1662)
昨夜秋風萬木空 지난밤 가을바람이 나무숲을 뚫고 불었는데
夕陽幽鳥傍寒松 석양 속 그윽한 새는 겨울 소나무에 의지했구나.
至今悔向雲林外 지금은 구름 걸린 숲 밖에 나와서 후회하나니
忍與紅塵白眼逢 차마 속된 세상 버리지 못해 눈 흘기며 맞이하네.
● 다음 ‘東’ 운의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을바람(秋風)」은 조선후기 해주목사, 서천군수, 남원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만주(晩洲) 홍석기(洪錫箕 1606~1680)의 평기식 한시다. 그는 경상남도 고성 출신이며, 이 글은 그의 문집 『만주유집(晩洲遺集)』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가을바람에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고 변방의 기러기 날아간다. 이러한 시절에, 옛 한나라 장수는 백발에 놀라고 초나라 신하는 푸른 단풍과 마주한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분수(汾水) 강가에서 깊은 상실감에 빠져 슬픈 노래를 부른다. 중국 송옥(宋玉)이나 장한(張翰)은 가을바람에 시를 짓고 떠나갔다고 한다. 나도 덩달아 흥이 나서 배를 타고 강동으로 가볼까’하고 읊었다.
8) 「가을바람(秋風)」 / 홍석기(洪錫箕 1606~1680)
忽看寒葉落梧桐 갑자기 오동나무의 차가운 잎이 떨어지니
萬里吹來塞上鴻 만 리 바람이 불어오고 변방의 기러기 날아가네.
漢將此時驚白髮 한나라 장수는 이러한 시절에 백발 보고 놀라 하고
楚臣何處對靑楓 초나라 신하는 어디에서 푸른 단풍과 마주하랴.
長門㤪淚千行下 길다란 문 앞에서 원통한 눈물 한없이 흘리고
汾水悲歌一曲中 분수(汾水)의 슬픈 노래가 한 곡조 안에 들어있네.
宋玉豈如張翰去 송옥(宋玉)이 어찌 떠나간 장한(張翰)처럼 하리오.
扁舟乘興向江東 또한 작은 배를 타고 흥이 나서 강동으로 향하랴.
[주1] 분수(汾水) : 중국 산시성(山西省) 북부에서 시작하여 태원(太原)을 거쳐 하진(河津) 부근에서 황하에 합류하는 강. 동성(同省)의 남북 교통의 간선임. 길이 690㎞. 고대 중국의 시인들이 고향을 떠나 온 분수(汾水) 강가에서 가을에 놀라며, 깊은 상실감에 마음속의 황량함을 표현하는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주2] 송옥(宋玉) :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楚)의 문인(文人), 굴원의 제자. 작품에 ≪구변(九辯)≫, ≪초혼(招魂)≫, ≪고당부(高唐賦)≫ 따위가 있다.
[주3] 장한(張翰) : 중국 진나라 때 장한이 제 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화를 피할 계책으로 “가을 바람이 부니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오 나라로 돌아갔다고 함.
[주4] 편주승흥(扁舟乘興) : 배를 타고서 불현듯 친구를 찾아가는 정취를 말한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폭설이 내린 날 밤 홀연히 친구인 대규(戴逵) 생각이 나자 산음(山陰)에서 거룻배를 타고 흥에 겨워[扁舟乘興] 찾아갔다가 그냥 돌아온 고사가 있다.
● 다음 ‘月’ 운을 압운한 10구의 단편 오언고시 「가을바람(秋風)」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의 문집 『무명자집(無名子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가 54세 때 지은 평기식 한시로, 가을바람 맞으면서 세월의 변천과 무상함,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였다.
9) 「가을바람(秋風)」 / 윤기(尹愭 1741~1826)
秋風日淸洒 가을바람에 볕은 맑고 깨끗해
雲薄靑天兀 구름 엷고 하늘은 드높아라.
垂柳落過半 수양버들은 반쯤 잎이 떨어져
踈颯如老髮 성글기가 늙은이 머리 같네.
以彼天道變 저 천도(天道)의 변화 때문에
感此人事忽 인사(人事)의 덧없음을 느끼네.
兒童相戱逐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노느라
不知惜歲月 세월이 아까운 줄 모르는데
愁來強欲忘 수심을 억지로 잊어보려고
已復書空咄 허공에 다시 돌돌(咄咄)을 써보네.
[주1] 저 천도의…… 느끼네 : 가을이 오고 버들잎이 지는 등 계절의 변화로 인해 인생이 덧없이 훌쩍 가버리고 말았음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주2] 허공에 …… 써보네 :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는 뜻의 자조적인 표현이다. 진(晉)나라 도독(都督)이었던 은호(殷浩)가 환온(桓溫)에게 미움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자, 하루 종일 공중에다 무언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終日恒書空作字)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바로 ‘돌돌괴사(咄咄怪事)’, 곧 ‘쯧쯧 괴이한 일이로다.’라는 뜻의 네 글자였다고 한다.
● 다음 오언율시 「추풍초슬슬(秋風初瑟瑟)」은 임진왜란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작품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며, 금산전투를 이끌다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했으며, 이후 또 다른 아들 고종후는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내용은 이러하다. ‘가을바람이 저문날 성곽 위로 쏴쏴 불어간다. 문득 초나라 굴원과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를 떠올리며 가을 소리에 맞춰 호방하게 글을 짓는다’고 적고 있다.
10) 「가을바람이 막 우수수 불어오네(秋風初瑟瑟)」 / 고경명(高敬命 1533~1592)
天末秋風至 하늘 끝까지 가을바람 불어와
蕭蕭弄晩聲 쏴쏴 저문 바람 소리로 희롱하다가
凄迷吹澹月 쓸쓸하게 으스름 달로 불어가니
迢遞泛重城 저 멀리 성곽 위로 떠가구나.
楚客魂應斷 초객(초나라 굴원)의 넋이 응당 끊기니
長門夢幾驚 긴 문의 꿈에 자주 놀란다.
歐陽方夜讀 구양수(歐陽修)가 밤에 책을 읽다가
豪賦屬新成 가을 소리에 새로이 시를 지어 호방하게 읊었다네.
[주] 구양수(歐陽脩 1007-1072) :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문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 육일거사(六一居士)이다. 당나라 때의 화려한 시풍을 반대하여 새로운 시풍을 열고, 시문(詩文) 양방면에 걸쳐 송나라 때 문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힌다. 저서에 《신오대사(新五代史)》, 《신당서(新唐書)》, 《모시본의(毛詩本義)》 등이 있다. 가을 소리를 듣고 가을에 관한 생각을 하며 인생을 돌아본 ‘추성부(秋聲賦)’가 유명하다.
